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10화
법철학의 역사적 전개는 전통적으로 자연법론(Naturrechtslehre)과 법실증주의 간의 긴장과 대립을 축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20세기 역사적 격동, 특히 전체주의의 경험은 이러한 고전적 이분법이 법적 현실의 복잡성과 규범적 요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고전적 자연법론은 그 막연함으로 인해 ‘사이비 논증’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반대로 고전적 법실증주의는 ‘법률과 법의 동일시(Identität von Gesetz und Recht)’한다는 도그마와 “어떠한 내용도 법이 될 수 있다”는 명제 하에, ‘심각한 반도덕적 억압이나 비인간적 파괴’마저도 법(Recht)의 이름으로 용인할 수 있다는 치명적 한계로 노정(路程)하였다.
이러한 법실증주의의 아포리아(難題, Aporia)에 대한 가장 극적인 반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스타프 라드브루흐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의 저명한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sche Formel)은 ‘법률적 불법(gesetzliches Unrecht)’과 ‘초법률적 법(übergesetzliches Recht)’이라는 개념을 통해, 법적 안정성을 절대적 가치로 내세웠던 법실증주의가 실정법의 내용적 정당성을 상실했을 때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논증하였다. 이는 법실증주의가 [법의 형식적 유효성]을 넘어서는 [내용적 정당성]의 기준을 어떻게 내재화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과제를 법철학계에 제기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본 글은 김대휘의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법이론"을 바탕으로. 한국 법철학계의 중진인 심헌섭 교수가 제창한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이론적 구성을 심층적으로 조명한다. 이는, 자연법이라는 초월적 기준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법실증주의의 맹목적 형식주의를 거부하며, 실정법 질서 내에서 법이념에 기반한 비판적 기준을 찾고자 하는 ‘제3의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규범적·방법론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시도이다.
본 글의 목적은 김대휘의 논의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법철학 및 법학방법론의 핵심 쟁점들과 대화(對話)시킴으로써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이론적 정초(Grundlegung)를 심화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첫째, 김대휘가 제시한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핵심 내용, 특히 그 철학적 기반과 3대 핵심 기제를 정밀하게 요약 및 분석한다.
둘째, 이 이론의 핵심 작동 조건인 ‘심각한 부정의’라는 개념을 라드브루흐 공식의 ‘참을 수 없음의 공식(Unerträglichkeitsformel)’과 비교하여 그 철학적 기반을 심화한다.
셋째,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핵심 기제인 [법률회피의 방법론적 근거]를, 칼 라렌츠(Karl Larenz)의 법형성론(Rechtsfortbildungslehre)을 통해 정밀하게 검토한다.
넷째, 또 다른 핵심 기제인 ‘법원리'의 법체계 내 지위를, Riggs v. Palmer 사건을 둘러싼 하트(H.L.A. Hart)와 드워킨(R. Dworkin)의 논쟁 및 ["포용적" 법실증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조명한다.
이 과정을 통해 본 논문은 비판적 법실증주의가 현대 법이론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어떠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하는지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김대휘의 논문은 심헌섭의 이론을 계승·발전시키면서, 비판적 법실증주의가 어떻게 전통적 법이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법실무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체계적으로 논증한다.
김대휘는 먼저 전통적 법실증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법실증주의는 ‘법률과 법의 동일성’이라는 동어반복적 공식을 통해 법률의 [내용적 정당성]을 묻지 않았기에, 결국 입법자를 전능한 자로 승격시키고 법(Recht)의 법이념(Rechtsidee)에의 지향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특히 그는, 라즈(J. Raz)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대표되는, ["배제적" 법실증주의]가 법의 존재와 내용을 도덕과 완전히 절연된 사회적 사실로만 파악하는 것은, 현대법의 실정법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현대법, 그중에서도 특히 입헌주의 헌법 체제 하에서, 헌법재판은 물론, 민법 제103조(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나 민법 제2조(신의성실)와 같은 일반조항(Generalklausel)들은, 이미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도덕원리들을 법원리(Rechtsprinzipien)로 승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의거, 김대휘는 왈루쵸우(W. Waluchow) 등이 제시하는 ["포용적" 법실증주의]가 현실 설명력이 더 높음을 시사한다. 법체계의 인정규칙(Rule of Recognition)이 도덕적 심사 기준을 법적 타당성의 요건으로 포섭할 수 있음을, 이는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법실증주의]는 바로 이러한 현대법의 현실을 직시하며, 실정법 질서 내에서 비판적 기준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비판적" 법실증주의]가 법실증주의의 틀 내에 머무르면서도 '비판적'일 수 있는 철학적 근거는, 그것이 수용하는 정의론의 독특한 접근 방식에 있다.
