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연작 - 3번
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볼 시간이다. 소설의 구성요소는 흔히 인물·사건·배경이라고 하는데,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너무나 당연한 것은 논할 가치도 없기에 그렇다. “철수는 착한데 영희는 못생겼어.”든가 “저기 저 총각은 사실 남자야”는 문장에서 이질감(異質感)을 느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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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는 같은 범주의 대상끼리 해야만 한다. 즉, 철수가 착하다는 사실을 잇는 부정연결사(不定連結絲)가 있다면 뒤의 영희는 착하지 않음을 보여야 한다. 못생기건 가난하건 천박(淺薄)하든, 설령 그것이 실제로 영희의 특징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만큼은 악(惡)하다는 것만 언급해야 한다. 그것이 규칙이며 이는 준수해야 한다. 두 번째 예시의 총각은 이미 그 단어에 내포된 의미에 ‘결혼하지 아니한 남자’가 담겨 있다. 우리가 경탄(敬歎)해야 하는 상황은 마주한 정보가 새로운 사실일 때에 한정된다.
주인공 없는 연극은 상상할 수 없고 에피소드 없는 영화도 없다. 배경 없는 사건은 더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머릿속의 비가시적(非可視的) 관념을 총동원(總動員)하더라도, 하다못해 폴리곤(polygon)의 프레임이라도 갖추고 있어야 배우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사실’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시점(視點)이라 생각한다. 카메라를 어디에다 설치하느냐에 따라 청중의 관심(關心)을 감독이 의도한 바에 따라 응집(凝集)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딛고 생각해보자. 과연 어떤 시점이 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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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1인칭 주인공 시점이 가장 무탈(無頉)하다고 본다. 우리가 일상에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곧 이 시점이기에 그렇다. ‘나’를 전면에 등장시킬 수 있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시점이라 할 수 있다는 점에선 가히 주체적(主體的)이라 할 수도 있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 별도의 가상 텍스트를 개념지도(槪念地圖, Schema) 속에 넣어야 할 인지적(認知的) 부담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되, 그들 자신의 경험을 온전하게 주인공에 이입(移入)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현실적이기까지도 한다. ‘나’라는 단어를 단순히 자음‘ㄴ’과 모음‘ㅏ’의 조합으로만 볼 수 없게 해주는 힘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떠한 소설의 장르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조화롭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선 가히 다재다능(多才多能)하다고까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인칭 관찰자 시점은 어떤가. 이 각도에선 주인공인 ‘나’와 그가 바라보는 대상으로 나누어진 채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대상(타인)이 실제로 알고 느끼는 것과 우리가 임의로 생각하는 것 사이에 판단의 간극(間隙)이 생기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러한 ‘불편한’ 괴리는 독자들로 하여 여러 생각을 가능케 하는데 예를 들면 1인칭 자신의 관점만을 고집하는 행태를 관찰자 시각에서 보게 만들어 이를 반성(反芻)하게 하거나 대상의 행동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1인칭과 2인칭은 실제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작품 중 2인칭의 시점으로 서술하는 건 많지 않은데, 이는 주인공인 ‘나’가 등장하긴 하나 그 활약의 비중이 시점의 한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적다는 점에서 1인칭 시점에 비춰볼 때 상대적으로 몰입도가 부족해지는 점, 관찰 대상을 ‘나’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작금의 독자가 원하는 자발적이고 진취적(進取的)인 전개 방식과 궤를 달리한다는 점, 그리고 후술할 3인칭 시점과 달리 불완전한 타인관찰(他人觀察)에서 오는 무기력의 팽배함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3인칭 작가 시점부터는 전술(前述)한 시점들과 차별화되는 요소를 지니는데 바로 카메라를 천장보다 높은 곳에 설치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작가는 ‘작가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는 전능한 신이 된다. 그는 이야기 속 여러 인간 군상(群像)들의 운명을 관장하며 모든 배우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관통하는 해설을 선보임으로써 만능을 과시(誇示)한다. 오죽하면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표현을 쓰겠는가? 그는 한 마리의 새처럼 하늘 위에서 사건을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 아니 그보다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절대자 ‘빅 브라더(Big brother)’가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도 결국은 위에서 바라만 보는 것에 한정되니 2인칭 시점에서 설치한 카메라의 위치를 높이 올린 것에 불과할 수 있기에 그렇다.
