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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달수씨 Oct 04. 2023

배달의 기수가 되다

항암기간을 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두툼하게 기모가 들어간 레깅스에 아무 티셔츠나 대충 걸치고, 엉덩이를 덮는 긴 후드티를 겹쳐 입는다. 두 발에는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등산용 양말을, 양손에는 스크린 터치 기능이 있는 장갑을 낀다. 발목까지 덮는 롱 패딩을 입고, 머리에는 두꺼운 털모자를 귀까지 덮어쓴다.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쓰고 두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 길을 나선다. 어깨에는 큼지막한 보온백을 걸친다. 추석 때였나, 설이었나, 선물로 들어온 고기가 담겨 있던, 꽤나 고급스러운 가방이다. 이 가방에는 이제 고기 말고도 커피와 설렁탕, 햄버거와 초밥 따위가 들어갈 예정이다. 피크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몇 건이나 콜을 받을 수 있을까? 두근두근 설레는 배달 가는 길.



배달의 민족, 배달의 기수


항암치료가 시작되니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끔찍한 고통에 마약성 진통제를 달고 살아도 그때뿐이다.  몸이 힘드니 마음까지 힘들다. 그러나 가만 누워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없다. 지나간 날의 후회와 오지 않을 것 같은 완치의 그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


나가야 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체력을 키우고 머릿속을 환기시켜야 했다. 그러나 성치 않은 몸뚱이를 억지로 끌고 나서기엔 동기가 부족했다. 날씨를 핑계로, 컨디션을 핑계로 계속 계속 자리보전만 할 게 뻔했다. 그러다 문득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배달을 하자! 



우리 민족은 뭐다? 배달(倍達)*의 민족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널리 통용되는 배달이 그 배달이 아니라는 건 함정. 202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배달(配達)**의 민족은 방 안에서 손가락 하나로 손쉽게 음식을 시키거나, 식당과 손님 사이를 오가며 음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들을 뜻한다

*배달1「명사」 『지명』 우리나라의 상고 시대 이름. 한자를 빌려 ‘倍達’로 적기도 한다.≒단국, 배달나라

**배달2(配達)「명사」 물건을 가져다가 몫몫으로 나누어 돌림


라이더, 커넥터 또는 단순하게 배달 파트너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배달의 기수들은 보통 오토바이를 이용하지만, 승용차, (전기)자전거 또는 킥보드를 이용하는 배달원들도 생겨났다. 탈 것 대신 두 다리만 있으면 되는 도보 배달원도 있다. 도보 배달원에게는 거리(보통 1km 내외)와 음식양을 고려해 콜이 배차된다.



첫 배달의 추억 


대표적인 배달중계플랫폼인 배X과 쿠X이츠앱을 휴대폰에 깔았다. 회원가입을 하고, 안전 교육 동영상을 시청하면 벌써 준비 끝. 첫 배달을 나가기 전 블로그 몇 개를 탐색해 선배(?) 도보배달원들로부터 꿀팁을 몇 개 전수받았다. 그리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띵똥띵동 위잉위잉 번쩍번쩍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첫 콜이다!


근처 삼계탕 집에서 배달요청이 왔다. 목적지는 식당에서 불과 350m 거리에 있는 아파트다. 정작 콜을 수락하고 나니 잔뜩 긴장이 됐지만, 초보티를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식당에 들어가 삼계탕 두 그릇을 픽업했다. 그리고 5분 여 만에 배달 완료!


첫 배달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자신감도 생겼다. 바로 두 번째 콜이 잡혔다. 모 커피전문점의 음료 여덟 잔이었다. 첫 배달보다는 조금 난이도가 있었으나 역시 무사히 배달을 마쳤다. 배달 두 건으로 번 돈은 5,400원, 소요시간은 약 45분. 최저시급도 못 벌고 기진맥진해져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배달러로서의 정체성이 새로 생긴 날.  방구석에서 탈출해 새로운 시도를 한 나 자신이 조금은 기특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그 후 몇 달간 나는 줄기차게 길 위에 나섰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웠다.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했다. 마치 포켓몬잡기와 같은 게임 같았다.


