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9화
한국 형법학계에서 간접정범(mittelbare Täterschaft)에 관한 논의는 오랫동안 '이론 따로 실무 따로'라는 이분법적 괴리 현상을 보여왔다. 김성돈 의 최근 연구, 《간접정범에 관한 대법원 법리와 형법이론학의 과제》는 이러한 학문적·실무적 교착 상태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규범적 지평을 모색한다.
그에 따르면, 형법이론학은 간접정범의 본질이 정범(Täterschaft)인가 공범(Teilnahme)인가를 둘러싼 '실무적으로 무익한 논의'에 역량을 과도하게 소모해왔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쟁에 함몰된 결과, 학계는 간접정범의 성립 여부와 관련된 보다 실천적인 차원의 문제들을 다루어 온 대법원 판결의 도그마틱(Dogmatik)적 의의를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였다.
다른 한편, 대법원은 형법 제34조 제1항의 해석·적용 과정에서, 간접정범의 적극적 처벌 근거를 '도구적 이용' 혹은 '도구나 손발 같이 이용하여'와 같은 '일상 언어'에 가까운 용어에 의존해왔다. 이는 형법이론학이 발전시켜 온 도그마틱적 개념, 예컨대 행위지배(Tatherrschaft)나 의사지배(Willensherrschaft)와 같은 정밀한 법률개념(Rechtsbegriff)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는 태도였다.
이러한 상호간의 불통(不通)은 단순한 학문적 유감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인 법적 결정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즉, '공허한 이론구축'이 '자의적인 법적 결정'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 대법원은 최근 대전고등법원에서 최초로 문제가 된 복잡한 쟁점(간접정범의 착오)이 내포된, 이른바 '강간상황극 사건'에서, 원심의 법리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미온적 자세를 보임으로써 '최종적 법선언자로서의 역할과 위상에 걸맞은 독자적 법리를 전개하는 일도 부작위(不作爲)하고 말았다. 이는 앞서 본 '자의적인 법적결정'을 방치하거나 조장하는 구체적 징후로 볼 수 있다.
본고는 김성돈의 대상 논문(이하 '본 논문')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그 논증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한다. 이는 본 논문의 내용을 단순히 요약하는 것을 넘어, 법학방법론(juristische Methodenlehre)의 관점에서 김성돈의 비판과 대안이 한국 간접정범론의 도그마틱적 발전에 어떠한 함의를 갖는지 심층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를 위해 본고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대상 논문이 분석하는 대법원의 전통적 법리, 즉 '도구적 이용'이라는 개념이 가진 내재적 한계를 도그마틱의 관점에서 검토한다.
둘째, 김성돈이 형법 제34조 제1항의 해석론을 통하여 도출한 대안적 개념으로서 '우월적 의사지배를 통한 행위지배'의 구체적 내용과 그 다층적 기능을 분석한다.
셋째, 이 새로운 개념적 틀이 최근 실무상 가장 큰 난제(難題)로 등장한 두 가지 사례, 즉 [판결 7] (피해자를 도구로 이용한 2자 구도 문제)과 [판결 8] (간접정범의 착오 문제)을 어떻게 이론적으로 근거 지우며 해결하는지 그 논증 과정을 치밀하게 재구성한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심화학습'의 일환으로 관련 독일 형법 도그마틱, 특히 Claus Roxin의 행위지배설 및 간접정범의 착오 , 자수범(eigenhändige Delikte) , '피해자를 도구로 사용' 에 관한 논의를 원용하여, 본 논문을 보다 폭넓은 학술적 맥락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대법원이 간접정범의 성립요건에 관해 전개해 온 법리의 출발점은 [판결 1](대법원 1983.6.14. 선고 83도515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형법 제34조 제1항의 "교사 또는 방조하여"라는 문언을 [책임무능력자, 범죄사실의 인식이 없는 자, 의사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자 (이하 '피이용자'로 한다)등을 마치 도구나 손발과 같이 이용하여 간접으로 죄의 구성요소를 실행한 자]로 해석하였다.