김대휘는, 켈젠(Kelsen)이나 로스(Ross)와 같은 고전적 법실증주의자들이 정의를 비합리적·정서적 가치판단으로 간주하여 법이론에서 배제하려 한 '정의 부정론'과는 명확히 선을 그으면서, ["비판적" 법실증주의]는 긍정적 정의, 즉 '무엇이 정의로운가'에 대한 적극적이고 실체적인 합의가 어렵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논의를 멈추지 않는다. 김대휘는 "무엇이 정의로운지는 합의하기 어려워도 무엇이 부정의한지 합의가 가능하고(...)부정의에 대한 일치의 가능성이 대부분 더 클 것"이라는 심헌섭의 핵심 통찰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단초'이자 시작점이다. 정의 이념은 "심각한 부정의"를 인식하고 공론화하여 드러내는 역할을 통해, '명백하게 옳지 않는 것에 대하여 배제적 기능을 수행한다. 즉, 법(Recht)은 적극적인 선(善)을 강제하지는 못할지라도, 소극적으로 명백한 악(惡)을 배제하는 기준을 실정법 체계 내에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휘는 이러한 비판적 정의론에 기초하여, ["비판적" 법실증주의]가 법실무와 법학방법론에서 구체적으로 기능하고 작동하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를 제시한다.
제1기제는 법원리(Rechtsprinzipien)다. 신의성실의 원칙과 같은 법원리들은 법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김대휘는 신의칙과 같은 법원리가 법체계의 새로운 권리·의무를 적극적으로 발생시키는 '구성적 원리(konstitutives Prinzip)'라기보다는, "원칙적으로 비판적 법원리 내지 기준"으로서 기능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이러한 법원리들은 "헌법이나 법률이 직·간접적으로 승인하는 법윤리적 원칙"이자 "그 시대의 정의 관념의 실체적 내용"으로서, 법률의 형식적 요건은 충족하였으나 그 적용 결과가 실정법 질서 전체의 정의 관념에 비추어 '심각하게 부당한' 경우, 그 권리 행사를 저지하거나(권리남용금지) 그 법률효과를 부인하는(예: 민법 제103조) 비판적·배제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기제는 규범통제(Normenkontrolle)다. 이는 법해석자가 실정법규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위법이나 법원리와의 관련성을 의식하고 그 합치성을 심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여기서 김대휘가 제시하는 규범통제 개념은 헌법재판소가 행하는 위헌법률심판과 같은 협의의 규범통제를 훨씬 넘어서는 광의의 개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규범통제의 대상을 "제정법뿐만 아니라 관습법, 약관 등 실정법 전체"로 확장한다.
더 나아가, "기존의 판례를 변경하거나 엄밀한 심사를 통하여 제한적으로 적용하는 것" 역시 판례법에 대한 규범통제로 파악하며, 심지어는 법률 해석에 있어서도, 문언의 가능한 범위 내에서 "헌법과 법원리에 반하는 해석 결과를 배제하는 것"(소위 '합헌적 법률해석')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규범통제"로 포섭한다. 이는 헌법재판기관만이 아니라, 법관을 포함한 모든 법적용자가 일상적인 법적용 과정에서 수행해야 할 비판적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제3기제는 법률회피 및 법률초월적 법형성(extra legem Rechtsfortbildung)이다. 이는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가장 실천적이고 강력한 기제로 볼 수 있는데, 이 기제는 "비판적으로 -정의와 법원리에 심각하게 어긋나는 경우-"에만 작동하며, "단지 예외적으로만 허용되는" 최후의 수단이다. 즉, "실정법의 형식적 적용이 현저히 부정의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 법관이 신의칙과 같이 법질서에 현존하는 법윤리적 원리에 의거하여 법률의 문언적 적용을 회피하거나 수정하는 사법적 실천을 의미한다.
