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28화
0.
글을 쓴 지도 오래됐다. 아니 오래된 것 같다고 표현해야 맞는지 모르겠다. 자기소개서, 자전적 에세이, 사건보고서.논문요약.. 내가 쓰는 모든 문장과 단어는 나의 의도에 맞춰 채용된, 가히 논리적 이성의 결과물이었다. 엄밀한 학문으로서 법학을 지향하며 관련 도서와 논문을 읽었던 것도 그러한 내적 지향의 연속선상이었다. 내 행동의 목적지는 앞으로도 감정이 배제된 채, 아니, 불필요한 감정을 배제한 채 기계화된 나 자신의 족적(足跡)을 남기는 과정을 수행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1.
모처럼 비도 안오던 맑은 날이었다. 시계바늘은 3을 가리키고 있던 걸 보건대, 아마 오후 3시인듯 싶었다. 새벽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랬다면 창문밖 벚꽃의 색깔이 분홍색인줄 몰랐을테니까.
이불을 정리하고 머리맡에 놓인 종이컵을 들었다. 입에다 대고 마셨을 때 그것이 물인 것을 알았다. 신기하게도 마시기 전까지는 그것이 물인지도 몰랐다. 무언가 고체가 아닌 액체는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오늘은 분명 다른 날과 달랐으면, 아니 달라야만 할텐데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시 휘집고 지나갔다.
화장실은 언제나 괴로웠다. 거울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바라볼 때마다, 정확히는 바라볼 수 밖에 없을 때마다 투명한 얼굴, 또렷한 검은 안경만이 눈에 익숙했다. 물줄기를 맞을 때마다 아직 내가 살아있음을 생경한다. 그럼에도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는 답을 못찾았지만 말이다. 죽지못해 살아간다는 표현은 단언컨대 생명을 표현하는 가장 적확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물묻은 바닥을 보면 어째서 저리도 축축하게 젖어있는 지 의아함마저 든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어쩌면, 나는 어린 시절에 가보았던 낙화암(落花巖)의 모습을 떠오른 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것이 희생인지 아니면 '무의미한' 자살인지 알 순 없었지만, 적어도 모든 행동엔 그에 걸맞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을 정도이었지만.
2.
수건으로 몸을 구석구석 닦아낸다. 축축해진 바닥도 밀대로 밀어 물기를 빼냈다. 마찬가지로 더이상 축축하지 않게 되었다. 바람을 맞은 나체는 피부보다 가까웠다. 적어도 옷을 입기 전 까지는 말이다.
씻기 전과 씻은 후의 방은 달랐다. 정체모를 수분을 입에다 갖다 댄 건 같았는데 무엇이 '나'를 다르게 한걸까. 생각의 회로 속에서 핸드폰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내가 자살유가족 북토크에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3.
저 표현조차 나의 자기기만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내가 신청해서 초대 '받은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항상 그랬다. 나 자신을 속이면서 달래고 기고만장했다. 혼자 있던 적이 많아서 그런 것일까. 머릿속의 생각이 어느새 입밖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또 하나의 나를 현실에 투영하기 시작한다. 환청? 환각? 약 때문일까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줄어들은 약봉투의 무게가 자신있게 이를 반증(反證)하였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꿈은 있지만, 지금 내가 경험하는 것은 수면 속의 부산물로서의 꿈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유쾌하지 않고 비참했지만, 더욱 힘들었던 건 나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회의와 의문이 평소보다 더 든 것이었다. 담당의사는 나에게 내재된 특유한 검은 담즙의 영향이라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나에게만 '특유'할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방 한켠 쓰레기통에 누적된 약봉투의 갯수가 이를 방증(訪證)하였다.
4.
《자살론》을 쓴 뒤르켐은 지금까지도, 나의 마음을 떨리게 할 만큼, 자의적 자멸이라 독해하는 모종의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고자 노력한 몇 안되는 저자 중 하나였다. 뭐라고 할까. 어째서인지 자살에 대한 이 사회의 시선은, 너무도, 재미없었다. 어째서 0.25의 자살률이 '비극'적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아니, 전무했다. 없다. 마치 세상 어디든지에서 없어야만 한다고 약속이라도 한듯, 그냥 자살은 나쁘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한다.
뭐,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게 이러한 사유의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의사가 말한 '특유한 검은 담즙' 때문일지도 모를테니, 차라리 환경적 요소는 배제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다. 이것마저도 내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현실이 힘들고 비참했으니까. 나에 대한 판단에 있어 환경적 요소는 가점이지 감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배제하고자 한다는 건, 나 역시도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리라.
생각건대, 어떠한 개인적 요소가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면, 그것은 흥미로운Interesting것이다. 환경적 요소가 그랬다면, 애초에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일테니까 말이다. 타살은 재미없다. 사고할 필요 없이, 원인이 명확하니까. 반대로 미지의 영역, 알려지지 않은 원인만큼, 작금의 나에게 흥미를 주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자살에 대한 사유(思由)는 언제나 재밌다.
5.
자살 유가족의 이야기는, 어쩌면, 적어도, 앞서 내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재미없는 것이다. 자살자 당신의 이야기라면 모를까, 자살 유가족의 이야기는 분명한 원인이 존재했으니까. 바로 자살자 당신의 행동이고, 그에 대한 결과는 남아있는자들의 비참함이니까.
