기억하자, 내가, 누구인지

불쏘시개 연작 - 2번

by 소는영



오늘도 하루는 시작된다.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2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의 가로등이 어둠에 잠식당한 걸 보니 새벽인 듯하다. 이제 나의 상태를 천천히 살핀다. 심장박동은 여전히 빠른지, 침대의 매무새는 가지런하게 흐트려졌는지, 벽지는 오늘도 흐느적거리며 회색빛을 보내고 있는지. 조심스레 눈을 닦고 퀴퀴한 방안의 냄새를 맘껏 맡는다. 제길. 악몽으로 심란해진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나는 책상으로 가 신경안정제 한 알을 먹었다. 오늘로써 310일인가? 복용한 지. 하.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젠 날짜 관념마저도 희미해져 갔다.




창밖을 보아하니 아침인 것 같다. 여느 때와 같이 파랗고 어두운 것에서 감을 잡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바람의 맛(風味)으로 알아챈 걸까? 여러 생각이 들 때쯤 다행히 전자레인지에서 돌아가던 우유가 다 익었다고 비명을 냈다. 컵의 가장자리를 손으로 집고 조심스레 떨어지지 않게 들고 방으로 돌아온다. 잠깐의 ‘외출’은 부정의 기운을 날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서 그런지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 환기(喚起)한다. 차가우면서도 따스한 아침의 촉각. 올빼미형 인간으로 살아온 나로선 만나기도 힘든 고운 손을 잡을 때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려들게 된다. 어떠한 연유에서 그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 걸까. 다시금 ‘좋지 않은’ 생각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방은 어두워져 있었다. 창밖은 다시 어두워졌고 시계는 3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란 ‘인간’은 회의(懷疑)적인 기분이 들 때면 조용히 책상에 앉아 사색에 잠기곤 한다. 차분하게 반추(反芻)하며 돌이켜 생각하는 일련의 행동을 통해 지금(現在)의 나와 마주할 때면 이유 모를 황홀감에 감탄한다. 어째서 이유를 모르냐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내가 인간이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고 과거서부터 움직여온 시간의 흐름. 그 강물의 줄기에 직접 발목을 적실 수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랩쳐(Rapture)


조심스레 입 밖으로 내뱉은 첫 단어. 이는 종교에서 부르짖는 황홀경(怳惚境)의 상태로서 순교자(殉敎者)들이 주로 말하곤 했다. 믿음을 전달하는 어린 양들은 그들이 놓인 주변 환경을 개의치 않듯 짐승들의 무리를 당당하게 기어갔다. 사자든 하이에나든 간에 어떠한 포식자들의 존재도 피식자의 그것을 없앨 순 없었다. 바이슨처럼 두꺼운 견갑(堅甲)을 두른 전장(戰場) 속의 나. 광활한 대지에 홀로 서서 양들을 향해 따라가야만 하는 나. 그런 나에게도 ‘경이로움’이 남아있긴 한 것일까. 시선에서 하얀 점이 사라질 때까지, 우매한 소는 그저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성, 사유(事由), 직립보행, 유약(柔弱)하기 짝이 없는 신체기능 등 말이다. 하지만 생각건대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자유의지(自由意志)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아니 어쩌면 나(我)가 성립하기 위해선 없어서는 안 되는 그것.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 그것이 있을 때만 비로소 나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가 나를 세속의 노예화(奴隸化)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밖에 나가고 싶은가? 그러면 나가라. 너는 인간이니까. 밥을 먹고 싶은가? 그러면 먹어라. 인간이니까. 숨을 쉬고 싶은가? 그러면 쉬어라. 넌 인간이다. “인간이 아닌 자. 숨도 쉬지 말지니. 그대에겐 죽음만이 안식뿐” 네발 달린 짐승은 인간계에 소속될 수 없는 채 노예로 낙인찍혀 목적 없는 방황에 놓이게 된다. 어떠한 비극도 동물의 언어로 마땅히 형해화(形骸化)하지 않은 채 부질없는 작은 몸부림을 선보일 뿐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색깔이 남들과 달랐다고 한다. 검은색. 단색 중에서도 그 어떠한 것과도 조화(調和)를 이루길 거부하는 그 색(色). 음. 어쩌면 과한 생각일 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 점을 망각(忘却)하지 않았다. 사후적 판단(事後的 判斷)은 인과를 호도(糊塗)할 우려가 있는 만큼 그러한 결론을 내릴 때는 언제나 신중하게 사고해야 한다. 비가 와서 미끄러진 것이지 미끄러질 때 비가 온 게 아니니까 말이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로 양 손가락을 모은다. 꾹꾹. 나는 창가로 발걸음을 옮겨 우두커니 밖을 바라본다.