김대휘는 이에 대한 뚜렷한 예로, 부가가치세법의 형식적 요건을 악용한 거래에 대해 신의칙을 적용하여 매입세액 공제·환급을 부정한 대법원의 '금괴폭탄거래' 사건 판결이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피상속인을 살해한 상속인의 상속권을 부정한 드워킨(Dworkin)의 Riggs v. Palmer 사건을 제시한다.
이러한 법률회피는 "법문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심각하게 부당한 결과를 피하는 것"으로서, 비판적 법실증주의가 실정법 체계 내에서 어떻게 '심각한 부정의'에 대처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적용 사례이다.
김대휘가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작동조건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심각한 부정의' 또는 ‘현저히 부정의한 결과’라는 기준은, 법사학적으로 나치즘의 ‘법률을 통한 불법’을 목도한 라드브루흐의 자기반성적 성찰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는 실정법의 유효성을 그 내용과 무관하게 인정했던 자신의 초기 법실증주의적 태도를 수정하여, 법의 개념에서 정의(Gerechtigkeit)의 가치를 배제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이때 라드브루흐 공식은 크게 두 가지 명제로 구성되며, 첫번째는 '참을 수 없음의 공식(Unerträglichkeitsformel)'이다. 이는 법적 안정성을 위해 실정법은 원칙적으로 그 내용이 부당하더라도 유효하지만, "실정법과 정의 사이의 모순이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를 때"에는 예외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선, 형식적으로 유효한 법률은 '부정확한 법(unrichtiges Recht)'으로 격하되어, 실체적 정의에 양보해야 한다.
김대휘가 제시하는 ‘심각한 부정의’ 또는 ‘현저히 부정의한 결과’는 바로 라드브루흐가 말한 이 ‘참을 수 없는 정도’의 부정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법관에게 실정법 규범의 문언적 적용을 넘어, 그 결과가 법질서 전체의 정의 관념에 비추어 인내할 수 없는 수준인지에 대한 실체적 심사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법률의 효력을 예외적으로 부인할 수 있는 비판적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부인 공식(Verleugnungsformel)' 또는 '배신 공식'이다. 이는 첫번째 명제보다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 즉 법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담고 있다. 만약 법률이 제정될 당시에 "정의의 핵심인 평등을 의도적으로 부인"하였다면, 그 법률은 단지 '부정확한 법'이 아니라 "아예 법으로서의 본질 자체를 결여"하게 된다. 이러한 규범은 애초부터 법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대휘가 '법의 기본적 도덕성'을 강조하며, "자연법이나 법이념인 정의의 최소내용으로서 법을 힘과 구분하고 강제가 아닌 당위의 의미를 가지는 징표"로 파악하는 것은, 라드브루흐의 제2명제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법의 개념 자체에는 최소한의 정의(예를 들면, 자유나 평등 등)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의도적으로 배제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판적" 법실증주의]는 이러한 법의 본질적 요소를 초월적 자연법이 아닌, 헌법원리 등 실정법 질서 내에서 발견하고, 이를 비판적 기준으로 삼아 하위 규범을 통제하려는 정교한 이론적 시도라 평가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 중,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세 번째 기제로 제시된 '법률회피'는, 실정법의 문언을 형식적으로 적용할 때 발생하는 '현저히 부정의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한 사법적 실천으로 적용할 수 있다. 김대휘는 이를 "법률초월적 법형성"으로 명명하며, 그 방법론적 정당화의 근거로 독일 법학방법론의 대가인 라렌츠의 개념을 인용한다. 이는 '법률회피'라는 것이, 결코 법관의 자의적 결단이 아니라, 엄격한 법학방법론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고도의 '법형성'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자 한 의도에 연유한다.
