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10년 전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 민국이와 만세가 있다. (당연하게도 나는 대한이었다.) 멀쩡한 이름 놔두고 서로를 별칭으로 부르게 된 계기라고 해봐야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 해 가을 즈음에 토론대회를 나가게 되었기에 팀 명을 정해야 했었고, 마침 그 시기에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예능에서 배우 송일국의 세 쌍둥이 아들의 인기가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두를 오물오물 먹던 민국이는 2014년 한국을 강타했더랬지. 내가 대한이를 맡은 것도 (역시나) 특별할 것 없이 셋 중에서 생일이 제일 빨라서였다. 우리는 뻔하고 단순한 고등학생이었다.
토론 대회가 시작되기 전, 주먹을 가운데로 모아 내밀고 "대한민국만세!"를 외쳤던 기억이 난다.
셋 중 한 명이 결혼하면 함께 축가를 불러주자고, 나랑 만세는 노래를 잘 못하니까 춤을 추겠다고, 민국이가 노래를 잘하니까 마이크를 쥐는 게 낫지 않겠냐고, 우느라 한 소절은 제대로 부를 수 있겠냐고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나는 더욱 씁쓸해진다. 정말 우리의 미래가 그럴 것 같았으니까.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급식을 먹으며, 똑같은 문제집을 풀던 줄줄이 소시지 대한, 민국, 만세는 대학에 들어간 후로 각자의 방식으로 어른이 될 준비를 시작했다. 어리숙했던 어른준비생들은 낯선 이질감으로 인해 멀어질 법도 한데, 되려 고유한 환경에서 획득한 v어른되기 특급비결v을 주고받는 존재가 되었으니 정녕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입사한 후에는 회사가 지방에 있다 보니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쩜 만날 때마다 할 말이 쏟아졌다. 말을 했다기보다는, 쐈다? 그래. 말을 쏘아댔다. 입으로 방아쇠를 당겨대기에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의자 세 개가 남아있는 아무 장소나 들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탕탕 떨어대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없었나?
정말?
고향에서 떠나 살게 된 건 나뿐이었다. 자연스레 나를 제외하고 민국이, 만세 둘이서 만나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교통편이 좋은 서울에서 보려면 그들은 이동에만 한 시간을 더 할애해야 했다. 나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서울까지 와달라고 할 만큼 뻔뻔스럽지 못했다. 어려웠다. 돌이켜보면 무서웠던 것이 맞겠다. 솔직해지기에.
결국 우리는 내가 고향에 갈 때나, 그들이 볼 일이 있어 서울에 갈 때 짬을 내서 만나는 것으로 암묵적인 룰을 형성해 두었다.
아아, 대체 누-구를 위한 배-려였단 말인가!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만세에게 전화가 왔다. 민국이와 둘이 카페에서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며. 꺄르르 웃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만세가 말했다.
"대한아 우리 다음 달에 중국 갈래?"
난데없지만 난데없는 말는 아니었다. 갈 때가 되긴 했지. 중국은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나라였다. 언제부터였냐면, 7년 전 민국이가 중국어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민국이는 중국 전문가가 되어있을 거니까(실제로 멋진 전문가가 되었다!), 언젠가 셋이 함께 떠나자고 기약하던 곳이었다. 우리는 여행에 대한 예행연습으로써 만날 때마다 마라탕에 꿔바로우를 먹어대었다. 질리도록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떠나지도 않은 여행이 어떻게 질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당장 다음 달이라면 시간이 마땅치 않았다.
"다음 달은 어려워서, 혹시 3월은 어때?"
"나는 지금이 아니면 한 동안 휴가를 낼 수 없고, 민국이도 지금이 딱 좋을 것 같다네."
평소의 나였다면 그럼 너희 둘이 다녀오고 나는 다음에 같이 가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엄, 으음, 난감스럽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답은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솔직해지는 수밖에.
솔직함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기를 모아서!
"너희 둘이 가면 소외감 들 것 같아."
한 시간 후, 문자로 도착한 답장에 모아둔 기운은 낱낱이 분해되어
-이미 항공권을 구매해 버렸네.
추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