여기서 대법원이 간접정범의 성립을 위한 적극적 요건, 다시 말해 적극적 처벌근거로서 '도구적 이용'이라는 표지를 확립하였다는 점이 중요한바, 이는 피이용자가 '처벌되지 아니하는 자'에 해당한다는 소극적 요건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용자가 피이용자를 '도구로서 이용'하는 적극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대법원의 이러한 '도구적 이용' 법리가 가진 첫 번째 한계로서 개념의 '공허함'을 지적한다. '도구적 이용'이라는 표지는 이용자와 피이용자 사이의 형식적 관계성만을 지시할 뿐, 이용자의 독자적 불법을 구성하는 실질적 표지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대법원의 법리는 '피이용자가 도구로 이용되면 이용자의 도구적 이용이 긍정되어 간접정범이 성립된다'는 식의 '형식적 순환논법(Zirkelschluss)'에 불과하다. 즉, 무엇이 '도구성'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실체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채, '도구'라는 결론을 '도구'라는 전제로 사용하는 동어반복에 그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이처럼 실체적 내용이 결여된 '형식적 표지'는 구체적 사안에서 간접정범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실천적 지침으로서 기능하기 어렵다.
두 번째 한계는 '도구적 이용'이라는 개념이 가진 '협소성'에 내재한다. '도구'라는 일상적 용어는 본질적으로 강압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바, 이때의 도구적 이용은 이용자가 협박을 통해 피이용자(피해자)의 '의사결정의 자유를 상실케 할' 정도의 강력한 강압(Nötigung)을 행사하는 사례를 포섭하는 데는 적합할 수도 있다(대법원 1970. 9. 22. 선고 70도1638 판결).
그러나 이 도구적 이용 개념으로는 현대 형법에서 간접정범의 핵심 영역으로 다루어지는 다른 중요한 사례 유형들을 포섭하지 못한다. '도구적 이용'이라는 낡은 틀로는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는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해보도록 한다.
첫번째는, 지식의 우위를 이용하는 경우로서 정치자금법 위반의 사안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대법원은, 이용자가 물리적 강압이 아니라, '우월적 지식' 또는 '상황인식의 우위성'을 바탕으로 피이용자의 '오인이나 부지 또는 착각'을 야기하거나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범죄 목적을 달성한 경우에 간접정범의 성립을 긍정하였다.
두번째는, 지위의 우위를 이용하는 경우다. 이는 '조직 내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하급자(피이용자)의 의사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간접정범의 성립을 긍정하였다.
본 논문은, 대법원이 '도구'라는 은유에 갇혀, 이 모든 다양한 지배 형태(강압, 지식, 지위)를 통일적으로 포섭할 수 있는 상위의 법률개념(Rechtsbegriff)을 발전시키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근본적인 비판은 바로 이 은유를 정밀한 도그마틱적 개념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데 있다.
김성돈은 '도구적 이용'이라는 협소하고 공허한 표지를 대체할 실질적이고 규범적인 개념으로서, '우월적 의사지배를 통한 행위지배'를 제시한다. 이는 형법 제34조 제1항의 "교사 또는 방조"라는 문언을, 공범의 종속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간접정범의 독자적 불법을 구성하는 성립요건을 기술하는 표지로 재해석(再解釋)한 결과이다.
이는 독일 형법 도그마틱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록신(Claus Roxin)에 의해 집대성된 행위지배설(Tatherrschaftslehre)에 그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 록신은 모든 정범 형태(즉, 단독범, 공동정범, 간접정범)를 관통하는 통일적 원리로서 '행위지배'개념을 제시한다. 그중 간접정범은 이러한 행위지배가 타인의 의사를 지배하는 '의사지배(Willensherrschaft)'의 형태로 나타나는 특수한 경우로 파악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록신의 도그마틱은 본 논문에서 김성돈이 지적한 대법원 법리의 한계(강압, 지식, 지위)를 극복하기 위해 '의사지배'의 유형을 1970년대 이미 정교하게 체계화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강압에 의한 지배(Nötigungsherrschaft), 착오에 의한 지배(Irrtumsherrschaft), 그리고 조직적 권력기구에 의한 지배(Organisationsherrschaft)가 그것이다.
요컨대, 김성돈의 제안은 단순한 용어의 교체가 아니라, 대법원의 '일상 언어'를 포기하고 이처럼 정교하게 발전된 도그마틱 시스템을 한국 형법의 해석론에 수용하자는 규범적 전환의 촉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의 기여는, '우월적 의사지배를 통한 행위지배'라는 개념이 단순히 정범과 공범을 구별하는 표지(標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정범의 성립에 있어 '다중적 기능(Mehrfachfunktion)'을 수행한다고 논증한 데 있다.
