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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dhat Oct 20. 2020

태풍

'동시에 벚꽃길 앞까지만이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개고 매미소리가 다시 울려퍼진다.

 아침에 눈을 뜨니 환희로 가득했던 만덕호 벚꽃길을 다시 한번 뛰고 싶었다. 태풍 예보가 있었지만 창밖의 날씨가 아직 잠잠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대문을 나섰다. 한번 가봤던 길이라고 한층 여유로운 마음으로 힘찬 발걸음을 척척 내었다. 주변을 더 친근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저번에 마주쳤던 마을 고양이는 어디 있을까. 저게 그 고양이 밥그릇이겠구나. 이 많은 들꽃들은 어디서 날아왔을까. 저 멀리 일하고 계신 어르신들이 보일 땐 내가 이곳에 산다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었을까. 한적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그때 이곳 마을의 안내방송이 울렸다. 태풍이 오전에 이곳을 통과할 예정입니다. 도민 여러분들은 피해가 최소가 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시설물 확인을 해주시고, 이후 야외활동을 자제해 주십시오. 시간을 보니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이내로 태풍이 지나간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 몸 하나 숨길 곳 없고, 곳곳에 기울어진 전봇대와 축산 자재 더미들이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대자연 속 한낱 인간의 무력함이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 태풍의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고요했다. 그래서였을까. 분명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원초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는데, 동시에 벚꽃길 앞까지만이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의식을 따라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본능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멈추지 않고 달렸다. 결국 벚꽃길에 이르러서 짧은 눈맞춤을 나누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그 앞에도 벚나무들이 한가득 늘어서 있다! 순간 너무 기뻐서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그것이 마치 무슨 신호라도 되었듯 그동안의 고요함을 깨는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달렸다. 달려야만 했다. 빠르게 거세지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혼자서 계속 가야만 한다는 것은 무서웠다.

머리 위로 우산을 흔들며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저멀리 지나가는 버스가 보였다. 머리 위로 우산을 흔들며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기사아저씨께서 버스를 세워주셨다. 자리에 앉자 짧지만 공포스러웠던 긴장이 풀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도 걱정되지 않았다. 이 작은 버스와 곁에 있는 몇 사람의 존재가 큰 안도감을 주었다. 집에 도착하자 곧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거센 장맛비에 둘러싸였지만 따뜻한 녹차의 김이 피어오르는 평상 위 한평 남짓한 공간은 너무 아늑했다. 신기했다. 불과 몇시간 전 약한 비바람이 부는 대자연 속에 홀로 덩그러니 있을 때는 원초적인 공포감을 느꼈는데, 천둥번개를 동반한 거센 비가 퍼붓는 지금 얇은 테라스 지붕 아래에서는 이렇게까지 평온하다니. 우리 인간에게는 어떠한 형태로든 안식처가 꼭 필요한가보다. 



 태풍이 지나갔다. 비가 개고 매미소리가 다시 울려퍼진다. 습기를 한껏 머금은 하얀 공기 속에서 길가의 풀들이, 살랑이는 벼들이 더욱 푸르르다. 간간히 지붕 처마에서 물방울들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풀내음이 잔잔한 파동으로 공기를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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