아래로는 소나무가 끝을 모르듯 드높게 솟구쳐 있었고 위로는 까만 구름 두 덩이가 하얀 구름 사이를 맴도는 게 보였다. 학창시절 미술 시간.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온갖 소도구를 책상 위에 펼쳐놓아야만 했던 그때, 팔레트에 검은색과 흰색 물감을 흩뿌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색은 확연히도 구분됐다. 중간 따윈 허락하지 않아 끝을 봐야만 하는, 모 아니면 도식의 사생결단(死生決斷)을 위한 링. 고대 로마의 검투사를 떠올리게 하는 ‘황홀한’ 콜로세움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가 펼쳐지던 그곳.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뇌 밖으로 던져버린다. 아니 던져보려고 노력했다. 거대하고도 두꺼운 두개골(頭蓋骨)은 차가운 드라이아이스로 만든 방호벽(bulkhead)처럼 부탁을 거절한다. 결국 다시 생각은 팔레트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생각의 전환이라도 해보자.


"나는 흑백논리와 같은 역겨운 단어로 사전(事典)을 더럽혀지기 전의 조화를 소망한다.검은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상관없지 않은가. 아니 그전에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물길을 붓으로 조심스레 열어주면 안 됐던걸까? 안될 이유가 없잖아?"





오른쪽 손목에 채워진 녹슨 시계를 조심스레 푼다. 가장자리에 묻어있는 낡은 톱니부품을 왼손 마디의 손가락으로 천천히 만진다. 또르륵 소리를 내며 시계침은 왼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상(空想)영화의 한 장면처럼, 배경이 바뀌더니 어느새 시점도 조감도(鳥瞰圖)로 변했다. 익숙한 이가 눈에 아른거린다. 그것은 필시 과거의 나(我兒). 어린 나는 문득 생각한다. 이 둘을 섞어보자. 섞는다.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새로운 색이 나온다. 희미한 빛이 감도는 색. 오묘한 이치라도 담겨 있듯 성인인 내가 어린 나를 위에서 차분히 마저 조명(照明)한다.


“그래. 그게 바로 회색이야.”


정체 모를 카타르시스로 신경이 곤두서고 있음을 알아챘을 때, 고개를 위로 젖힌 어린 나와 눈이 마주친다. 아니 있어야 할 그곳엔 텅 빈 회색의 다면체만이 놓여있었으니, 서둘러 하늘로 계속 올라간다. 빠르게 움직일수록, 부품의 연소(延燒) 역시 점점 가속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채 마르기도 전 코스모스(宇宙) 밖으로 육신을 내던졌다. 어린 나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 후 눈을 아래로 내려 마저 스케치북을 꾸며놓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뜬다. 앞에 놓인 콘크리트는 힘없이 나를 바라본다. 눈총이 따가워질 때쯤 조심스레 벽과 눈을 마주하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자식이 당최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내가 그를 바라보듯 그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심한 눈초리일까? 아니면 연민의 곁눈질일까? 알 수 없었다.






