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액(橫厄)의 서사에 나타난 감정의 규범적 기능 고찰

생각의 서고, 2화

by 소는영

I. 법철학, 감정, 그리고 규범성의 딜레마



인간사의 다사다난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법(法)이라면, 인간의 감정은 법적 탐구에서 결코 배제될 수 없는 본질적 요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비탄, 부당함에 대한 분노, 혹은 찰나의 사고로 인한 당혹감과 상실감은 그 자체로 법적 분쟁의 시발점이자 과정이며, 때로는 결과에 대한 수용과 신뢰를 결정짓는 핵심 기제이다.


그러나 감정은 주관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자칫 논리의 엄밀성을 해치는 성가신 부작용으로 치부되기 쉽다. 역경에 처한 자에 대한 연민은 인간의 당연한 도리이나, 법철학이 다루어야 할 규범의 영역에서 막연한 감정적 동조나 위로는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고난의 경험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 감정적 반응마저도 '규범성'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는 지적 노력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송윤진의 논문 "감정의 규범성 정립을 위한 일고찰: 감정 논의의 개념적 도구로서 이모티브 이론"은 법감정학(法感情學) 연구에 중요한 개념적 도구를 제공한다. 본 논문은 윌리엄 레디(William M. Reddy)의 '이모티브 이론(a theory of emotive)'을 소개하며, 감정의 언어적 표현이 어떻게 단순한 기술(description)을 넘어 그 감정 자체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자아를 재구성하는지를 논증한다.


나는, 오늘 글에서 엄밀한 논리적 도구로서의 이모티브 이론을 하나의 구체적인 서사(narrative)에 적용하여, 이육사의 1927년 회고록 내용 중 하나로서, [횡액(橫厄)]이라 명명된 개인적 불행의 경험어떻게 언어적 행위를 통해 규범적으로 처리되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분석 대상이 되는 문서는 전차 사고라는 돌발적 횡액을 겪은 이가 자신의 경험과 내면의 파동, 그리고 노신(魯迅)의 수필을 인용하며 사유의 과정을 기록한 한 편의 수필(이하 '횡액 서사')이다.


글의 목적은 '횡액 서사' 그 자체가 단순한 신변잡기나 감정의 배설이 아니라, 레디가 말하는 '이모티브'의 역동적 수행성(dynamic performativity)을 여실히 보여주는 고도의 지적·규범적 행위임을 밝히는 데 있다. 나는, 이 '횡액 서사'가 감정을 '번역'하고, '자아를 탐색'하며, 궁극적으로 '목표를 변경'시킴으로써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규범 정립의 과정 그 자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다음은 이육사의 횡액이다.


II. 감정의 언어적 수행성



레디의 이모티브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스틴(J. L. Austin)의 '수행문(performative)'과의 차별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오스틴의 수행문이 "나는 너를 아내로 맞이한다"처럼 '세계'를 변화시키는 발화라면, 이모티브는 감정 진술을 통해 '화자 자신' 및 그 '감정' 자체를 변화시키는 독특한 속성을 지닌다.


논문에 따르면, 이모티브는 세상을 설명하는 '구성적 속성'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행적 속성'을 모두 가지며, 감정은 이모티브를 통해 구축되고, 숨겨지며, 강화되는 역동적인 도구이다.


이러한 이모티브의 효과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발생히는데, 첫번째는 '직접적 효과'로서 '자아탐색적 효과와 '자아-변경적 효과이다. '자아탐색적 효과'는 예를 들어 "나는 X에 대해 분노한다"와 같이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자아변경적 효과'는 이모티브 발화를 통해 해당 감정이 적극적으로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것을 말한다.


두번째는, '간접적 효과'로서 목표에 영향을 미치는 기능이다. 감정은 인지심리학적으로 개인이 추구하는 '목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모티브는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지만, 때로는 감정 조절의 노력을 무너뜨리고 기존의 '목표 자체를 변경'시킬 수 있다. 레디는 고정된 목표를 전제하는 '감정 관리'보다, 이처럼 목표(항로)의 변경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감정 항해(The Navigation of Feeling)'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요컨대, 이모티브는 외부 자극으로 인해 활성화된 혼란스러운 인지물질들을 언어로 '번역'하여 자아를 탐색하고 변경하며, 나아가 삶의 목표를 '항해'하도록 돕는 규범적 도구인 것이다.




III. '횡액 서사'에 나타난 이모티브의 작동 기제



'횡액 서사'는 이모티브 이론의 작동 방식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여기선 돌발적인 사고(횡액)라는 현상이 어떻게 언어 현상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하며, 재형성되는지를 치밀하게 따라간다.



1단계: 자아탐색 및 프레임 설정 시도


사고 직후 화자는 혼돈 상태에 빠진다. 전차가 급커브를 돌고, 사람들이 넘어지며, 유리창이 깨지고, 팔목에 열상이 생긴다. 이와 동시에 차장 감독의 친절, 의무실로 연행되는 과정에서의 타인의 시선에 대한 우려("전차표라도 속이려다가... 붙잡혀 가는 것이나 아닌가"), 간호양의 처치, 그리고 "싸각싸각하는" 살이 베어지는 소리 등 복잡한 인지물질들이 활성화된다.


화자는 이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를 '번역'하기 위해 하나의 지적 프레임을 가져온다. 바로 노신(魯迅)의 <병후 일기>이다. 노신은 병(病)이 타인의 '주의'를 끌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효용'이 있다고 했다. 화자는 자신의 '횡액' 역시 이러한 효용을 가질 수 있는지 '탐색'한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노신이 언급한 '중병', '급병', '다병'의 기준에 대입해본다.