어찌 됐든 2인칭 시점의 한계였던 피대상자(被對象者)의 심리묘사를 정확하게 간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후의 이야기나침반 속 향방(向方)이 어디로 진행될지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숨김없는 이야기서술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현실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결코 볼 수 없는 기이하고도 매력적인 설정이라 볼 수 있어 반추하면 할수록 그 고혹(蠱惑)한 맛에 탐닉(耽溺)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까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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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우리의 뇌는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다. 현실에선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을 자연스레 꿈으로 연출하기에 그렇다. 오늘은 내가 경험한 기묘(奇妙)한 시점을 말하고 싶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영화 ‘올드보이’는 2003년에 개봉한 스릴러물이다. 극장가를 술렁이게 한 것도 모자라 평론가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내러티브(Narrative)를 선보여 장안의 화제가 된 명작, 내가 꾼 꿈이 바로 이와 굉장히 유사했다. 인물·사건·배경이 모두 같게 갖춰진 무대에서 감독이 표시한 이정표를 향해 나는 움직였다. 음울(陰鬱)하고 불쾌한, 번화가의 그림자에 가려 감춰진 것처럼 보인 뒷골목에서 구겨진 검은 양복을 걸쳐 입은 채, 끈끈한 핏물을 뒤집어쓴 채 움직이는 나. 작으면서도 큰 차이가 있다면 ‘올드보이’는 각각의 장면 속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반영했다는 것이고 나의 그것은 3인칭 시점까지도 자유롭게 구사(驅使)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영역이 어디든 간에 그 능력을 쓰고 싶은 것이 인간의 위대한 창발적(創發的)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위험천만한 공간에 놓은 가상세계 속의 ‘나’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방법으로 이룸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숫자로 점철된 잔인하고도 신성한 이성의 구역에서 감정의 난입이 빚어낼 ‘유쾌한’ 참극(慘劇)을 떠올리는 것도, 사회가 금기시하는 ‘일반인’의 도덕률을 훼손하는 것도 우리는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
이는 국가가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너그럽게 ‘윤허(允許)’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구체적 존재보다 앞선, 이른바 선험적(先驗的) 대상이 발을 선뜻 내려주었기에 어떠한 경계도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유로운 사상(思想)의 시장’을 움직이는 몽제적(夢濟的) 인간이라 명명(命名)할 수 있다. 그것의 내용이 앞서 언급한 ‘올드보이’식 꿈이든, 배덕감(背德感)이 느껴질 정도로 난잡하게 망상(妄想)적인 꿈이든, 그 속에서의 우리는 너무나도 자유롭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장에서 마주하는 꿈은 어떤 ‘재화(財貨)’의 성질을 띠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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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나 거칠게 표현하면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길몽(吉夢), 다른 하나는 흉몽(凶夢)이다. 이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 ‘좋은’것은 전자고 ‘나쁜’건 후자다.
하지만 이는 꿈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좋음과 나쁨의 이항식 판단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사후적 성격을 띠므로 분류(分類)가 불안정하고 자의적일 수 있다. 이는 같은 내용일지라도 판단하는 이의 ‘사고(思考)’에 따라, 길흉화복(吉凶禍福)의 경계선이 쉽사리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기준(基準)은 기본이 되는 표준이라는 의미로 논리적으로는 필요충분조건으로의 환원 즉, 기호화(記號化)할 수 있는 단어다. 한 개념을 여타의 그것과 이론의 여지 없이 나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히 ‘결정(決定)’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길·흉몽의 이항대립을 판별식으로 용인하는 것은 ‘불안한 안심’이나 ‘불가시적인 투명성’과 같은 형용모순을 인정하는 것이 돼버려 개념혼동의 문제를 일으켜 천지분간(天地分揀)마저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위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새로운 잣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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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기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자각몽(子閣夢)과 그렇지 못한 보통의 꿈으로의 대분(大分)을 대안으로 감히 제시해본다. 악몽 중 하나인 ‘가위눌림’ 현상이 대표적인 후자의 예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상술함으로써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고자 한다.
