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연작 - 16번
기억해라 내가 누구인지. 내 이름은. "OOO".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 시각은 오전 7시 23분. 심박수는 너무 높다. 숨은 가쁘고 시야는 흐리다. 배는 고프고 눈을 뜰 기운도 없다.
귓가엔 빗소리만 울리고 있다. 나는 자야 한다. 자고 싶다. 하지만 자면 그 지옥같은 광경을 경험해야만 한다. 싫다 그건. 이 기록은 꿈을 추적하고자 작성한 불쏘시개 연작의 일환이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 까지.
가족. 도대체 가족이 뭘까. 현실에서의; 나와 꿈 속에서의 나는 너무도 다르다. 전자가 헌신적인 사랑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라면 후자는 정 반대다. 그야말로 방치와 버림받음의 종합선물세트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 나. 뿌연 거울을 주먹으로 닦고 바라본다. 거울 속에 있어야할 나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 코, 입이 모두 없는 달걀같은 모양이었다. 내 얼굴이 저렇게나 매끈했나? 손을 턱에다 갖다대자 기어코 손목이 거울에 비춰졌다. 그렇다면 내 얼굴만 안보이는건가? 물이 들어가서인지 자연스럽게 왼쪽 귀로 손을 너흔다. 후비적후비적거리며 물을 최대한 빼내려고 한다. 뭔가 나온 것 같아 싶어 확인해보려고 할 때 뭔가가 이상함을 감지, 아니 ‘들었다’. 소리가 안들리는 정도가 더 심해졌다 귓 속에다 올리브유를 한 바가지 쑤셔넣은 기분이 들 때, 나는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빨갛고 끈쩍하고 쇠냄새가 나는 그것. 피. 혈전처럼 생긴 물컹한 진물덩어리가 검지손가락에 묻혀나온 것이다. 루비처럼 빨갛지만 값어치는 그것보다 형편없었고 냄새를 맡기엔 편도결석과 달리 물컹해서 손으로 바스락 소리가 날 때까지 만드는 것도 불필요해 보였다. 어차피 쇠냄새만으로도 충분했다.
거울을 다시 본다.다시금 열기로 인해 뿌옇게 낀 유리에선 어느새 ‘나’도 없어졌다. 하지만 수채색 물감이 꽃처럼 장식됐으니, 그야말로 선혈의 파도였다.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른다. 소리를 쳐서 도움을 구한다. 살려줘. 나 아파. 누구 없어? 나무로 된 문만이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서서 문지기 역을 자처한다. 차라리 파발마였으면 하는 순간, 왼쪽 귀로 높고 낮은 데시벨이 삽입된다. 웃음소리. 노래. 동물의 울부짖음.
순간적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낸다. 누군가 밖에 있다는 것과 아무도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는 것.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역겨움에 구토라도 하듯, 왼쪽 귀는 우악스럽게 피를 뱉어내고 있다.
도움은 오지 않는다. 아무리 소리쳐도 오지 않는다. 개미새끼 한 마리도 오지 않는다는 표현이 너무나 적절하다. 아니 개미는 오면 죄다 물에 빠져 죽겠지. 여하튼 나가야만 한다. 나는 두발에 힘을 주고 최대한 문으로 다가간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이미 바닥엔 레드카펫이 깔려있었다. 시간이 없다. 문을 두드려 나가야만 한다. 삐걱대는 플라스틱 문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서서히 돌렸다.
끼익
뿌옇던 하얀 공간이 갈색 마루바닥과 누런천장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서둘러 한번 더 소리를 친다. 누가 119좀 불러줘. 나 너무 아파. 거실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다시금 왼쪽 귀를 능욕할 때, 눈으로 그들을 파악한다. 그리고 머리 속에 넣어두겠다. 반드시 복수한다. 죽여줄게. 최대한 고통스럽게 말이야. 내가 아는 분들은 다 계시네. 내가 그렇게 도와줬는데도 이렇게 뒤통수를 때린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때려줄게. ‘정말로’.
사이좋아보이는 무리들이 TV에서 나오는 트로트에 감명한 나머지 감상평을 늘여놓는다. 전장에서 공을 세운 무장들이 무용담이라도 늘여놓듯 확인되지도 않은 ‘뇌피셜’로 장중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누군가 말했듯, 그야말로 유사전문가나 다를 바 없었다. 화장실안의 수증기가 밖으로 나온다. 지금은 진정할 때다. 엿같은 웃음소리가 더 이상 내 왼쪽 귀를 괴롭히지 못하게끔 오른손으로 서둘러 막고 움직였다.
불을 켜 내 방에 들어오니 평소랑 달리 답답함을 느꼈다. 문을 닫아 최대한 차단한다. 씨발. 핸드폰으로 손을 옮겨 서둘러 구조대를 부르고자 했다. 처음엔 지역번호를 빼 전화를 끊어야 했고 다음엔 114로 걸었다. 하. 씨발. 침착하게 오른손으로 화면을 눌러볼 때쯤 전화가 울린다. 114. 그렇다 전화기록이 있으니 다시 연락을 취해준 것 이다. 고맙기도 하지. 근데 114에서 그런것도 하나? 지금 물불가릴때가 아니다.
114입니다.
저 119로 연결좀 해주세요. 급해요.
