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日1文
그는 지금, 구미와 함께 있을 때의 자신이 좋았다. 다른 어느 누구와 함께 있을 때의 자신보다도 좋았고, 이런 나 자신이라면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들었다.
- 히라노 게이치로 <형태뿐인 사랑>
여주인공 구미는 보통의 남자라면 이해하기 힘든(그런 과거를 알고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조폭에 가까운 인간말종같은 남자와 사귄 전력이 있다. 하지만 남자주인공은 자신을 만나는 현재의 그녀와 조폭을 만나는 과거의 그녀를 완전히 다른 자아(분인分人)로 인식하고, (나름의 고뇌를 겪지만) 결국은 완전하게 그녀를 받아들인다. 달리 말하면 그녀와 함께있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 것이다.
소설 전체의 큰 구조는 결국 이런 다소 진부해 보이는 틀로 진행되지만, 논의되는 주제와 중첩되는 이야기(이혼한 부모)들이 결코 가볍거나 지루하지 않다.
자아는 영원불변의 고정된 것이 아닌, 만나는 상대방에 따라 그 상호관계속에서 항상 새롭게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이다,라는 큰 주제를 다루며, 인간 관계와 자아의 인식이라는 철학과 문학의 오랜 주제들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PS. 히라노 게이치로는 자신만의 철학을 소설로 제대로 풀어낼 줄 아는 보기 드문 소설가다. 자기의 독창적인 사상인 분인주의를 기반으로 이렇게 의미심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완성할 정도라는 점이 놀랍다.
아직 40대 초반의 젊은 작가라는 점은 더 놀랍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먼 훗날 소설가만이 아닌 훌륭한 사상가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