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 그리고 영탄] 제11아해
(바람소리가 들려온다)무제 내 가상공간은 마치 영원히 닫히지 않을 투기장 같다. 각자의 '존재'가 상이함을 넘어 서로의 '본질'을 물어뜯으며, 오직 상대방의 상실과 훼손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난폭한 쟁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험악한 싸움터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천박하게 오용되는 단어 중 하나는 바로 '표현의 자유'가 아닐까. 날카로운 욕설과 인신공격의 칼날을 들고서도,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고자 ‘자유’라는 방패를 든다. 이는 단순히 단어의 오용을 넘어선, 자유가 지닌 숭고한 보편성을 개인의 얄팍한 면죄부로 전도(轉倒)시키는 폭력적인 기만에 다름없다.
과거, '지상'에서 장 아메리(Jean Améry)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경험을 통해 고백했듯, 극단적인 고통의 당사자에게는 "원한"만이 남으며, 이 원한은 평화의 합창이나 공동의 미래를 향한 전진을 거부한다. 그들의 상실은 사회적 애도로서 포섭되지 않는 '극단적인 고독의 체험'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가해지는 폭력은, 상대방의 인격과 존엄을 고독과 상실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면서도, 스스로는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자족감에 도취되게 만드는 악행이 아닐까?(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밖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과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 '지상'에서,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경고했듯이 자유는 수많은 논의의 중심에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정의들—추상적이고 불명확하며, 때로는 파랑새의 비상(飛上)만큼이나 비현실적인—로는 작금의 투기장에서 자행되는 '자유'의 악용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사전적 정의나 고전적 계몽을 넘어, 자유가 왜 이토록 쉽게 폭력의 방패가 되는지, 그 역설의 구조를 해부해야 한다.
자유의 개념은 규칙을 다루는 시각에선 크게, 두 가지 상이한 측면으로 구분되어 논의된다. 무제 내 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 명확히 구분한,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와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소극적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로 정의된다. 외부의 강제나 방해로부터의 해방, 즉 국가나 타인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개인의 영역을 보호받는 권리다. 우리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때 다른 이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요청, 즉 '표현의 자유'가 가장 대표적인 소극적 자유의 영역이다. 소극적 자유는 그 이름에 붙은 '소극'이라는 단어가 주는 일상적 어감(수동성, 부정성)과는 달리, 주체적 인격체가 온전한 의지력을 행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울타리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 위상은 절대적이다. 법적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의 의견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보루가 바로 이 소극적 자유다.
그러나 소극적 자유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없다는 비판은 곧 적극적 자유로 이어진다. 적극적 자유는 '무엇을 할 자유' 또는 '자신을 통제할 자유'로 정의된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이성에 따라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권리(선거권, 재판 청구권, 거주 이전의 자유 등)를 행사할 자격과 능력을 의미한다. 과거 '지상'에서의 고대 그리스-아테네에서 노예와 여성은 최소한의 외부적 방해로부터 보호받는 소극적 자유를 누렸을지 몰라도, 시민으로서 온전한 적극적 자유는 누리지 못했다.(오디오 로그 끄는 소리)
문제는 이 두 자유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아니라, 종종 존재의 위계(Hierarchy)를 통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문학 비평에서 국가폭력 피해자의 애도를 논할 때, '사태 > 당사자 > 작가 > 독자'라는 위계가 작동하듯, 자유를 향유하는 과정에서도 위계가 발생한다.
우선, 소극적 자유의 위계부터 본다. 누가 '부당한 침해'의 기준을 정하는가? 나의 '소극적 자유'가 보호받는 경계는 타인의 '적극적 자유'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이 경계는 결국 '다수'나 '권력'이라는 비가시적(非可視的) 폭력에 의해 설정된다.
