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겐지의 "천년동안에"
나무가 이야기 하는 천년
소설의 화자는 천년을 살아온 나무 한그루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 나무에 한 여자가 목을 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자가 죽음과 동시에 그녀에게서 태어나는 아기. 그리고 그 아이의 성장. 기묘한 우연이 겹치고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흐르는 자"가 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사는 주인공. 이름도 없이, 정해진 주소도 없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원시의 자유를 그대로 간직한 체 살아간다.
소설의 시점은 변화무쌍하다. 과거 천년의 삶에서 봐왔던 인간들의 모습,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흐르는 자"가 살아가는 모습까지 자유 자재로 넘나든다. 시점의 특이성이 감각을 묘하게 긴장시킨다. 나무의 시각으로 다소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흐르는 자"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는다. 나무의 시점이기 때문에 가장 공평무사하고 편향없는 시각을 묘사한다.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하고, 삶의 의미라는 것에도 무관심하다. 자연에서는 다만 하루하루를 충분히 살아 존재하는 것이 의미있을 뿐이니까.
삶의 자세를 소설로 녹여내다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읽고 그의 소설은 어떨까 생각했는데, 과연 그의 소설답다. 에세이에서 보여주던 그 자신의 삶과 평소의 생각이 그대로 나타난다. 사실상 나무의 입을 빌어 본인의 생각을 속시원히 풀어낸 작품으로 볼수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에세이에서 강조한 '자립의 정신'이 소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애당초 삶과 죽음이란 것은 언제든 상호보완적인 대립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 어느 쪽으로 간다 해도, 일일이 기뻐 날뛰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가장 힘든 것은, 육체와 정신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생을 질질 이끌어가는 것이다. 밋밋한 생을 사는 것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이렇게도 표현한다.
"설령 정의의 집단이라 하더라도, 구태여 참가할 것까지는 없다. 왜냐하면, 집단과 자유는 항상 상반되기 때문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것의 거부, 심지어는 시간에 대한 속박도 거부한다.
"너는 모든 구속을 거부한다. 타인은 물론이고 시간에도 속박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시계를 차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간에도 달력에도 구애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너는 알고 있다. 시간이나 날짜에 대한 과도한 인식이야말로 자유를 짓밟는 원흉이라는 것을."
그러면서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마치 다중우주를 상정하는 듯한 의미심장한 주장도 펼친다.
"나선상으로 천천히 회전하면서, 존재의 형태를 끊임없이 바꾸면서, 항시 서로 다른 시공간을 천천히 헤쳐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 즉 생물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인간의 좌뇌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한, 종교적인 착각이라고 결론지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착각과 환상 속에야말로 위대한 진리가 숨겨져 있고, 이 세상을 매끄럽게, 발버둥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마치 평행우주론을 따로 공부한 사람같다.
강렬한 스토리와 무수한 잠언들
소설의 전반부는 강렬하면서도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문장도 매끄럽고 간결하다.
번역은 김남주 선생이 하셨다. 역시 명불허전. 마치 애초에 한글로 쓰인 소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잘 읽힌다.
그런데 인상적인 도입부에 비하면 2권 쯤 부터는 스토리 중간중간의 액자 소설들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와 큰 상관없는 사회비판적 의견들이 장황하게 이어져서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좀 더 단촐하고 속도감이 있었으면 좋을 뻔 했다.
그래도 전반적인 이야기 자체의 전개는 흥미진진하다. 말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주인공에게는 부모도 없고, 주소도 없고, 심지어는 이름도 없다. 그런데도 아주 잘 살아간다.
스토리와 더불어 무수한 잠언들이 소설의 가치를 높인다. 대부분 나무의 독백이지만 결국 세상을 향한 작가의 사자후로 들린다. 그 중에는 빨갛게 밑줄 쳐가며 암송할 만한 잠언들이 넘쳐난다.
흐르는 자로 살라
나무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얼마나 자유롭게 사는가이며 어떻게 자유를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라고.
주인공이 우연히 얻게된 생명줄 같은 책, '원숭이 시집'은 이렇게 당부한다.
"흐르는 자로 존재하는한, 이 세상은 그대를 위하여 있다.
그러니 아무도 개의치 말고 마음껏 흐르라.
고여 있음에 자유가 없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라."
소설은 끊임없이 선택을 촉구한다.
'고여있는 자'로 살 것인가 '흐르는 자'로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