‘가위눌림’은 뇌는 깨어 있지만 신체는 그렇지 않아 통제할 수 없음을 경험하는 일련의 현상으로 육체가 수면 또는 가수면 상태인 도중에 뇌의 의식 중추만 각성(覺醒)한 상태로,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꿈을 꾸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상태가 병존한다는 점에서 가히 악(惡)하다고 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견 흉몽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이 현상은 단지 선·악의 명료한 분석으론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점에서 전술한 기준으로 포섭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물론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극도의 공포감을 초래하여 ‘부정적 파토스(情念, pathos)’를 조장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신체에 대한 믿음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게 해주는 이성 능력의 발원인 뇌는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주는 의지의 현현(顯現)으로서 주체적인 진전을 가능하게 한다. ‘할 수 있다’와 ‘하고 싶다’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서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현상은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살 수 있다”라는 사고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뇌로 하여 수동적인 퇴보를 강제하게 한다는 점에서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불쾌한 경험은 ‘나’가 믿었던 굳건한 세계관을 흔들게 해놓는다는 사실에서 연유하여 우리를 불완전하고 유약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도 너무나 잔인하다.
다른 하나는 반복된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가위눌림은 신비하고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명확한 원인과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존재하는 지극히 ‘과학’적인 사건이다. 우리가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는다’라고 말하나 실제론 REM(Rapid Eye Movement)이라 하여 눈꺼풀만 덮어진 채 그 안에서 안구가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한번 수면 단계에 도달하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할 거라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여러 단계를 거쳐 알파파와 베타파의 순환과정이 반복되는 것이 확인된다. 이는 불면증 환자가 겪는 일련의 수면 장애의 발병원인을 파악하는 데 ‘과학’적인 설명이 그 외 인위적으로 점착된 ‘사회’적인 해설보다 설명력이 높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모종의 신비한 사유로, 이른바 비과학적 추론(귀신과 같은 비현실적 대상의 발현에서 비롯된다고 여기는 것)에서 착안한 해석은 이러한 ‘악몽’을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문제로 치부한 나머지 그것의 재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데 난항(難航)을 겪는다.
하지만 이는 해당 문제를 사회와 과학의 범주 오류를 정정함으로써 쉽게 해소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은 어떠한 ‘이유’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ad-hoc을 붙인다 해도 끝없는 정당화 과정은 결국 끝없는 연쇄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가위눌림의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괴롭힐 것이고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종전의 길·흉의 이항대립으론 작금의 수면 장애를 온전히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에서 기준으로 삼기 어려움을 강조하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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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평소에 믿어왔던 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을 때 경험하게 될 배신(背信). 의식의 한 저변(底邊)에 깊숙이 숨어있다가 나타난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향후 나의 현실 판단 이곳저곳에 은밀하게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信)이 무너지는 바로 그 순간 나의 몸은 무너지고 뇌는 각성한다. 동상이몽도 유분수거늘 어찌 ‘나’가 ‘나’를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과학은 가위눌림을 이상 현상으로 분류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인과를 분석하는 선에서 그친다. 하지만 실재하는 개인이 경험한 그 날의 기억은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경험과 결속된 나머지 불행히도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결국 가치중립적 현상에 불호(不好)의 가치관을 투영하는 작위적 행위는 다져지지 않은 땅 위에 고층 건물을 세우겠다는 발호(跋扈)한 생각의 결과물이며 그 자체로 비극의 전조요, 비탄의 아리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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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자각몽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주인공인 하나의 공간을 창출하여 그곳에서 스스로 주체적인 역사를 만드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거창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선 확인 불가능한 장면들도 물 흐르듯 현상해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나는 여기서 공중부양은 기본으로 하되, 타인의 정신·신체 통제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땐 장면·배경을 전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곧바로 에디터(editor)를 가동해 주인공의 능력치마저 변경할 수 있다(물론 분기점 저장은 기본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환상적인가. 이곳에선 나의 두뇌와 신체는 일심동체가 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완벽한 혼합(混合), 즉 진정한 믿음(信賴)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믿음의 끝에서 그 둘은 영원한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두뇌가 도와주며 위급한 상황에선 본능적으로 신체를 먼저 움직이게 하여 뇌를 보호한다. 아드레날린이 요동치는 격동의 전장 속에서 그들은 현명하게 대처하며 서로의 등을 맞댄다. 엎치락뒤치락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에선 천진난만(天眞爛漫)한 꼬맹이들의 ‘우정’만큼이나 순선(淳善)한 아름다움마저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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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자유. 그것은 꿈. 그 중에서도 자각몽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단어다. 자유를 꿈꾼다는 캐치프레이즈가 새삼 다른 의미로 와닿는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닐지니.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진정한 ‘꿈’을 꾸고 싶다. 단순한 길몽과 흉몽이 아닌, 자각몽과 그렇지 않은 꿈의 구분. 그중에서도 자각몽을 말이다.
2020.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