김성돈은, 간접정범의 본질이 정범이냐 공범이냐는 '무익한' 본질론(Wesenslehre)에서 벗어나, 이 개념이 실천적 법 적용에서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제시하는 다중적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적극적 처벌조건이다. 피이용자가 '처벌되지 아니하는 자'라는 소극적 요건 외에, 이용자의 가벌성을 실체적으로 근거 짓는 적극적 요건으로서 기능한다.
두번째는 귀속조건이다. 피이용자가 수행한 객관적 실행행위를, 이용자에게 규범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게 하는 법적·논리적 근거(Zurechnungsgrund)가 된다.
세번째는 독자적 불법표지다. 타인의 불법에 종속하는 공범의 불법과는 구별되는, 이른바 간접정범 고유의 불법의 실체를 구성함으로써, 타인을 자신의 의사 아래 두어 도구화하는 것 자체가 간접정범의 독자적인 행위반가치(Handlungsunwert)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적 분석, 특히 '귀속조건'과 '독자적 불법표지'로서의 기능은, 이하에서 살펴볼 '귀속' 문제와 '불법구조'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인 이론적 열쇠가 된다.
본 논문이 형법이론학과 실무의 '커뮤니케이션 부재'가 낳은 가장 심각한 문제적 사례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대법원 2021. 2. 25 선고 2020도17776 판결, 이른바 '강간상황극 사건'이다. 이 사안은 한국 사법사상 최초로 '간접정범의 착오(Irrtum des mittelbaren Täters)' 라는 고도의 도그마틱적 쟁점을 제기하였다.
사안이 복잡하기에, 원론적인 내용은 아래 네모칸에 적었으며, 쉽게 풀어서 설명한 방식은 아래 네모칸 이후에 별도로 기입해놓았다.
사안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이용자(B)의 계획 (주관적 측면): B는 A(피이용자)를 속여, A가 자신이 '강간 상황극'이라는 연극을 하는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고자 했다. 즉, A가 '고의 없이' 피해자를 간음하도록 계획했다. 이는 '고의 없는 도구'를 이용한 전형적인 간접정범(착오지배)을 의도한 것이다.
실제 발생 (객관적 측면): A는 B의 계획대로 피해자의 주거에 진입했으나, 행위 도중 이것이 실제 상황임을 간파했다. 그럼에도 A는 행위를 중단하지 않고 스스로의 '미필적 고의'로 강간을 실행하였다. 객관적으로 A는 B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지는 정범'이 되었다.
원심 및 대법원의 법리적 오류: '인과관계의 부정'이처럼 이용자의 주관적 계획(고의 없는 도구)과 객관적 사실(고의 있는 정범)이 불일치하는 착오 사안에 대해, 제2심(원심) 법원은 매우 문제적인 논리를 전개했다. 원심은 A가 도중에 고의를 가지게 된 것을 '우연한 사정'으로 평가하고, 이로 인해 B의 이용행위와 강간의 결과 발생 사이에 '형법상 인과관계가 부정'된다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인과관계가 부정되므로 B에게는 강간(기수)이 아닌 (주거침입)강간 '미수'가 성립한다고 결론 내렸다.
본 논문은 대법원이 이러한 원심의 법리를 아무런 비판이나 독자적인 법리 전개 없이 그대로 수용한 것('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 을 '최종 법선언자로서의 역할을 부작위'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김성돈에 따르면, 원심의 '인과관계 부정' 논리는 명백한 법리적 오류이다. B가 계획했던 인과과정, 즉 'A가 피해자와 성교한다'는 객관적 사실은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피이용자 A의 내면적 심리상태(비고의 → 고의)의 변화는 객관적인 인과관계의 진행을 단절시키는 사유가 될 수 없다. 이는 인과관계의 착오가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김성돈의 해결방안: '이원적 불법구조'에 기반한 착오론
대상 논문은 이 문제가 '인과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III에서 논의된) 간접정범의 '독자적 불법표지'인 '우월적 의사지배'의 실현 여부에 관한 착오의 문제라고 정확히 진단한다. 즉,'우월적 의사지배를 통한 행위지배'라는 독자적 불법표지가 '이원적 불법구조'를 갖는다고 분석한 것이다. 이는 불법(Unrecht)이 행위반가치(Handlungsunwert)와 결과반가치(Erfolgsunwert)로 구성된다는 이원적 불법론(zweigliedriger Unrechtsbegriff)과 조응하는 것이다.
