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갔던 카페의 에스프레소가 취향을 저격해 버린 바람에 오늘도 같은 카페에 방문했다. 출발 전부터 연습했던 말을 꺼냈다.
step 1. 저는 이곳의 여행객입니다.
step 2. 여기서 어제 먹은 코르타도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step 3. 그래서 오늘 다시 왔습니다.
step 4. 다른 메뉴도 먹어보고 싶습니다.
step 5. 혹시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step 6.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가 궁금합니다.
과연 나는 모든 단계를 통과했을까?
step 1. I am a traveler에서부터 직원이 um? 하길래 포기하고 에스프레소를 시킬 뻔했지만 다시 차분히 말했다. 더 천천히. 더 콩글리시로. “츄레불라“라고 말할 때는 알아듣지 못하더니 ”트레불러” 하니까 바로 이해하셨다. 오, 유럽식 영어.
감을 잡은 나는 step 6까지 한 번에 성공. 유럽식 영어는 속으로 대구 사투리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면 된대서 그렇게 했더니 잘 먹힌 듯하다. 엄마 아빠가 경상도 사람인게 이렇게 쓰이다니. 아무튼 오늘의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
직원은 내게 우유가 든 메뉴가 좋은지 물었고, 좋다고 했다. 속으로는 어차피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를 시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유럽에서 먹기 힘들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아니었나?
그녀는 배가 고프면 우유를 조금 넣어 먹는다며, 내가 원하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좋아요. 그거 주세요. 했다.
생각해 보니 I like it. give me that. 했는데 너무 무례했나 싶다. “좋아. 내놔.”로 들렸으려나? 하지만 양손을 모으고 연신 고개를 숙여 thank you thank you 했으므로 외국인의 언어적 한계로 받아들여주셨을 것이다.
그렇게 마신 커피는 무난한 맛이었다. 얼음이 다 녹은 밍밍한 라테. 하지만 뿌듯함이 유난했으니까. 들려오는 카페 음악에 머리를 좌우로 흔들흔들거렸다.
잘 모를 때는 이렇게 물어보는 게 필승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기분이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물어볼 줄 몰라하는 게 늙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외면의 노안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면까지 노쇠하는 건 최대한 미루고 싶다.
하지만 불쑥불쑥, 늙은이 출동한다. 그렇게 스스로가 꼰대 같다고 느껴질 때마다 안돼! 하면서 뇌를 꼬집는 자아가 있다.
여행 중 나보다 다섯 살이 어린 동생과 뇨끼를 먹었을 때였다. 뇨끼를 한 번도 안 먹어봤다는 그녀의 말에 바로 늙은이가 되었다. 나도 뇨끼를 한 번도 안 먹어 본 귀여운 시절이 있었지... 그렇게 위험한 말을 꺼냈다.
“좋아하는 게 뭐야?”
순간 뇌가 찌릿하고 꼬집혔다. 이 질문은 마치 중학생 때 장래희망을 적는 숙제에서 뭐라도 좋아하는 게 있을 거 아니냐고 으름장을 놓던 담임선생님 재질이잖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둥,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해봐야 한다는 둥의 입방정을 떨었다. 다시 뇌가 찌릿. 아야.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고, 곧바로 태연한 척 좋아하는 게 없어서 고민이라는 식의 고민상담으로 우회했다.
귀여운 동생은 나와 헤어질 때 “언니가 좋아하는 걸 꼭 찾길 바라!”라고 응원해 주었다. 귀여워. 정말 귀엽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