뇌의 상태에 따라 판단도 달라지듯, 잠을 자고 일어나면 항상 새로운 내가 나타난다. 천천히 팔꿈치를 젖혀 근육을 늘려본다. 검지로 허벅지를 찔러 고통을 찬미(讚美)해본다. 이번엔 이마를 양 손가락 마디로 꾹 눌러 우겨진 주름을 펴본다. 검시(檢屍)라도 하듯 구석구석을 어루만져본 결과 알게 된 사실이 있으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직 나는 살아있다’라는 것이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생명이 그 힘을 다하는 순간까지 나는 생의 의지를 보일지니. 그렇다면 묻고 싶다.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 임마누엘 칸트가 말한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나인가. 아니면 방구석 백수가 지껄이는 더러운 육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물체로서의 나인가. 다시 한번 묻는다. 너는 사람인가. 노예인가.


어느새 시간이 흘러 시각의 초점이 창문 밖 태양으로 옮겨 졌다. 오늘도 노란색을 자랑하듯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그것. 검은색의 물감을 씻겨내듯 어둠은 소멸(掃滅)하고 빛이 대두(擡頭)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회색빛의 그림자(影)가 생겨난다.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회색인가.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석회빛 존재는 아닐까. 인간도 노예도 아닌 상태. 그것이 바로 내가 아니었을까.


자유와 권리는 현대적 국가 속에서 배양(培養)된 개념으로 근대적 인간을 출현시킨 존립(存立) 근거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작금의 ‘인간’은 봉건시대의 농노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며 현대를 빛낸 비판 철학의 등장을 지연시켰을 것이다. 농노(農奴). 그 단어가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가히 각별(各別)했다. 누군가에 예속(隸屬)된 채 하루하루를 빌어먹고 사는 노예나 다름없다고 할까. 그 단어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얽매인 채 도망은커녕 ‘합법적’인 발버둥마저 치게 할 수 없는, 허락하지 않는 나의 현실에 너무도 걸맞았다.





윤리와 도덕. 이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견고한 기둥은 언제나 회색이었다. 시멘트를 섞어 만든 콘크리트 건축물. 아아(峨峨). 너도 회색이구나. 동질감이 드는 순간 갑작스럽게 나타난 주인의 채찍은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아니 시작했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투명한 눈물과 섞이다니 어느새 헤모글로빈마저 분홍색으로 변성(變性)했다. 열 대를 채 넘길 때쯤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노예에겐 출혈의 자유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혈관이 파괴될수록, 피부 조각마저 장렬한 전사로 후두둑 떨어진다. 낙엽처럼 붉게 내린, ‘냉혈한 개자식’처럼 튼실하게 서 있던 두개골도 그 역할을 다했는지 어느새 무장해제(武裝解除)를 한 채 선혈(鮮血)의 파도를 윤허(允許)하기 시작한다.


들판에 핀 붉은 오디의 색이 더더욱 무르익어갈 때, 나는 결국 그 유채색의 물감마저 쳐다볼 자유를 박탈당한다. 검은색 등줄기에서 새하얀 땀방울이 송골송골 새어 나오더니 어느새 바닥은 차갑게 느껴졌고 천장은 보이질 않게 되었다. 사람의 형상에서 힘 빠진 황소로 바뀌기 시작한다. 경쾌한 낙진(落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주인의 손은 다시 한번 힘차게 뻗어진다. 울부짖는 짐승. 들리지 않는 비명. 그저 바라보기에 급급한 회색의 벽. 여기가 바로 그림자다.


모든 것을 꿰뚫고 관찰할 수 있는 전지전능의 신이 존재할까. 이에 대한 논의는 비단(非但)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설화 속에는 언제나 관찰자가 있었고 이 중에서도 작가(作家)의 시점은 그야말로 신 그 자체였다. 그는 그림자도 볼 수 있고 노예뿐 아니라 짐승도 구원할 수 있었다. 손에 쥔 연필로 마치 살생부를 적는 집행자처럼 만년필로 한 ‘캐릭터’의 일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능(權能)으로 스스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자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다시 물어본다. “우리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작가는 누구인가?”




