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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탈출 Mar 12. 2019

완전한 세상을 꿈꾸다

대한민국 최초의 장편 SF 소설 <완전사회 完全社會>

“ 인간사회의 영원한 꿈. 전쟁 없고, 배고픔 없고 두려움 없는 사회. 따스한 사랑과 즐거움이 그득한 사회. 이러한 사회, 이른바 완전사회를 바라는 건 한낱 허황된 꿈일까.

 어찌 생각하면 꿈으로만 돌릴 게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의 온갖 사물은 날로 진보 발전하고 있나니, 사회기구와 사회 조직의 완전화도 바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된다고 본다.
장래의 어느 날엔가 완전사회는 이룩되리라고 내다본다. 헛된 꿈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성 있는 예기(豫期)다. 그럼 그 꿈은 어느 때 어떤 경로를 거쳐 현실화하겠는가. 이의 대답이 소설 <완전사회>다.”

 - <완전사회> 문윤성


대한민국 최초의 장편 SF 소설로 알려진 <완전사회>의 머리말이다. 이 소설의 작가 문윤성은 1916년 생이다. 100년도 더 전에 태어난 분의 소설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그 시절에 이런 놀라운 발상과 미래 전망을 했다니, 더구나 미국, 유럽도 아닌 우리나라에 이런 소설가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소설은 일종의 타임캡슐에 인간을 넣어 미래로 보내는 국제연합의 프로젝트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마치 오늘날의 냉동인간과 비슷한 상태로 깊은 잠에 빠지고, 오랜 세월이 흘러 미래의 인간들에 의해 잠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깨어나 보니 생물학적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이 낯선 세상에서 전 세계 유일한 남자인 주인공이 겪는 고난, 고뇌, 의외의 만남이 꽤 빠른 템포로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특히 충격적인 대목은 여성들이 남성에게 반기를 들고 아예 남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다. 미래 인간들이 남성, 여성을 떠나 진정한 성(性)이라는 의미로 진성 선언을 이렇게 천명한다.


<진성眞性 선언>

“성(性)의 모순과 대립이 있는 한 인류와 동물의 차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불행의 씨는 여기에서 싹트고, 여기서 자라난 악은 한없이 반복되고 발전한다. 우리는 이제 그만 이러한 어둠 속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우리는 영원히 참되고 아름다운 사회와 역사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분야에 걸쳐 남성의 존재를 부인하고 이를 제거한다.”


거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인류 진보의 방향성을 이야기하며 평화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다시금 일깨워 준다. 일제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작가의 평화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만하다.


“싸우지 않음으로써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다는 타산을 경험이 가르쳐 준 것이다. 여러 동물 중에서 가장 많은 경험을 쌓고 타산도 빠른 인간이 본능을 더욱 억제하고 싸우지 않아도 되는 적의 범위를 더욱 넓혔다. 가족에서 부락, 부락에서 동족, 드디어는 싸움의 대상을 동물이나 인간으로부터 자연계로 방향을 돌리기까지 하였다. 이럼으로써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월등 많은 건 물론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완전사회를 갈구하는 작가의 일갈이다.


 “우리는 이제 인간 자체의 혁명을 치러야겠다. 역사적 여건에 얽매여 지내온 인간을 지양하고 슬기로운 인간, 능동의 인간으로서 역사를 창조해 나가야겠다.

 인간 혁명, 이 길만이 우리의 돌파구다. 인간이란 본시 모순, 부조리의 결정이다. 삶과 죽음을 함께 지니고, 섭식과 배설을 한 파이프에 연결시키고 있는 동물, 이것이 인간이다.

동물적 인간을 부인하지 않는 한 모순과 대립은 영원히 존재한다. 지금 우리가 이웃을 돕는 건 단순히 이웃을 돕는다는 작은 뜻뿐만 아니라 우리가 동물의 세상을 벗어나 참된 인간 사회에 영주 하려는 자위권의 발동이다.”


 

반세기전에 씌여진 소설이라 문체는 아무래도 예스러운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박수가 일어났다

어리둥절 아니할 수 없었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 이름은 남성.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이런 표현들 때문에 오히려 SF의 맛이 더 잘 살아나는 느낌이다.


작가가 그리는 미래상도 흥미롭다. 

사람들의 업무시간은 8시부터 정오까지 하루 4시간 근무다. 5살부터 9살까지는 교과서 없이 자유롭게 놀면서 공부한다. 현재 쓰고 있는 물건들도 등장하는데 소설 속의 ‘단파 통화기’는 ‘무선으로 주고받는 음향 장치’라는 소설 속 설명을 볼 때, 현대의 휴대폰이라고 보면 된다. ‘움직이는 보도’는 요즘의 ‘무빙워크’를 연상하게 한다. 더 기발한 건 ‘홀랜’이라는 장치인데, 여성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기계다. 소설 속의 설명을 빌리자면 ‘기계적 성행위’를 돕는 기계인데 작동 방식의 묘사가 그리 에로틱 하진 않다. 여자만 있는 세상이라는 소설 전반의 설정도 뭔가 에로틱한 로맨스가 꽤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시길^^


100여 년 전에 태어난 분이 60년대에 성 정체성, 페미니즘, 젠더 간 대결, 채식주의 등 시대를 훌쩍 앞서간 생각을 소설화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소설 전체를 흐르는 평화에 대한 갈망과 완전한 사회에 대한 작가의 기대 역시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준다.


독특하고 훌륭한 발상과 웅혼한 기상이 넘치는 한국 SF 소설史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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