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 그리고 영탄] 제9아해
Audio_Log_COURTROOM_NO.12
지난번에 이어서, 말을 계속 이어나가야겠습니다. 법감정에 관하여 구체적인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논쟁을 마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논하기 앞서 몇몇 [단어] 의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점이 나온 이상, 이것부터 정확하게 파훼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의 범주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면,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STRAW MAN FALLACY)밖에 안될테니 소모성 논쟁에 불과할 겁니다.
존경하는 대심원 여러분. 저는,[시민이란 무엇인가] 를 주제로 진실한 토의에 나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Audio_Log_COURTROOM_NO.13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좋습니다. 의견을 받아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턴 논의의 주제를 [시민이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각자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시고, 상대의 공격을 논박하시길 바랍니다.
주제와 상관이 없는, 이외의 발언은 모두 '삭제조치(TERMINATED)' 하겠습니다.
Audio_Log_COLLEGE_OF_LAW_NO.22
과거 '지상'에서도, 현재 '무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사안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재판관은 '가엾고 힘없는 노인'을 위해 법조항을 '곡해(曲解)'하였죠. 그렇기에 저는 그 판단이유에 찬동할 수 없습니다. 설령, 버팀목 없는 둥지마냥 정주(亭主)할 공간이 없더라도, 오직 그만을 보호하기 위하여 '임차인' 개념을 넓히려는 시도는 결코 해선 안 됩니다. 만약 그랬다간, 그 반대쪽에 있는 가치가 침해될 것입니다.
양자 모두를 다 가져가는 건, 제아무리 이상도시理想都市로서 '무제'일지라도 어렵습니다. 정正과 미美는 항상 같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은 그 간극을 받아들여야만 하죠. 어쩌면 그 간극에서 새로운 사고가 돋아나기 시작하는 걸지도 모르죠.
(상당한 소란이 있은 후)정리하자면, 무제에서 만들어진 법은 모든 무제의 시민에게 똑같이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도시의 영속(永續)을 위해선, [개념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둬야 합니다. 순간적인 감정과 정념에 휘둘린채, '이성'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아름답지 않은 것입니다. 감정적, 혹은 정서적 호소력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Audio_Log_COLLEGE_OF_LAW_NO.23
시민의 정의라는 주제. 좋습니다. 그렇다면, 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시민이 무엇인지가 아닌 지양해야 할 시민의 '덕목'은 무엇인지 논하고자 합니다.
(……)'지상'에서 있던 양차세계대전은 비극이라는 단어론 부족했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래도 정갈한 문장을 만들자면, '합법적 내전'의 잿더미 위에서 회고하는 일상과 기억 정도로 표현 할 수 있을까요.
1933년, 그 해 봄의 공포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콧수염 미치광이가 선포했던 '긴급조치'는 단순한 행정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종래 바이마르 헌법이 보장했던 모든 개인의 자유를 일거에 정지시키는,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최초의 폭력이었죠.
그동안 우리가 믿었던 민주주의의 토대, 그 섬세한 문명의 약속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저는 그때 목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그 '긴급조치'는 그들의 통치 12년 내내 해제되지 않았죠.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국은 명백히 '12년 동안 지속된 예외상태' 그 자체였던 것이었습니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Audio_Log_COLLEGE_OF_LAW_NO.24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이어간다)우리는 흔히 전체주의를 강력한 이념과 대중 선동의 산물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실체를 보다 차갑고 논리적인 구조에서 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무제'로 내려오기 전, 당시 '지상'에서의 전체주의는 다름 아닌 '예외상태를 통해 합법적 내전을 수립한 체제'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전체주의를 숨긴 그들의 칼날은, 단지 정치적 반대자들만을 겨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시스템에 '통합시킬 수 없는 모든 범주의 시민들', 즉 우리 유대인들을 비롯해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 낙인찍은 이들을 법의 보호 바깥에 두었습니다. 이른바 '법이 정지된 상태에서 법이 실현되는' 역설적인 공간.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합법성의 탈을 쓴 야만 속에서 육체적 말살을 자행하였습니다.
홀로코스트는 바로 이 항구적인 예외상태가 낳은, 국가 주권의 가장 지독한 논리적 귀결이었습니다. 우린, 무제에서 그러한 전철을 다시 밟아선 안 될 것입니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Audio_Log_COURTROOM_NO.63
(방청석에서 한 남성이 글을 쓰면서 중얼거린다)(나지막한 목소리로)그날의 비극. 그건 '그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항구적인 비상상태의 자발적 창출이 현대 국가의 본질적 실천이 되어버렸다는 섬뜩한 통찰이다.