섣부른 대답은 잘못된 결말로 이끈다. 비주얼 노벨(假像小說)을 읽다 보면 주인공의 생사를 결정짓는 갈림길은 언제나 나오는 법이다. ‘잘못’된 선택은 그를 죽음으로 인도하지만 ‘옳은’ 선택은 그를 다시 삶의 문턱으로 올려놓아 준다. 작가는 이미 어떤 식의 결론이 나타날지 알고 있다. 작품 속 ‘우리’는 단지 그레텔이 남긴 빵가루를 따라 마녀가 과자로 빚은 집(製菓家)을 향해 발을 옮긴다. 그릇된 방향으로 가선 안 된다. 오른쪽이 비록 나의 자유의지의 발현에서 기초한 ‘옳은’ 결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가선 아니 된다. 왼쪽이다. 생각은 허락하지 않는다.


“닥치고 가라.”


그렇지 않으면 다 허사(虛事)가 된다.




이야기 속 주인공의 죽음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던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김소월 시인은 그 자신의 모더니즘을 설파(說破)하며 황홀한 죽음을 언지(言志)한 바 있다. 이육사는 어떤가. 강철로 만든 무지개 앞에서도 백마 탄 철인(哲人)처럼 당당하게 최후를 기다린 젊은 시인의 모습은 단언컨대 회색이 아니었다. 인생에 있어 선택해야 할 순간을 맞이할 때 가상세계 속 주인공처럼 ‘저장’만 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인생의 피로(疲勞)가 덜했을까? 작가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줄을 끊어 무대 밖으로 몸을 던지는 꼭두각시도 그 자체만이라도 의지자(意志者)로서 마땅히 존중받게 할 순 없을까? 옳고 그름. 검은색과 흰색. 흑과 백으로 분리된 작금의 ‘이중사고’에선 회색이 존재할 공간은 없다. 그것은 철저히 배격(排擊)당하고 분리(分利)당해야만 하는 존재계(存在界)인 것이다. 인간과 노예.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회색빛 ‘짐승’에게 놓인 분기점(分岐點)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연필을 내려놓고 다시금 창문으로 걷는다. 열린 문에선 차가운 바람이 따스한 햇빛마냥 사정없이 내리 쬔다. 이젠 피부에 와닿는 추위가 고통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세상으로 나간다. 양팔을 세차게 휘저으며 등뼈에서 솟아 나온 ‘이카루스의 날개’를 단 채 하늘을 난다. 오늘만큼은 그의 교만(驕慢)을 배우고 싶다. 혈장과 근육으로 만들어진 날개. 뜨거운 자외선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날개. 이카루스는 땅으로 천천히 향한다. 쿵. 시큼한 철의 맛이 혀를 통해 뇌로 신호를 보낼 때, 차가운 바닥의 냉기마저 몸으로 전해졌다. 어린 나의 팔레트가 책상 밑으로 떨어지더니 어느새 붉은색의 스케치북을 꾸민다. 햇빛으로 검게 그을린 나무들 사이에선 태양만으로도 그림자를 빚어내는 데 충분하다. 흩어지는 물감마냥 여명(餘命)의 불길은 꽃처럼 만개한다. 어느새 지천에 놓인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있다. 존재로서의 ‘나’는 작가의 연민(憐愍)과 주변의 조소(嘲笑)로 정체가 사분오열(四分五列)하기 시작한다. 저녁의 붉은 노을처럼 세상마저 빨갛게 변모하더니 어느새 천사가 나를 맞이하듯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나눌 수 없는 긴장 속에서 회색빛 계단을 한층 한층 걸어서 올라간다.


귀천(歸天)은 어느새 이 젊은 날의 회상마저 사라지게 했다.




2020.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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