이 구조를 사안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정밀한 분석이 가능해진다 :
주관적 불법요소 (Subjektives Unrecht): 이용자의 '우월적 지배의사'에서 이용자 B는 A를 '고의 없는 도구'로 자신의 의사 아래 두어 지배하려는 의사(간접정범의 수정된 고의)를 명백히 가지고 있었다.[판단: 주관적 불법요소 = 인정됨]
객관적 불법요소 (Objektives Unrecht): 피이용자에 대한 '객관적 지배사실'. 피이용자 A가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미필적 고의'를 가지고 '독자적인 의사결정'에 따라 강간을 실행한 그 순간 , A는 더 이상 B의 의사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도구'가 아니다. 즉, B의 '우월적 지배'는 객관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지배의 객관적 실패).[판단: 객관적 불법요소 = 부정됨]
결론: 불능미수 (Untauglicher Versuch)
이러한 분석의 논리적 귀결은 명확하다. 주관적 불법(지배의사)은 존재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객관적 불법(지배사실)이 탈락한 경우, 이는 전형적인 미수범의 불법구조와 상응한다.
본 논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형법 제27조의 '불능미수'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이용자 B는 '피이용자 A가 자신의 계획대로 고의 없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A가 '지배 불가능한(스스로 고의를 가진) 주체'였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결과 발생(간접정범의 기수)이 불가능한 '수단의 착오'(혹은 대상의 착오)에 해당하며, 이용자 B의 '지배의사'라는 주관적 불법을 통해 그 위험성(Gefährlichkeit)이 발현되었으므로 불능미수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간상황극 사건'이 복잡한 구조인만큼,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사건의 주요 인물을 다음과 같이 가정하겠습니다.
B (이용자/배후자): 범행 전체를 기획한 '감독'
A (피이용자/도구): B에게 속아서 이용당한 '배우'
C (피해자): 강간 피해자
시각적 도움을 목적으로 '감독'B는 빨간색으로, '배우'A는 파란색으로 음영표시합니다.
'감독' B는 C를 강간할 목적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B는 이 범행을 직접 실행하는 대신, '배우' A를 '도구'로 사용하기로 계획합니다. 이후 '감독'B는 스마트폰 채팅 앱을 통해 A에게 접근하여, "C와 합의 하에 '강간상황극'이라는 연극을 할 것이니, 당신이 강간범 역할을 해달라"고 속였습니다.
이때 B의 계획(의도)을 상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배우'A는 자신이 '연극'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인식이나 의도, 즉 '고의(Vorsatz)'가 전혀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감독'B는 이처럼'고의 없는 도구'를 완벽하게 조종하여(이를 '의사지배'라고 합니다), 자신의 강간 목적을 달성하려 했습니다. 만약 사안이 이대로 흘러갔다면, 이는 '감독'B가 계획한 전형적인 '간접정범'의 사례가 되었을 것입니다.
'배우' A는 B의 말을 믿고 연극인 줄로만 알고 C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행위 도중, C의 저항이나 반응을 보고 이것이 '연극이 아니라 실제 상황임을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사건의 핵심적인 착오가 발생합니다.
A는 실제 상황임을 깨달았음에도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왕 이렇게 된 것, 실제 강간이라도 어쩔 수 없다'는 A 자신만의 새로운 범죄 의사(미필적 고의)를 가지고 강간을 완료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A는 B의 '고의 없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범행을 저지른 독립된 정범'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감독' B의 계획(주관)과 실제(객관)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B의 계획: "나는 '고의 없는' A를 조종하여 강간한다." (간접정범 계획)
실제 상황: "A가 중간에 '고의 있는' 정범으로 변신하여 스스로 강간했다." (간접정범 실패)
B는 '고의 없는 도구'를 이용하는 간접정범을 시도했지만, 실제로는 '고의 있는 정범'을 움직인 셈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접정범의 착오'입니다.