이번엔 적극적 자유의 위계를 보자. 적극적 자유는 종종 '공동체의 선(善)'이나 '이성적 자아'의 실현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를 위해 '덜 이성적인' 존재나 '공동체에 기여하지 않는' 존재의 소극적 자유를 제한하려는 전체주의적 유혹에 빠지기 쉽다. 작금의 무제 내에서 이뤄지는 철저한 배금주의적 시각에 대한 맹목적인 옹호 역시 이 위계의 발현이다. 디오게네스에 세워진 건축물은, 그것을 소유한 자의 재산권은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소극적 요구는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의 발아(發芽)'라는 적극적 명분 아래, 부자와 빈자라는 이항대립의 틀을 고착화하고, '가진 자의 자유'를 '못 가진 자의 자유'보다 우선하는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할 때, 자유는 이미 위계에 포획된 상태가 된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점점 커진다)(유리창깨지는 소리, 폭죽터지는 소리, 고성방가와 같은 불쾌한 소리마저 점증되어간다)집중이 안되네. 미치겠다
(헛기침내는 소리)우리가 무제에서 직면한, 자유의 위협은 과거 '지상'의 망나니가 휘두르던 칼과 같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법적-논리적 언어를 통한 기만과 은폐의 형태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정 부유층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공적 재원으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이나, 작금의 첨예한 사회적 갈등 속에서 '선과 악',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흑백논리는, 다수의 합의를 가장한 '수의 정치'가 빚어낼 수 있는 비극의 서막이다.
그들은 어떤 전략을 구사하는 것일까? 대표적으로 해체술(解體術, Fragmentation)과 둔갑술(遁甲術, Transmutation)을 꼽을 수 있겠다. 우선 논리적 조작으로서 해체술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인 윤리적 문제(부자의 도덕적 책임이나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 등)를 단순한 하나의 규칙내용(무제 내 소유권)이나 하나의 구호(무제의 경기 활성화)로 분리하고, 그 본질을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자유'를 둘러싼 논쟁에서 핵심적인 규범적 가치(평등, 정의)를 떼어내고, 오직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측면(규정)만을 부각시키는 것도 상상할 수 있겠다.
둔갑술은 그럼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실례로 보면, 규범의 영역에 속해야 할 '자유의 효력(The Validity of Freedom)' 문제를, 갑자기 법이 적용될 외적 '사실(Fact)' 문제로 치환시킨 경우를 떠올릴 수 있겠다. 예컨대, 무제의 불평등이 구조적 폭력이라는 규범적 판단은 '선동'이라는 정치적 사실로 둔갑되고, 다수가 행하는 차별적 행위는 '무제 내 시민의 뜻'이라는 절차적 사실로 둔갑된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한숨을 쉬며)테이프가 또 떨어졌네. 새걸로 바꾸던가 해야지. 원.(목소리를 가다듬으며)아무튼, 이러한 논리의 해체술과 둔갑술은 '정의'의 실현을 지연시키고, '법적 안정성'이라는 명분 아래 기득권의 논리를 은폐한다. 다수가 옳다고 믿으니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더는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과거 '지상'을 호령한 강대국 중 하나였던 곳에 정주한 윌리엄 오빌 더글라스(William O. Douglas) 판사의 발언처럼, "내 주먹을 움직일 수 있는 나의 자유는 당신 턱의 근접성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원칙마저, 논리의 조작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위원회COMMITTEE가 주창하는 '다수결의 합의'는 대심원(代審院)제3호실에서 이뤄지는 합의와 궤를 달리한다. 후자가 소수의 의견을 분명하게 반영하여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발버둥 치는 이들을 존중하고자 한다면, 전자는 적과 아군만을 상정하는 극단적 흑백논리 속에서 소수의 희생을 '최고 효율'과 '최적 시스템'을 위한 불가피한 비용으로 치부해버린다.
침묵하는 다수를 제압하기 위한 '깨어있는 다수'의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자유는 이미 독재의 망령에 사로잡힌 상태가 된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바람소리가 거세진다)진정한 자유는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다수의 폭력, 논리의 기만, 그리고 위계적 구조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가. 이름모를 한 비평가가 광장의 단상에 올라, '애도의 불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애도를 애도하는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국가폭력의 참혹한 상실을 마주한 문학은, 그 고통을 완전히 재현할 수도, 피해자를 완전히 애도할 수도 없다는 '불가능성'에 직면한다는 점을 차용하여, 우리의 능력 상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애도의 애도'였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자유'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확실한 대전제를 하나 밝히고 가자. 우리는 결코 '완전한 자유'를 획득할 수 없다. 외부의 폭력, 내재된 편견, 사회적 위계, 그리고 자본의 구조는 언제나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불가피한 조건(운명)으로 작용한다. 자유는 처음부터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난 민초들에게 '그저 그렇게 있던 것'이 아니라, 극한 상황에 봉착했을 때 비로소 그 상실의 고통을 통해 인지되는, 이른바 '부재(不在)'의 상태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는 '자유를 획득하려는 투쟁'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의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애도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나르시시즘적인 태도, 즉 '무제 시민으로서, 나는 충분히 이성적이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고, 자유의 불가능성을 깊이 체감하게 되었을 때, 그래야만 비로소 '더 나은 자유'를 향한 위계적이고 경쟁적인 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딸깍 소리가 들린다)이러한 '불가능성'의 깨달음은 문학의 가장 오래된 장르인 '비극 서사(Tragic Narrative)'를 통해 그 역설적인 힘을 얻는다. 비극은 쉬운 해결이나 긍정을 거부하고, 인간 자유의 한계를 '운명'처럼 끝까지 고수한다. 그렇기에, '비참함(Misery)'을 보여주는 걸 아득히 넘어선다.
