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13화
법학방법론의 근원적 난제(難題) 중 하나는 '법적 안정성'이라는 규범적 이념과,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해야 하는 '구체적 타당성' 및 '합목적성'이라는 현실적 요청 사이의 영원한 긴장관계이다.
법(Recht)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동적 체계이다. 이러한 긴장은 특히 사법(Justiz) 영역에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기존에 확립된 판례가 더 이상 현실의 사회적 관계나 정의관념에 부합하지 못하게 될 때, 판례변경의 필요성이라는 문제로 첨예하게 현상(現象)한다.
본고의 목적은 이러한 판례 변경의 정당화 논리와 그 방법론적 한계를 심층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본고는 우선 양천수(2023)의 "법과 시간"에 관한 법철학적 논의를 본 분석의 이론적 토대로 삼아, 법의 본질적인 '시간적 구속성(zeitliche Gebundenheit)'이 어떻게 판례 변경의 필연성으로 귀결되는지를 논증한다.
이 철학적 토대 위에서, 정상민(2023)이 심층 분석한 대법원 2023. 5. 11. 선고 2017다35588 전원합의체 판결을 구체적인 분석 대상으로 채택한다. 이 판결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라는 45년간 지속된 중요 판례를 폐기한 사건으로서, 즉 '기존 판례 유지'(별개의견)와 '기존 판례 변경'(다수의견)의 논리가 법철학적, 방법론적으로 가장 격렬하게 충돌한 지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특히 본고는 2017다35588 판결에서 드러난 하나의 방법론적 역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판례 변경을 반대한 측(별개의견)은 '신의성실'이라는 유연한 일반조항(Generalklausel)에 기초하여 기존 판례의 안정성과 구체적 타당성을 옹호한 반면, 판례변경을 긍정한 측(다수의견)은 오히려 '근로기준법'이라는 엄격한 '강행법규'의 문언, 즉 법실증주의(Rechtspositivismus)를 근거로 기존 판례의 안정성을 타파하였다는 점이다.
이 복잡한 긴장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양천수가 제시한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의 공식과 '참을 수 없는 부정의(unerträgliches Unrecht)'라는 한계 기준 , 그리고 정상민이 지적한 유스투스 빌헬름 헤데만(Justus Wilhelm Hedemann)의 '일반조항으로의 도피(die Flucht in die Generalklauseln)'라는 방법론적 비판 을 핵심적인 분석 도구로 원용(援用)할 것이다.
판례 변경의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시간'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철학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양천수(2023)의 논증을 따라 법 자체가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 속에 구속되는 동적 체계임을 밝힘으로써 판례 변경의 철학적 필연성을 도출하는 과정이다.
전통적으로 시간은 '절대시간', 즉 세계를 규율하는 변하지 않는 실체(Substanz)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법, 특히 자연법론(Naturrechtslehre)이 상정하는 법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속하는 이데아 혹은 참된 존재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과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체계이론에서 보듯이, 시간은 절대적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운동과 중력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자 '과거와 미래의 구별'이라는 '차이'로 파악된다.
법 역시 이러한 시간적 지평(Zeithorizont)에 구속된다. 법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소통을 규율하는 사회적 체계로서 끊임없이 '작동'한다. 양천수가 지적하듯, '작동이야말로 시간적인 개념'이며, 법체계는 작동이라는 시간적 과정을 통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 따라서 법은 결코 시간을 초월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시간과 함께 존속할 수밖에 없다.
존재(Sein)가 시간과 분리될 수 없다는 하이데거(Heidegger)의 통찰처럼, 법 또한 시간적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신(Gott)이 아닌 이상 영속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유한성(Endlichkeit)'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시간 속에 존재하는 법, 특히 특정한 시대와 공간의 산물인 실정법(positives Recht)은 실증성의 제약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법이 필연적으로 '변화가능성', 즉 '가변성(Wandelbarkeit)'을 그 본질적 속성으로 내포함을 의미한다. 실정법의 효력은 영원할 수 없으며, 개정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신법에 우선권을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법의 가변성은 루만의 작동주의 사고와 체계이론(Systemtheorie)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설명된다. 법체계(Rechtssystem)는 그 환경과 구별되는 독자적 체계로서 존속하기 위해, '동일성'과 '가변성'이라는 두 가지 모순된 요청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즉, 체계는 안정적인 '구조(Struktur)'를 통해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하지만(안정성), 동시에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스스로 변하지(가변성)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법체계는 '구조'를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절차(Prozess)'를 통해 환경의 변화를 체계 안으로 포섭하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이상의 법철학적 논증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귀결된다. '시간의 흐름'은 법체계의 '환경', 즉 사회적·경제적·가치관적 변화를 야기한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법의 '가변성'이라는 본질적 속성을 자극한다.
