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잘츠부르크로 넘어간다.
남은 여행 기간 동안은 내리 한인민박에서만 생활해야 한다. 아 왜 그랬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저번주 한인민박에서의 생활은 별 탈이 없었지만, 남은 시간이 꽤 긴데 잘 지낼 수 있으려나. 강가에 내놓은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이 나의 한 마음 안에서 일어 올랐다.
비엔나에서는 일상을 살았다. 특히 어제는 한국의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냈다. 일어나자마자 장을 보고 와서 아침을 해 먹었고, 미뤄둔 집안일을 했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지루했다가, 커피를 마시고, 친구를 만났다. 특별하지 않았던지라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최대한 다 적어보기로 했다. 왜냐면 나 행복했거든.
후추 종류가 이렇게 많을 일인가? 마트에서 데이터도 켜지지 않아서 느-낌만을 믿고 구매해야 했다. 난 대학원까지 졸업한 지성인이야. 체계적인 탐정수사를 시작. 우선 비싼 건 무언가가 추가되었다는 거니까 제외. 싼 것 중에서, 색깔이 다채로운 걸로 해야 하나, 아니면 한 종류인 걸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맨 왼쪽 후추를 고르길래 그대로 따라 집었다. 제일 확실한 방법.
한 발 늦었지만, 원래도 제일 왼쪽 걸 사려고 했다. 제일 무난한 상품이 제일 먼저 놓이는 법이니까. 믿거나 말거나.
집에 남은 재료로 만들어먹은 알리오올리오. 오른쪽 빨간 덩어리들은 체리페퍼 크림치즈 라고 하는 음식인데, 깔끔하게 다 버렸다. 한국 코스트코에도 파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수요가 있나 보다. 당최 이해할 수 없다. 파프리카를 고추식초에 담가서 크림치즈에 찍어먹는 맛이다. 빨간 덩어리 덕분에 손맛 가득 알리오올리오가 더욱 맛있어진 진 영향도 있다. 평소에는 파스타를 잘 만들어먹지 않아서 몰랐는데 오일파스타에는 소금을 때리 부어야 하더구먼? 대략 2천 번 정도 부은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빨래. 공용공간에서만 할 수 있어서 더욱 손이 안 갔던 것 같다. 빨래 돌리는 동안 요가 좀 하고 카페 가야지, 했는데 무려 세 시간이나 걸린다더라. 대체 왜? 다시 설정했다가 여섯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 잘 씻어주기만 해 줘~하고 기다렸다. 2시간 반이 지났을 때쯤 잘 씻기고 있나 궁금해서 올라가 보니 이미 끝나있었다. 언제 끝난 거지. 혹시 3시간이 아니라 3분이라는 거였나? 킁킁, 냄새를 맡아봤는데 향기로운 섬유유연제향이 나서 그냥 가지고 돌아오기로. 3분이라 할지라도 손빨래보다는 믿음직스럽다.
신세 진 친구의 어머니에게 선물과 편지를 남겨두었다. 처음으로 써보는 독일어에 악필이 따로 없다. 한국어는 나름 잘 쓰는데, 보여주질 못하니 이거 원. 구글번역기를 활용했는데 혹시 잘 못 번역할까 봐 한국어 -> 영어 -> 독일어 순으로 번역했다. 일전에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를 ‘싱거운 사과를 줄게요.’라고 번역해 버리는 바람에 난감할 뻔한 전적이 있다. 괜히 어려운 말 쓰지 말고 가볍게만 적다 보니 진심이 잘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 아쉽지만, 싱거운 사과보다는 낫겠지.
그리고 오늘도 새로운 카페로. 아침을 먹어서 가볍게 코르타도를 마시려 했는데 여기는 플렛화이트 싱글 = 코르타도라고 했다. 막상 받은 플렛화이트 싱글은 코르타도라기보다는 정직한 플렛화이트 싱글이었다. 아무렴 어때. 메뉴판에 없는 코르타도를 달라고 물어보면서 뭔가 으쓱했다. “나 코르타도 먹는 사람이야. “ 였다. 어쩌라고?