자아탐색의 결과는 '부인(denial)'이다. 화자는 "중병도 급병도 다병도 될 수는 없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렇다면 이 '횡액'은 노신의 프레임으로 해석될 수 없으므로, 그에 따른 방식으로서 타인의 주의를 끌어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목표 달성은 실패한다.


이모티브를 통한 일차적 자위(自慰)시도는 좌절되고 "기분이 그다지 명랑해지지 않"는 상태, 즉 감정의 확인에 실패한 상태로 남는다.



2단계: 자아-변경 (Self-Alteration) 및 감정의 강화


감정의 '항해'는 계속된다. 화자는 R이라는 동무와 배를 타고 '화풀이'를 시도하며 이차적 감정조절을 꾀한다. 그러나 이때 R군의 말("자네 팔목 수술을 했으니 낫겠지마는 양복 소매는 어쩔 텐가")은 새로운 '횡액'으로 작용한다.


육체의 상처(열상)라는 기존의 감정 대상에 "영원히 고치지 못할 흠집"이 난 "새 옷"(양복 소매)이라는 물질적 손해가 더해지는 모습에서 이모티브의 '자아변경적 효과' 중 '감정의 강화'를 엿볼 수 있었다. 팔목의 상처는 아물 수 있지만(일시적 손해), 값비싼 새 옷의 훼손은 영구적(비가역적) 손해이다. 이 인식은 화자의 상실감을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고 감정을 '강화'시킨다.


"세상에 전화위복(轉禍爲福)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건마는, 나의 횡액은 무엇으로 보충할 수 있을까?"

라는 발언은 '횡액'이라는 감정 상태를 처리할 모든 기존 프레임(노신의 효용론, 전화위복)이 실패했음을 선언하는, 감정적 목표충돌의 정점이다. 그 결과, 화자는 어떠한 보상(물질적, 심리적)도 불가능한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3단계: 목표변경 및 규범성의 확립


바로 이 지점에서 '횡액 서사'는 가장 극적인 '감정 항해'를 수행한다. 모든 보상 수단이 좌절된 순간, 화자는 완전히 새로운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이모티브의 '일시적 도구화(fugitive instrumentalization)'를 완수한다.


"이것을 적어 D형의 우의(友誼)에 갚을밖에 없는가 한다."라고 한 본 회고록의 마지막 문장. 이것이 본 서사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이모티브'다.


'적는 행위(이모티브 발화)'는 더 이상 횡액을 보상받거나(1차 목표), 노신처럼 유용성을 찾거나(2차 목표), 화풀이를 하려는(3차 목표) 시도가 아니다.

이것은 '목표의 전면적 변경'이다. 자신의 불운한 경험을 사적인 재료로 가공하여 'D형의 우의에 보답한다'는 공적이고 규범적인 행위로 전환시킨 것이다. 즉, '보상 불가능한 손해'를 '우정을 위한 선물'로 탈바꿈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감정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이를 사회적 관계의 재확인 및 강화로서의 규범적 실천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화자는 이모티브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 상태를 '항해'하고, 절망적인 목표 충돌 상황에서 벗어나 '우의'라는 새로운 목적지에 성공적으로 도달한다. '싸각싸각' 들리던 고통의 물리적 소리는, 이 이모티브를 통해 'D형'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의미 있는 '감정의 문법'으로 번역된다.




IV. 결론: '이모티브' 서사를 통한 법감정학적 함의



'횡액 서사'에 대한 이모티브 이론의 적용은, 나의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첫째, 감정은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규범화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횡액 서사'의 화자는 법적·제도적 보상(전차 회사의 규칙적 대응이나 의무실의 조잡한 처치)에서는 어떠한 위안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적는 행위'라는 사적이모티브를 통해 스스로의 감정적 고통을 관리하고 새로운 규범을 정립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법이 감정을 배제할 것이 아니라, 감정이 어떻게 언어적으로 '항해'되는지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생경했다.


둘째, 레디가 말하는 '감정의 자유(emotional liberty)'의 중요성을 반추하게 한다. 레디의 표현에 의하면, 화자는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데 있어 느슨한 감정 레짐(loose regime)하에 있었다. 만약 화자가 손해배상청구라는 엄격한 레짐(strict regime)의 틀에만 갇혀 있었다면, 이때의 횡액은 오직 금전적 손해로만 환원되었을 것이며 '우의'라는 고차원적 목표로의 변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법제도가 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항해'하고 다양한 이모티브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감정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하지 않는지 고민해보았다.




후기

'횡액 서사'는 법과 감정의 관계가 적대적이거나 분리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오히려 이 서사는 감정이야말로 규범성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통스러운 '횡액'의 경험을 언어(이모티브)로 '번역'하고 '항해'하여 사회적 '우의'로 승화시킨 이 과정은, 법 공동체 구성원들이 법에 대한 기대감과 신뢰를 회복하는 미시적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언젠가 나의 연구도, 고난에 대한 막연한 연민을 넘어 실체적, 연속적으로 작열한 고통을 규범으로 전환하는 '감정의 문법'. 이를 고려해야할지도 모르겠다.



2025. 10. 25.



참고문헌《參考文獻》


이육사, 《횡액橫厄》, 1927

송윤진, 《감정의 규범성 정립을 위한 일고찰-감정 논의의 개념적 도구로서 이모티브 이론》, 한국법철학회, 법철학연구 제27권 제2호,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