따라서 법체계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구조'(확립된 판례)만을 고집한다면, 체계는 현실과 괴리되어 그 규범력을 상실하고 도태될 것이다. 판례 변경이란, 바로 이 '시간의 흐름'에 대응하여 법체계가 '절차'를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적응하는 '자기생산적(autopoietisch)작동'이자, 체계의 존속을 위한 필연적 당위(Notwendigkeit)인 것이다.
그러나 제 II장에서 도출된 판례변경의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사법 실무에서 판례변경은 지극히 예외적이며 어렵게 이루어진다. 이 장에서는 판례 변경을 반대하는 입장, 즉 '법적 안정성'의 규범적 가치를 옹호하는 논거를 양천수(2023)의 분석을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사법 영역에서 법적 안정성은 다른 어떤 법이념보다도 중요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규범적 지위를 차지한다. 구스타프 라드브루흐가 지적했듯이, 법적 안정성은 정의(Gerechtigkeit)나 합목적성(Zweckmäßigkeit)과의 충돌 상황에서 원칙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는 가치이다.
이는 법체계의 핵심 기능과 직결된다. 법체계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 속에서 무엇이 합법이고 불법인지를 식별하게 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기대'를 안정화시키고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감축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법적 안정성이 확보되어야만 법체계의 '구조'가 유지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법체계가 지속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판례변경이 입법을 통한 법률 개정보다 훨씬 어려운 이유, '판례의 무게'가 '실정법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규범의 완성(Vervollständigung der Norm)이라는 측면이다. 독일의 법이론가 프리드리히 뮐러(Friedrich Müller)의 이론을 원용하면, 입법자가 제정한 실정법은 아직 완성된 규범이 아닌 '규범텍스트(Normtext)'에 머문다. 이 규범텍스트는 사법부의 구체적인 개별 판결을 통해 비로소 그 규범적 내용이 채워져 '규범'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판례는 단순한 법 적용의 사례가 아니라, 법관에 의해 형성된 '현재 있는 법(geltendes Recht)' 그 자체로서의 무게를 지닌다.
둘째, 법체계의 자기모순(Selbstwiderspruch) 문제이다. 법체계의 주된 작동방식이자 존재 이유가 바로 안정적인 판결(판례)의 생산을 통해 '기대의 안정화'를 실현하는 것인데 , 법원 스스로가 확립된 판례를 쉽게 변경하는 것은 법체계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기모순적 행위가 된다.
셋째, 막대한 사회적 비용(soziale Kosten)의 문제이다. 대법관을 역임한 양창수 교수의 통찰처럼, 판례 변경은 기존 판례의 법리를 신뢰하여 법률관계를 형성해 온 변호사, 법률가, 나아가 "국민의 법생활을 뒤집는다는 부(負)의 무게"를 동반한다. 이는 법적 안정성의 파괴로 인한 막대한 사회적 거래비용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판례 변경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한 사법부의 관성때문이 아니다. 이는 법체계의 핵심 기능인 '기대의 안정화'를 사법부가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이며, 규범을 완성시킨 '현재 있는 법'을 폐기하는 것이자, 막대한 사회적 신뢰비용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법원은 법체계의 존속 그 자체를 위해 판례 유지를 최우선적 가치로 삼으려는 '구조적 보수성(struktureller Konservatismus)'을 띨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바로 '판례 변경 반대' 입장의 가장 강력한 법철학적 논거가 된다.
제 III장에서 확인한 '법적 안정성'의 강력한 옹호론과 제 II장에서 도출된 '변경의 필연성'이라는 두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할 때, 법학방법론은 이 긴장을 해결할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양천수(2023)는 그 제1의 법철학적 기준으로 라드브루흐 공식을 제시한다.