라테아트에 후와- 놀랐고, 카페가 너무 더워서 놀랐다. 이 동네는 왜 날씨가 34도여도 에어컨을 틀지 않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나만 손으로 부채질 중. 다들 감각이 없나? 더위를 크게 타지 않는 편인데도 이렇게 땀이 나는데, 여기 사람들은 모자도 쓰지 않고 밖에서 뜨거운 피자를 잘도 먹는다. 안 더우세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것까지는 부끄러워서 꾹 참았다.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시간이 비어서 산책을 가보기로 했다. 시내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이곳 정말 시내 그 자체구나. 관광객도 많고, 기념품 샵도 많고. 사실 며칠 전 인종차별을 당한 후로 기가 죽어있는 상태라 산책하는 길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걸음을 멈추면 누군가 나를 붙잡을까 봐 계속 걸었다. 다리가 아파와서 카페에 가고 싶어진 나는 열심히 구글지도를 검색해 가며 카페를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카페라고 해서 문 앞까지 가면 다들 와인을 마시고 있거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만 마시고 싶은 나는 이리저리 배회할 수밖에. 나중에 친구 말로는 와인을 파는 곳에서 커피도 파는 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지 못했을 것 같다. 음메 기죽어.
유럽까지 와서 스타벅스만큼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았지만, 편한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시간은 이미 저녁이었기 때문에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고 싶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스타벅스만 한 곳이 없었다. 마음 편하게 디카페인 에스프레소를 주문했고, 직원은 금세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진동벨 없이 이름으로 불러주니까 좋구나. 한국에서는 답답했는데, 타지에서 듣는 내 이름은 다정하게 다가왔다. 스타벅스 에스프레소의 첫 입은 오! 맛있다! 였지만 점점 탄 맛이 강해져서 우유와 함께 마시고 싶어졌다. 친절한 스타벅스. 작은 우유 한 컵을 내어주신다. 그나저나 유럽의 우유는 한국과 다른 제품을 쓰겠지? 유럽에서도 서울우유를 쓸 리가 없으니. 어떤 우유를 쓰는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고소한, 아니 꼬쏘한 우유, 매력 가득이다. 커피에 넣어 마시기 아까울 정도였다.
친구 집에 머무를 수 있게 중간에서 도움을 준 알미언니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주고 싶었다. 한국인 사이에서도 유명한 립 스테이크 맛집에 갔다. 언니가 아니었으면 혼자 도전할 수 없는 음식이었을 것. 저 양을 봐라. 둘이서도 한 덩이를 남겼다. (물론 다른 메뉴도 시킴) 언니는 한국어가 서툴고, 나는 영어가 서툴러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이야기했는데 밥을 다 먹고 계산하는 동안 가게 매니저가 언니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했다. 그 둘은 독일어로 얘기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언니한테 대시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한국 손님이 많이 오는 곳이다보니 언니의 한국어 실력이 탐났나 보다. 거절을 하고 돌아서는 길에 미련이 남았는지 명함을 받고 오겠다는 알미언니. 하지만 매니저에게는 끝까지 음식이 맛있어서 명함이 필요하다고만 했단다. 직원이 되고 싶어요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지만 매니저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다음에 립 스테이크 먹으러 오면 언니가 주문받아주는 거 아니야?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이야. 우리는 까르르 웃으며 옆에서 같은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어대었다. 알미언니와 놀고 있으니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낮에 산책할 때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걸어 다녔던 길도 언니와 함께 걸으니 낭만적이기만 했다. 밤에 더욱 예쁘기도 했다. 언니는 세 시간 동안이나 산책을 하면서 여러 관광명소를 소개해주었다. 하나도 구경하지 않았던 나는 연신 감탄했고 언니는 연신 탄식했다. 여길 아직도 안 봤었단 말이야? 하며. 언니는 헤어지기 전에 숙제로 어쩌고 궁전이랑 저쩌고 디저트가게를 가라고 했는데 지키지 못할 것 같다. 다음에 또 와서 볼게. 진짜로 진짜로.
비엔나에 온 첫날 방전된 상태로 졸면서 보았던 시청사에 마지막으로 가보았다. 필름 페스티벌 때의 왁자지껄했던 분위기와는 다른 우아함을 풍긴다. 둘 다 예쁘다. 필름페스티벌을 위해 설치해 둔 가건물들이 정리되지 않아서 입장할 수 없었지만, 그 덕에 나무에 가려진 시스루 시청사를 볼 수 있었다. 그리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