너무도 분명했다. 나는 재미없는 것을 스스로 찾아나설만큼 용기있는 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북토크를 시행하는 사이트에 직접 찾아가면서까지 신청서 양식을 제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 행동거지를 결정하는데 있어, 일견 모순된 행동이어도 실상 그것이 [진솔]한 행위의 결과였다면,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당시의 나는 그것을 재미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나의 흥미를 끈 것 일까.
6.
지하철을 타고 동성로에 있는 교보문고를 갔다. 북토크에 참석하기 전에, 유가족들이 썼다는 책을 사서 읽고 싶어서였다. 거기에 무언가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려고 한건지,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생겨난 불필요한 감정을 없애기 위한 물증(物證)이 필요했던 건지 확실치 않았다.
중요한건, 나는 그 잘난 책을 찾았고, 샀고, 펼쳤다는 것이다.
7.
하나씩 논파하고 싶었던건가. 내 의지는 2페이지에서부터 멈췄다. 내용이 지루해서? 내 관심에서 벗어나서? 나도 알고 싶었다. 이 불명확한 안개 속 공간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벗어나려면 최대한 달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밝아오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왜? 도대체 어째서?
흐릿한 시야 속, 2페이지의 텍스트 중, 눈에 들어온 건 '오빠가 자살했대. 가자' 였다. 그리고 내 심장은, 평소보다 뛰기 시작했다.
왜? 늘상 마시던 아메리카노 때문에? 아니. 나는 매일 커피를 달고 사니까, 카페인에 의한 결과물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다. 그렇다면, 내가 이 문장에 재미를 느꼈다는 것인데 그것도 뭔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남아있는 자가 느낄만한 비참함은 너무도 분명했으니까.
8.
돌이켜보건대, 자살에 흥미가 있다는 표현은 자칫 나를 사이코패스의 굴레속에 가두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내가 비정상인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아직까지는 정신분열 단계는 아니었다. 물론 나도 양심은 있다. 적어도 내 정신적 상태가, 양수(Plus)는 아니라는 것 , 음수(Minus)에 가까운, 아니 음수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래도 -5가 -90보단 낫지 않나. 나도 아직 그 정도로 '타락'하진 않았다.
굳이 나 자신을 '변호'하자면, 내 머리속으로도 처리할 수 없는 미지의 감정은 아직 남아있다고 본다. 나는 그것에 흥미를 가진 것이라 선해(善解)한다면, 덜 사이코패스답지 않을까. 그 미지의 감정은 무엇인가. '슬픔' 으로 사료된다.
이상하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였는지 손가락으로 세기 민망할 정도로 드물었거늘, 그런데, 하필 오늘, 그 감정이 든 것일까. 왜 지금이지? 도대체 내 머릿 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자살에 대한 사유는 재미있지, 슬프지 않았다. 종교적 차원에서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자살 그 자체에 대한 논의는 흥미롭다. 이렇게 흥미로운데도 동시에 슬퍼진 것이다. 양가적인 감정은 나를 힘들게 한다. 빨리 없애고 싶었다.
9.
가족..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서 그런 걸까. 분명 가족이라 불리우는 존재가, 소중한 이들인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원인'이 없는 한, 순수한 죽음은 오롯이 자살자의 선택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죽는 것이 두렵다는 것, 두려워야만 한다는 것은 이제 통념이자 사회상식인듯 싶다. 만약 이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간, 보호감호처분이라도 받고 합법적으로 정신병동에 수용될 것이다. 그렇게 비공개상태에 놓여질 것을 생각해보면, '슬프게도' 나는 겁쟁이라, 차마 그렇게 밝힐 '용기'가 없어 할 수 없었다. 그러한 용기는 학부생 시절 환자의 연명적 치료 중단에 대한 소논문을 쓴 것에서 그친 것 같다. 그 이후론 나 자신을 기만해왔으니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근데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이를 두고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고 하면 단언컨대 교수님이 F를 날릴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간은 그냥 인간이니까. 그런데 나도 그 인간에 포섭되는지는 모르겠다.
10.
내가 그럴 자격은 있었을까. 평소보다 자존감이 더더욱 떨어졌다고 내 친한 지인들은 나를 평한다. 어쩌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의 발로도, 그런 것에 이유를 든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기시감이 든다. 10년전 그날의 기억이 나를 잠식한다. 그렇다. 맞다. 그날 나는 이미 죽었었다. 그래서 내가 자살이라는 키워드에 꽂히고 자살 유가족 북토크를 신청한 것이었다. 퍼즐이 맞춰진다. 나는 아직 그 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살을 정당화하고자 나를 기만해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나는 아직 '자살'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그날의 자살이 있었음에도 나는 숨쉬고 있다.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 유가족들과 대화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들을 수단삼아 내가 살아있음을 생경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기적인걸까.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 행복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11.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공감도 하고 싶다. 그리고 더 살고 싶다. 내 꿈을 위해 목표를 위해 앞으로도 정진하고 싶다. 그렇게 비겁하게라도 살고 싶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자기기만이라고 믿어도 좋다. 그래도 나는 아직 살고 싶다. 10년전에 자살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살고 싶다.
12.
책을 마저 읽고 싶다. 머리가 아픈게 사라지고 있다는 건, 이 미친짓거리가 효과적이라는 것이겠지. 내 인생은 앞으로도 비참하겠지만, 그래도 살고 싶다.
바깥에 벚꽃이 흩날리고 날은 여전히 더웠다. 바람이 분다. 피부에 닿는 이 기분을 나는 오늘 느낀다.
2024.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