골프에 빠진 사람들은 깃발만 보이면 남은 거리를 계산하고, 당구에 빠진 사람들은 칠판이 당구대로 보이며, 바둑에 빠진 사람들은 창틀만 봐도 바둑판을 연상한다고 한다. 배달도 마찬가지였다. 이 동네는 언덕이 있어 배달하기 어려워, 저 식당은 내가 배달해 본 적이 있는 곳이지, 이 건물 출입구는 뒤쪽에 있어서 다른 골목으로 가는 게 편한데… 모든 장소를 배달과 연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어나자마자 날씨부터 확인하는 버릇도 생겼다. 오늘은 눈발이 조금 날리는 걸 보니 보너스 배달료가 많이 붙겠군,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니 롱패딩까지 입을 필요는 없겠어, 영하의 추위가 계속된다고? 핫팩을 하나 챙겨야겠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배달하기 좋았다.


오토바이나 전기자동차 등 원동기를 이용하는 ‘라이더’들은 대부분 생계를 위해 전업으로 배달을 하는 반면, 도보 배달은 가정주부나 학생, 퇴근 후의 회사원 등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용돈벌이의 기회로 삼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돈 버는 게 목적이라면 도보 배달은 적절치 않다. 최저시급을 겨우 맞추는 수준이며, 그마저도 오랜 시간 하긴 어렵다. 도보 배달로는 부자가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하지만 운동을 목적으로 한다면, 나는 도보 배달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운동도 되고(1만 보는 금세 채워진다), 동네 맛집까지 섭렵 가능한데, 심지어 돈까지 벌 수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아무래도 잡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배달할 때만큼은 나는 암 환자가 아니라 그냥 음식 배달의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사람일 뿐이다. 털모자 안 머리카락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도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움직이는 동안에는 온몸의 통증도 사그라든다. 엄밀히 말하면 느낄 새가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일 거다. 가방을 들고 길 위에 나서면, 신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스스로를 원망하던 방구석의 개똥철학자는 온데간데 없어진다. '똥콜'을 거르고 '꿀콜'을 재빠르게 낚아채는 눈치, 목적지까지 최적의 동선을 계산하는 두뇌, 온전한 음식 상태를 위한 보냉백 컨트롤 근력을 가진 유능한 배달원만 남을 뿐이다. 오오, 환우 여러분, 모두 배달을 하십시오!





105건의 배달, 돈 벌어 어디에 썼냐고?


나의 즐거웠던 배달원 생활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항암 부작용인 부종과 수족증후군으로 걷기가 어려워진 데다가,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활의 주간'을 기다려 도전을 이어가려 했으나 쉽지 않았고, 수술을 기점으로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수술 후에는 팔을 잘 쓸 수 없다.) 지금도 궂은날이면 배달비를 올려줄 테니 어서 배달에 동참하라는 알림이 그렇게도 온다. 마음이 동하긴 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다만 그날들의 기억이 살포시 떠올라 미소를 지을 뿐이다.


항암치료 기간 동안 내가 완수한 배달은 총 105건이었다. 지급받은 최종 배달 금액은 32만 5천 원. 나는 배달로 번 돈 전부를 모 노인복지센터에 기부했다. 말기암 독거노인을 위한 시설이다.



아픈데 왜 배달을 해? 아픈 걸 잊으려고요.


지인들에게 배달 경험담을 들려주면, 십중팔구는 깜짝 놀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아픈 사람이 쉬지는 않고 왜 이렇게 무리를 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배달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는 걸. 아파서요. 아픈 걸 잊어야 했거든요. 생에 가장 힘들었을 그 시기, 배달이 아니었으면 나는 우울한 마음에 잠식 당해 혼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영영 나오지 못했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달을 하게 된 건 신의 한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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