과거, '지상'의 소위 '민주주의국가'라 불리는 곳들에서조차, 테러와의 전쟁, 전지구적 위기 같은 명분 아래 예외상태가 점점 더 '지배적 통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예외적으로 취해진 '잠정적 조치'가 어느새 '통치술'로 전환되는 이 현상은, 민주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무너뜨리는 위협, 아니 이미 무너뜨린 현실이었다. 그러한 예외상태는 마치 민주주의와 절대주의 사이를 확정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험한 문턱처럼 보인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평범한 일상이 언제든 법의 바깥으로 밀려날 수 있는, 가히 헐벗은 삶으로서 호모 사케르라고 불리던 존재의 그림자 아래 놓여있음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이곳 대심원 제3호정에서 그날의 기록을 회고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슬퍼하기 위함이 아니다.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비극이 어떻게 일상과 기억을 집어삼켰는지, 그 논리적 경로를 파헤치는 것만이, 예외상태가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우리 시대의 일상과 자유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숙명이었기 때문이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Audio_Log_CIVIL_NO.1111TERMINATED_NO_EXCESS
(오디오로그구형/복원일부/소멸확률높음/추가정보요망)_정당화할 방법이 필요해. 뭔가 뾰족한 수가 없을까 고민하던차에 과거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헌법개정절차에 의하지 않고 비상조치법에 의하여 헌법이 개정된데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 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비상조치법은 혁명법이라는 것이다. 혁명은 법률행위가 아니고 사실행위이다.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현행법에 의한 합법적행위는 아닌 것이다.
혁명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법내재적 정의에 대한 법초월적 정의의 투쟁 승리를 의미하며, 따라서 현행법으로써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헌법개정절차에 의하지 않고헌법을 개정할수 있는것이다(……)바로 이것이야. 한번 밀어붙여보자고(왁자지껄한 소리가 커져온다)(오디오로그 꺼지는 소리)
Audio_Log_CIVIL_NO.137
(지친 목소리로)화재현장 기록을 남긴다. 오늘도, 2구의 시신이 소사상태로 발견됐다. 체구가 큰 사람 1명, 작은 사람 1명. 성별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무제'의 평균 체형과 비교했을 때 20대 남성과 50대 여성로 확인된다. 자세한 것은, 치아대조를 통해 신원확인으로 확정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간이기록용은 여기서 마친다. 이봐. 저기 시신 근처에 종이 비스무리 한 게 있던데, 확인좀 해주겠어?(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Audio_Log_CIVIL_NO.139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존재를 유용성의 척도로 판단하는 ‘근대’의 기준이 쓸모 있는 곳에만 인간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세계, 도구적, 자원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쓸모 있는 것으로 보고, 모든 것을 물건화, 상품화, 화폐화하는 근대적 인식이 ‘쓸모’와 ‘가치’가 모두 소진된 사람과 바로 나 자신에게 향했을 때, ‘가치 없는 삶’에 대한 혐오와 말살이 선택된다
(……)'위원회COMMITTEE'는 그렇게, 화려한 미사여구, 지적인 단어를 이곳저곳에 남용해 혼동을 일으키는 행위, 이외에 둔갑술이나 해체술 등, 이들은 모두 '같은 단어 다른 의미'를 섞어, 마치 야바위라도하듯 독자에게 혼란을 준다. 그리고 그것을 위신과 체면으로 대충 덮는다. 그렇게 시민은 기망의 대상자로 전락해버린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Audio_Log_CIVIL_NO.140
팀장님. 부재중이셔서 오디오로그 기록을 남깁니다. 아까 갔던 화재현장 있잖아요? 종이가 찢어진 흔적이 보이더군요. 처음에는 그냥, 화재의 여파로 자연손상된줄 알았는데 자세히보니 종이의 탄력성에 불균형한걸 확인하였습니다. 주변을 찾아본 결과, 화재가 발생한 방, 책상 속에 한장이 더 있었습니다.
찢겨진 흔적을 대조해보니, 아마 이것까지 합쳐서 한 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용까진 확인못했습니다. 다음 현장으로 바로 가야해서 말이죠. 첨부파일로 올려둘테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오디오로그 끄는 소리)
REFERENCE
이미지제작 및 도구툴: Google Gemini Bana
프롬프트 제작 및 수정: 소는영
조르조 아감벤, 《예외상태》, 2009, 18면
법학강의총서, 《국가재건비상조치법》, 법문사, 1961 4-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