라드브루흐 공식은 법이념 상호 간의 충돌, 즉 '정의'와 '법적 안정성'이 충돌하는 한계 상황에 대한 고전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 공식에 따르면, 원칙적으로는 실정법의 효력, 즉 법적 안정성이 정의보다 우선한다. 법관은 내용적으로 부정의하다고 판단되는 법률이라 할지라도 원칙적으로는 이를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그 실정법(혹은 판례)을 유지하고 적용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부정의"를 유발하는 정도에 이른다면, 이 '법률적 불법(gesetzliches Unrecht)'은 정의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양천수는 이 라드브루흐 공식을 '판례 변경'의 기준에 적용하면서, 매우 중요한 방법론적 변용(Modifikation)을 시도한다. 이는 판례 변경의 문턱을 낮추는 핵심적인 논증이다.
이러한 논리적 변용을 통해, 판례 변경은 '극단적 부정의'의 시정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법의 적극적 적응이라는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는 방법론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제IV장에서 판례 변경의 기준이 '참을 수 없는 부정의'보다 완화된 '부적절성'의 판단으로 충분함이 논증되었다면, 이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엇이, 그리고 어느 정도로 변화했을 때 '부적절'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동인을 식별해야 한다. 양천수(2023)는 이를 '내부적 기준'과 '외부적 기준'으로 분류한다.
내부적 기준이란 법체계 자체의 내부적 정합성)이 무너져, 판례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법적 안정성을 해치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외부적 기준이란 법체계 자체의 논리적 모순은 없으나, 법체계의 '환경', 즉 법이 규율하는 사회 현실이 '중대하게 변화'하여 기존 판례가 더 이상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부적절하게 된 경우이다. 이는 두가지 기준이 있는 바,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결론적으로, 판례 변경은 '시간이 흘렀다'는 추상적 이유만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이 야기한 '내부적 모순' 또는 '외부적 부적응'이라는 구체적인 '병리현상(Pathologie)'이 식별될 때 비로소 정당화의 근거를 획득한다.
이 장에서는 제 V장에서 도출된 기준, 특히 '내부적-수직적 기준'을 2017다35588 전원합의체 판결에 적용하여, 판례 변경 반대론(별개의견)과 찬성론(다수의견)의 논거를 법학방법론적으로 심층 분석한다.
별개의견(6인)은 제 III장에서 논한 '법적 안정성 옹호론'의 입장을 대변한다. 45년간 유지되어 온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는 타당하며,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용하는 기존 판례 법리는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조리(條理)'와 같은 '법의 일반원칙(allgemeine Rechtsgrundsätze)'을 근로관계라는 구체적 영역에 적용한 것이다. 이는 법문에 명시되지 않아도 당연히 인정되는 법원(法源)이라는 것이다. 별개의견에 따르면, 이 법리는 경직된 강행법규(근로기준법상 집단적 동의)를 예외 없이 관철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불합리한 결과'와 '구체적 타당성'의 심각한 결여를 방지하는 기제였다. 즉, '신의칙'이라는 유연한 정의의 원칙을 통해 '법적 안정성'(판례의 예측가능성)과 '구체적 정의'를 '조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다수의견(7인)은 제 V장의 '변경 정당화' 논리,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내부적-수직적 기준'을 근거로 제시한다. 즉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는 명백히 위법하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 판례 법리는 그 상위 규범이자 강행법규인 '근로기준법 제94조 제1항 단서'의 명문 규정에 정면으로 반하며, 근로기준법이 명시한 '집단적 동의권'은 단순한 절차가 아님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확인가능하다. 나아가 본 규정이 헌법 제32조 제3항 및 근로기준법 제4조가 정한 '근로조건의 노사대등결정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본질적 절차적 권리'인 이상, 이러한 강행법규상의 절차적 권리는, 설령 그 변경 내용에 실체적 타당성이나 합리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법관의 사후적·실체적 판단으로 대체(Disponibilität)되거나 무시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요컨대, 다수의견은 기존 판례가 '내부적-수직적 기준')을 명백히 위반하였다고 본 것이다. 이는 법체계의 단계구조를 교란하는 '참을 수 없는' 규범적 모순(normativer Widerspruch)으로서,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즉각 변경되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2017다35588 판결은 '안정성 대 정의'라는 고전적인 대립 구도를 탈피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우선, 별개의견(판례 유지론)은 '신의칙'이라는 유연한 정의 원칙을 근거로 하여, 45년간 축적된 '기존 판례'라는 안정성을 옹호했다. 반면, 다수의견(판례 변경론)은 '강행법규 준수'라는 엄격한 안정성(법실증주의)을 근거로 하여, '기존 판례'라는 안정성을 타파했다.