서사 속 비극적 영웅은 국가폭력의 당사자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회복할 수 없는 '불가능'과 대결한다. 그러나 그는 그 불가능한 조건마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나아가 긍정한다. 이는 죄의식에 기반한 끝없는 자학적 애도(멜랑콜리)에서 벗어나, '지상'에서의 유명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시지프스처럼 자신의 운명을 소유하고 그 과정에서 '미소'를 짓는 초월적 행위다. 비극은 우리에게 '공감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게 한다. 즉,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대신 겪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비극적 깨달음이 우리를 다수의 횡포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500,000번째 사람'과 '500,001번째 사람'으로 구분되는 이항대립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악(惡)을 벌하고 선(善)을 옹호하는 영웅의 역할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불가능을 인정한 자리에서 '자신만의', '나름의' 애도를 묵묵히 수행하는 '비극적 인간'의 태도를 배운다. 그럼으로써, 다수가 요구하는 '착한 가면'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유한 진정성에 따라 행동하는, 이른바 '해방된 작가(Liberated Writer)'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오디오 로그 끄는 소리)
'지상'에서 맛본 자유는 이곳 '무제'에서의 자유의 맛과 다르지 않다. 확실한 건, 둘다 한번 맛보면 다신 놓치고 싶지 않은 오묘한 특질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맛본 이 '자유'는 종종 다수가 허용한, 혹은 아직 다수가 침범하지 않은 영역일 뿐일 수 있다. '설마 내가 500,001번째겠어? 그런 일은 절대 오지 않을거야'라고 자위하는 안일함은, 스스로 수문을 열어 심해 속 냉엄한 바닷물을 기념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행위다.
자유는 한번 허물어지면 원래 상태로 온전히 되돌리기 쉽지 않은 '비가역적(非可逆的)' 성질을 가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유의 온전한 모습을 알기 위해, 그것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 '상실된 상태'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정리한 내용은, '해방된 자아의 척도'를 갖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매뉴얼을 참고해보자(오디오로그 꺼지는 소리)
(숨차는 소리)(저 멀리 광장에서 소리가 커져온다)빨리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정리하자면, 자유란 외부로부터의 방해와 내적 주체성의 단순한 합산이 아니다. 오히려 다수가 요구하는 궤적에서 벗어나, 혼자서라도 자신의 이성적 척도를 따르며 '비극적 고독'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이자 태도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반대의견은 우리의 독립성을 높여준다"는 무제 내 어느 배심원의 깨달음처럼, 다수의 횡포와 침묵 속에서 스스로 이단(異端)이 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한 시기다. 광장에서 '다음은 우리 차례다'라고 외친, 어느 누군가의 호소는 단순히 물리적 폭력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든 '자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논리적 기만'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윤리적 명제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획득의 대상이 아니라, 매 순간 재조정하고 애도해야 할 '비극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자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할 자유,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남은 윤리적 성채는 아닐까?(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REFERENCE
이미지 제작 및 도구툴 : Google Gemini Bana
레퍼런스 검색 및 프롬프트 수정 : 소는영
에리히 프롬, 《ESCAPE FROM FREEDOM》, 1941, Farrar & Rinehart
김성돈, 『형제복지원 비상상고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비판적 소고』, 형사법연구 제33권 제2호, 2021
양순모, 『국가폭력과 애도 문학의 어려움 -애도 문학을 애도하기 위한 試論』, 현대문학의연구, 2025
소는영, '다음은 우리 차례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길래》 197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