참고로, 독일의 법학방법론은 법관의 사법작용을 '법발견(Rechtsfindung)'과 '법형성(Rechtsfortbildung)'으로 엄격히 구별하는바, 이때 ‘법발견’이란 '법문언의 가능한 의미'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작업을 의미한다. 반면, ‘법형성’은 법률에 규율이 존재하지 않는 '법의 흠결', 즉 "계획에 반하는 법률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여, 법문언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충 작업을 의미한다. '유추'나 '목적론적 축소'가 법형성의 대표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방법론적 틀에서 볼 때, 김대휘가 제시하는 '법률회피'는 가장 고도의 법형성 작용에 해당한다.
그가 제시한 벤다이어그램에 따르면, 법률회피(수정)는, 규범 목적(A)과 규범 문언(B)의 범위를 모두 벗어나는 영역(U-(AUB))에 위치하는데, 이는 법률의 흠결을 보충하는 '법률보충적 법형성'을 넘어서, 법률의 문언 및 입법자의 명시적 목적과 충돌하는 규범을 수정하는 '법률수정적 법형성'에 근접하는 위험한 사법작용이다.
이처럼, 권력분립의 원칙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사법작용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엄격한 요건 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김대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라렌츠의 논의를 정확하게 원용하여 그 정당화 요건을 제시한다.
첫째, '진정하고 절실한 법적 요청(ein dringendes, echtes rechtliches Bedürfnis)', 즉 기존의 법률 적용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법적 긴급피난'의 상황이 존재해야 한다. 둘째,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바, 법관의 수정 작업은 '법질서의 내적, 평가합치적 통일성과 일관성의 요청(das Postulat der inneren, wertungsmäßigen Einheit und Folgerichtigkeit der Rechtsordnung)'에 부합해야 한다. 이는 법률회피가 개별 법관의 주관적인 정의감이나 정치적 신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당 법질서 전체를 관통하는 내재적 원리와 가치평가의 체계에 의해 객관적으로 통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가, 이러한 법률회피는 "입법자의 전체적, 추정적 의도에 벗어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컨대,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법형성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법체계의 내적 통일성에 봉사하는 체계 내적 법형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비판적" 법실증주의]는 첫번째 기제로 '법원리'를 제시하고, ["포용적" 법실증주의]의 관점을 수용하며, 나아가 Riggs v. Palmer 사건을 '법률회피'의 핵심 사례로 든다. 이 세 가지 요소의 조합은 필연적으로 20세기 후반 영미 법철학의 가장 중요한 논쟁인 하트-드워킨 논쟁의 중심부로 우리를 이끈다.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이론적 지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이 논쟁의 맥락에서 김대휘의 논의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항을 나눠 상술한다.
로널드 드워킨은 법실증주의, 특히 하트의 법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Riggs v. Palmer 사건을 전면에 내세웠다.
드워킨에 따르면, 법은 '규칙(Rules)'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원리(Principles)'를 포함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규칙'은 전부 아니면 전무(all-or-nothing) 방식으로 적용되지만, '원리'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지 않으나 도덕적 무게를 가지며 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에게 Riggs 사건의 판사들은 명확한 '규칙'(유언법)의 문언에도 불구하고, 법체계에 이미 내재해 있던 '원리'를 '발견'하여 적용한 것이다. 이는 하트가 (하드케이스)라 불리우는, 이른바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법관이 재량으로 새로운 법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핵심적인 반론이었다.
여기서 김대휘의 논리와 드워킨의 논리 사이에는 매우 흥미롭고 정교한 방법론적 긴장과 종합이 발견되는데, 우선 드워킨은 Riggs 사건을 '원리의 발견'으로 보았다. 그가 '발견'을 강조한 이유는 법관의 재량을 부정하고 자신의 '유일한 정답 논제'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김대휘는 동일한 Riggs 사건을 "법률회피"이자 "법률초월적 법형성"의 사례로 명시적으로 분류한다. 이는 김대휘가 독일의 법학방법론의 엄격한 구분에 입각한 것에 연유한바, 이에 따르면, 법문언(유언법)의 가능한 의미를 명백히 '넘어서는' 또는 문언과 충돌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수정하는' 모든 사법작용은, 그것이 설령 '원리'에 근거할지라도, '발견'이 아니라 명백한 '형성'이다.