따라서 이 충돌의 핵심은 '판례의 안정성(Präjudiziensicherheit)'과 '법률의 안정성(Gesetzessicherheit)' 간의 충돌이었다. 다수의견은 법체계의 단계구조 원칙상, 하위 규범(판례)의 안정성은 상위 규범(법률)의 안정성을 침해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제 VI장에서 다수의견의 판례 '폐기' 논거는 '내부적-수직적 기준'에 부합하는 정당한 방법론적 결단이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수의견이 제시한 '대안'에 있다. 정상민(2023)의 비판과 헤데만(Hedemann)의 고전적 경고는 이 '대안'이 과연 법적 안정성을 회복시켰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유스투스 빌헬름 헤데만(Justus Wilhelm Hedemann)은 1933년 그의 저서 《일반조항으로의 도피》에서 법학방법론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정상민은 2017다35588 판결의 다수의견이 '법률의 안정성'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헤데만이 경고한 동일한 방법론적 오류에 빠졌다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다수의견의 이러한 '도피'는 '법률의 안정성'을 회복시키기는커녕 새로운 '법적 불안정성'을 야기했다는 것이 정상민(2023)의 비판이다.
'권리남용'의 판단 기준 역시 '신의칙'만큼이나 추상적이고 불확정적인 개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법원 판례는 전통적으로 '권리남용'의 성립을 '신의칙'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즉 "권리행사의 목적이 오직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입히려는 데 있을 뿐"인 경우 등으로 극히 예외적이고 제한적으로만 인정해왔다는 점이다.
이는 다수의견이 새로 제시한 '동의권 남용' 법리가 사실상 적용되기 불가능한, 사문화될 가능성이 높은 기준임을 암시할 수 있는데,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른 법의 유연한 적응이라는 제 II장의 법철학적 과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다수의견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라는 유연했던(그러나 상위법에 위반되었던) 기준을 폐기하고, '권리남용'이라는 (사실상) 극도로 경직된 기준으로 대체함으로써, 법적 안정성을 새로운 불확정성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본고는 법이 시간 속에 구속되는 존재이기에 그 '가변성'은 본질적 속성이며, 따라서 판례 변경은 법체계의 자기 적응을 위한 필연적 과정임을 법철학적으로 논증하였다. 이러한 변경의 필요성은 '법적 안정성'이라는 강력한 반대 논거에 직면하지만 , 이 긴장은 라드브루흐 공식을 원용하되 , 판례의 약한 구속력(Bindungsgrad)을 감안하여 '참을 수 없는 부정의'보다 완화된 '부적절성'의 기준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밝혔다.
2017다35588 전원합의체 판결은 이러한 이론적 틀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다수의견의 판례 '폐기'는, 기존 판례가 상위 법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내부적-수직적' 모순에 해당하였기에, '법률의 안정성'이 '판례의 안정성'을 압도해야 한다는 지극히 정당한 법학방법론적 결단이었다.
그러나 판례 변경의 '필요성'과 '정당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방식'은 또 다른 방법론적 심사를 거쳐야 한다. 정상민(2023)의 분석이 명확히 보여주듯이, 다수의견이 제시한 '권리남용 법리'라는 대안은, 헤데만이 1933년에 이미 경고했던 '일반조항으로의 도피'라는 고전적인 방법론적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경직된 실정법 규범과 변화하는 현실 사이의 긴장을 사법부가 또 다른 불확정적 일반조항에 의존하여 해결하려 할 때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2017다35588 판결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법의 적응이라는 과제를 완수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문제의 전위에 그쳤을 뿐이다. '법적 안정성'의 위기는 여전히 상존한다. 정상민이 제안하듯, 사법부의 '도피'를 근원적으로 막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기준을 예측 가능하게 하여 진정한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처방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혹은 '권리남용'의 구체적 기준을 명문화하는 '입법적 해결'일 것이다.
2025. 11. 12.
양천수, 《법과 시간-판례 변경의 필요성과 기준을 예로 하여》, 영남대학교 법학연구소, 『영남법학』제57호, 2023. 12., 187-216면
정상민,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의 금지- 대상판결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를 폐기한 2023. 5. 11. 선고 대법원 2017다35588, 35595(병합) 전원합의체 판결》, 제주대학교 법과정책연구원, 『법과 정책』제29집 제2호, 2023. 8., 217-26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