이 복잡한 상황에 대해, 원심 법원과 대법원은 '감독'B에게 강간죄의 '완성(기수)'이 아닌 '미수'를 인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배우A가 도중에 고의를 가지게 된 것은 감독B의 계획에 없던 '우연한 사정'이며, 이로 인해 B의 최초 계획(이용 행위)과 최종 결과(강간) 사이의 '형법상 인과관계가 끊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 논문은 원심 법원과 대법원이 내린, '미수'라는 결론은 동의하지만, '인과관계가 끊어졌다'는 법원의 논리는 명백한 오류라고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감독'B가 원했던 '강간'이라는 결과 자체는 어쨌든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김성돈은, 이 문제의 핵심이 '인과관계'가 아니라, 간접정범의 본질인 '우월적 의사지배(überlegene Willensherrschaft)'가 성공했는가에 있음을 강변합니다.
이에 본 논문은 간접정범의 불법을 '이원적 구조'로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선, 주관적 불법('감독'B의 '의도')는 존재합니다. '감독'B는 '배우'A를 자신의 의사 아래 두어 '지배하려는 의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불법('감독'B의 '실제 지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감독'B의 의도대로 '배우'A가 실제로 '지배당한 사실'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실패했습니다. '배우'A가 실제 상황임을 깨닫고 스스로의 의사로 강간을 실행한 그 순간, A는 더 이상 B의 '우월적 의사'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즉, B의 '지배'는 객관적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실패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B는 간접정범을 실행할 '의도(주관적 불법)'는 있었지만, '실제 지배(객관적 불법)'에 실패했습니다. 범죄의 주관적 의도는 있었으나 객관적 실현에 실패한 것, 이것이 바로 '미수범'의 정확한 법적 구조입니다.
더 나아가, '감독'B는 '배우'A라는 '도구'가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A가 (스스로 고의를 갖게 되어) B의 지배가 불가능한 대상이었으므로, 이는 '불능미수(untauglicher Versuch)'에 해당합니다.
법원은 '인과관계 단절'이라는 부정확한 근거로 '미수'를 선고했지만, 본 논문은 '우월적 의사지배의 객관적 실패'라는 정밀한 법리로서 도그마틱(Dogmatik)을 통해, 왜 B가 '미수범'이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분석은 본 논문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원심/대법원과 결론('미수' 인정)은 동일하지만, 그에 이르는 논증(이유)은 완전히 다르다. 법원의 '인과관계 부정' 논리는 해당 사안에서만 임시변통으로 작동하는 '자의적 결정'에 가깝다. 반면 본 논문의 '이원적 불법구조'에 기반한 '불능미수' 논리는, '간접정범의 착오'라는 특정 유형의 사례군 전체를 일관되게 해결할 수 있는 '이론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정밀 법리'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도그마틱이 실무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우월한 지적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명백히 증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한국 형법이론학과 실무영역이 간접정범 영역에서 걸어온 '각자도생의 길' 이 중단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대법원이 고수해 온 '도구적 이용'이라는 일상적 용어는, 간접정범의 착오 문제라는 실천적 난제 앞에서 그 도그마틱적 한계를 명백히 드러냈다.
김성돈의 핵심 제언은 명료하다. 대법원은 이제 '도구적 이용'이라는 '낡은 용어'를 폐기하고, 형법이론학이 이미 '미리 준비해둔' 정교한 도그마틱적 성과, 즉 '우월적 의사지배를 통한 행위지배'라는 규범적 개념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법원이 공동정범에서 이미 '기능적 행위지배(funktionelle Tatherrschaft)'라는 도그마틱적 개념을 수용한 것과 균형을 맞추는 일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본 논문은 '이론과 실무의 공생'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진정한 공생은, 학계가 실무의 쟁점을 외면한 채 '공허한 이론'을 구축하는 것도 아니고, 실무가 '일상 언어'에 기대어 '자의적 법적 결정'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정치한 법리'와 '살아있는 법의 발견'을 매개로 한 도그마틱과 실무(Praxis)의 끊임없는 변증법적(dialektisch)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촉발하는 학문적 '촉매'로서, 본 논문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겠다.
2025. 11. 4.
김성돈, 《간접정범에 관한 대법원 법리와 형법이론학의 과제》, 한국형사법학회, 『형사법연구』제35권 제3호, 2023. 9. , 3-5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