이 지점에서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정교한 종합이 이루어진다. 김대휘의 이론은 (1) 드워킨처럼 '원리'가 법의 일부임을 인정한다(이는 ["포용적" 법실증주의]의 수용과 일치한다). (2) 그러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드워킨과 달리, Riggs와 같은 사례는 '발견'이 아니라 '형성'임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3) 하지만 이 '형성'은 하트가 우려했던 자의적 재량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때의 '형성'이란, 앞서 라드브루흐가 제시한 '참을 수 없는 부정의'라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작동하며, (4) 동시에 라렌츠가 제시한 '법질서의 내적 통일성'이라는 엄격한 요건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결국 김대휘의 논의는 하트의 후기 이론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트 자신도 법실증주의를 완화하여 '자연법의 최소한의 내용(minimum content of natural law)'을 인정하였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자명한 이치(예를 들면, 인간의 취약성, 제한된 자원 등)에 기반하며, 법과 도덕이 공유하는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공통 기반을 인정한 것이다. 김대휘가 앞서 언급한 ["포용적" 법실증주의]란 바로, 하트의 이러한 '최소 내용'과 드워킨의 '원리' 비판을 소화한 법실증주의의 발전된 형태이다. 즉, 법체계가 스스로 자신의 '인정의 규칙(Rule of Recognition)'을 통해 헌법상의 기본권 조항이나 신의칙과 같은 '도덕적 원리'를 법적 타당성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대휘가 제시한 ["비판적" 법실증주의]는 하트의 ["포용적" 법실증주의]를 수용하여 법원리가 실정법 질서 내의 비판 기준이 됨을 인정하고, 드워킨의 Riggs 사례를 '심각한 부정의'에 대처하는 핵심 사례로 받아들이되, 그 방법론적 본질은 '발견'이 아닌 라렌츠의 엄격한 '법형성론'으로 재구성하는,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이론적 종합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김대휘의 논의를 중심으로 심헌섭 교수에 의해 제창된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법이론적 정초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현대 법철학과 법학방법론의 주요 쟁점들과의 대화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였다.
김대휘가 조명한 비판적 법실증주의는, ‘법률과 법의 동일시’라는 고전적 법실증주의의 경직성과 규범적 공백을 극복하고, '심각한 부정의'라는 법치국가의 실천적 난제에 대처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실천적인 법이론이다.
본고를 읽으며, ["비판적" 법실증주의]는 단순한 절충론이나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고도로 체계화된 논리 구조를 지닌 법이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이 이론은 라드브루흐가 제기한 '법률적 불법'의 문제의식, 즉 법실증주의는 '참을 수 없는 부정의'에 답해야 한다는 철학적 과제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둘째,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원리, '광의의 규범통제', 그리고 '법률회피'라는 세 가지 핵심 기제를 실정법 질서 내에 정립한다.
셋째, 이 기제들의 이론적 기반으로서, 하트-드워킨 논쟁의 결과물인 ["포용적" 법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하여 법원리가 법체계의 내적 요소임을 긍정한다.
넷째, 그러나 가장 위험하고 강력한 실천인 '법률회피'에 대해서는, 드워킨의 '발견' 이 아닌 라렌츠의 엄격한 '법형성론'을 원용하여, '법질서의 내적 통일성'이라는 방법론적 통제 장치를 부과한다.
정리하자면, ["비판적" 법실증주의]는 법적 안정성이라는 법실증주의의 핵심 가치를 견지하면서도, 구체적 타당성이라는 법이념의 요구를 실정법의 토대 위에서 구현하려는 정교한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김대휘가 논문의 말미에서 강조하듯, 법적용자, 특히 법관에게 "이러한 관점을 의식화하고 깨어 있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지점에서 알 수 있다.
실정법에 대한 비판적 검토(규범통제)와 법질서의 내적 통일성에 기반한 예외적 수정(법률회피)을 통해 정법(正法)을 획득하고 법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비판적 법실증주의가 제시하는 "법을 전복하는 혁명(revolution)"이 아닌 "법의 진화(evolution)"의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25. 11. 7.
김대휘,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법이론》,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법이론연구센터, 『기초법학연구』제3호, 2024. 5., 9-4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