아 그렇습니까.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을 기다리는 방은 너무도 까맣다. 문 밖애서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힘겹게 기어가 문을 열어 정체를 확인하니 우리집 강아지였다. 고맙기도 하지. 너 밖에 없구나. 사람은 믿을게 못돼. 그치? 해맑게 잔망스런 꼬리를 흔드는 녀석을 보며 출혈의 고통을 잊고자 할 때쯤. 이미 왼쪽 통신은 절단난지 오래였다.
그야 말로 내 방은 어둠 그 자체였다. 나는 어두운 방이 좋았다.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암막까지 달아 아예 까맣게 까맣게 만들고 싶었으나 그 것까지는 무리였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으니 말이다. 시야가 흐려지는 건지, 아니면 까매서 안보이는 건지 구분이 안갈 때 쯤 나는 차분히 미래를 생각한다. 두 가지 상반된 미래. 삶과 죽음.
누군가 나를 발견하면 어떻게 기억할까. 밀랍이 된 형태로 끈쩍하게 벽과 하나가 된 모습을 보면 어떤 시나리오를 떠올릴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누군가가 나를 부검한다면 부디 구석구석 해주길 바란다. 그러고 나서 어떠한 결과도 알 수 없었다고 말해주길 빌고 빈다. 그냥 그렇게 시신13으로 사라지길 갈망한다. 젠장. 구조대는 언제 오는거야. 구석에서 똘망똘망한 눈두 눈이 나를 쳐다본다. 얼굴도 채 안보이는 어두운 털. 적어도 내 눈엔 그것들이 눈으로 보였다. 사람이 없는건 상관 없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대는 오지 않는다. 아직도 TV는 시끄럽게 지껄인다. 정말 관심이 좆도 없어도 심하게 없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면 그렇지. 괜히 기대했어. 도와줘봤자 오는 것도 없고 이게 뭐냐 정말. 씨발. 욕을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너무도 아팠다. 책상에 쌓인 과제들을 보고 한숨만 푹 쉬었다. 눈 뜰 기운도 없다 이제는. 다 됐다. 아프다.
여러 시간이 지났다. 이젠 다 필요 없어. 밖으로 나가 본다. TV는 꺼져있고 온갖 살림살이들은 난장판이 된지 오래였다. 오래라고 단언할 수 잇는 근거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말이 되나. 불과 몇시간 전만 해도 왁자지껄했던 공간이 사막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안방에 가도 이불 한 장 제대로 없었고 또 다른 곳에 가도 화장대조차 하나 없었다. 마치 단체로 이사라도 간듯한 모습. 근데 왜 나는 버린건데. 이 새끼들아. 내 방은 왜 안건드린건데. 문 닫았으니 간섭하지 말자고 합의라도 한건가. 평소처럼 그냥 들어와. 들어와서 깽판치라고. 왜 필요할 때 만큼은 친절해지는건데. 분노가 차오른다. 너무도 화가난다. 소원대로 혼자 있게 되었는데도 입에서 구정물은 멈출 생각을 안한다.
이젠 귀 따윈 신경안쓴다. 고통도 잦아들었으니. 아니 청각을 포기했다고 하는게 더 적절해 보인다. 이젠 오관이 아니라 사관인가. 현관에 놓인 자질구레한 신발들을 보니 실감이 났다. 여러차례 진흙에 짓밟힌 내 신발을 보니 울화가 다시금 치솟는다. 철저히 유린당한 듯이 입을 벌린 채 쓰러진 신발. 눈시울이 붉어지는건 어째서일까. 왈왈. 뒤따라온 강아지가 해맑게 나를 본다.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든다. 어째서지. 이 녀석은 왜 버리고 간건데.
배고프나 배고프지 않다. 어지러우나 어지럽지 않다. 고통스러우나 고통스럽지 않다. 나는 차분하다. 배고픔. 기아. 술. 뭐라도 좋으니 잊고 싶다. 자고 싶다. 호흡만 가빠지고 되는게 없다. 머리가 안울려. 종소리가 듣고싶어. 자아가 분열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도대체 누구지. 여긴 어디지. 나는. 그러니까. 아마도. 기억하자면. 박-
오늘 하루도 희망차게 보내자. 날씨는 좋고. 하늘도 맑고. 무엇하나 빠지는게 없지 않나. 강아지가 내 방 침대를 어지럽히더니 다시 문밖으로 나간다. 녀석. 참. 부엌에선 물소리가 들려오고 밥짓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쿠쿠라는 이름은 참 잘 지었다. 외우기도 좋으니 말이다. 나는 행복해. 너무 좋아. 이 삶이 영원하면 좋겠어. 그렇지 상영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렇겠지. 난 누구보다 너에 대해 잘 아니까.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도 평생 같이 가자. 알았지. 힘내. 어깨 좀 펴고. 누가 보면 괴롭히는 줄 알겠다.
페르소나. 가면.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쓴다. 나도 방에 가면을 여러개 두고 다닌다. 가면을 낄 때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남을 속인다는 점에서 말고. 바로 나를 속일 수 있으니 그렇다. 가면을 여러개 쓰면 어떤 기분일까. 답답할까. 하나 씩 가면을 벗다보면 가벼워져 움직이기 편해질까. 매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내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돌 때쯤 이미 모든 것은 끝나있었다. 어서와. 내 세계로 온 걸 환영해.
피곤해. 좀 자야겠어. 어떻게든 말이야.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아무런 생각이 안나. 오래 자야겠어 오늘은. 꼭 그럴거야. 오늘의 목표는 잠이다. 그걸로 족해. 오늘 하루도 힘차게 시작(屍雀)하자.
2020.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