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케어러와 돌봄, <새파란 돌봄>을 읽고
'돌봄'에 관한 책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새파란 돌봄>(조기현 저, 이매진 출판사)이다. 졸업을 앞두고 수강했던 '의료사회복지론'에서 이 책을 접했다. 필수 과목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새로 부여된 ‘환자’라는 정체성이 나를 이 수업으로 이끌었다.(거듭 말하지만 나는 본래 진짜로 정말로 전혀 아카데믹한 사람이 아니다!)
<새파란 돌봄>은 제목에서처럼 명백히 ‘돌봄’에 관해 말하는 책이다. 강조점은 ‘새파란’에 있다. 매우 젊다는 뜻의 ‘새파랗다’는 ‘영 케어러(Young Carer)’를 가리킨다. ‘영 케어러’는 만성적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 문제, 알코올이나 약물 의존 등을 겪는 가족을 돌보는 젊은 이들을 부르는 말이다.
조기현 작가는 스무 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새파란 돌봄’을 하게 된 '영 케어러’ 당사자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아빠의 아빠가 됐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작가는 뇌출혈, 인지 저하, 조현병, 알코올 의존, 암 등 각양각색의 이유로 아픈 가족을 돌본 영 케어러 일곱 명의 이야기를 <새파란 돌봄>에 모았다.
한 장(chapter) 한 장 안타깝지 않은 사례가 없었고, 인상 깊지 않은 구절이 없었다. 그렇지만 과제 제출을 위해 이 중 한 가지 사례를 선택해야 했기에 3장 ‘돌봄이 길이 되려면’에 나오는 가족을 다루기로 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돌봄 제공자인 중학생 희준은 나의 큰 딸을, 암 환자인 희준의 엄마는 나를 꼭 닮았기 때문이었다.
희준이네 가족은 엄마, 아빠, 희준(15세), 여동생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4인가족이다. 희준이 어렸을 때는 맞벌이를 하는 희준 부모를 대신해 외할머니, 외할이버지가 남매를 돌봤으나, 어른들과의 갈등으로 현재는 왕래가 많지 않다. 희준의 부모님은 둘 다 ‘엘리트’이며, 희준은 ‘비싼 사립 유치원’을 다니고 배우고 싶었던 것은 마음껏 배울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그러나 희준이 12살 때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하자 희준네는 ‘가세가 기운’다. 경제적 보호막이 사라지자 희준네 가족은 해체 직전까지 가고, 돌봄 당사자가 된 희준의 학업, 진로, 또래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희준네 가족에 우리 가족이 겹쳐 보였다. 전형적인 4인 가족, 외조부모의 돌봄, 중학생과 초등학생인 어린 자녀, 안정적인 중산층…. 비록 그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완벽히 같다고 할 수 없지만 암 투병으로 인해 상당 부분 - 경제적 조건, 사회적 관계, 그리고 가족 간의 관계와 역할 - 변화가 생긴 점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희준이 엄마라면? 내가 희준이었다면? 그 돌봄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느꼈을 그들의 마음을 나름대로 그려보았다.(이 부분이 과제 내용이기도 했다.)
<환자, 희준 엄마가 생각한다>
아프다. 항암치료로 망가진 내 몸은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아이들이 걱정되고, 앞 날이 걱정되지만 당장은 이 한 몸을 추스리기도 쉽지 않다. 청소, 요리, 장보기, 집수리, 어린 동생 돌보기, 병원 동행, 행정업무 등 어쩔 수 없이 많은 일을 큰 아이인 희준에게 맡겨야 한다. 희준은 기꺼이 그 역할을 해주고 있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의 표정이 밝지는 않다. 걱정된다. 내가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데 아이들이 나를 돌보고 있다.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은 아직 너무 어리다. 학교생활은 어떤지, 성적은 어떤지. 궁금하지만 챙길 재간이 없다. 한창 돌봄을 받을 나이에 아픈 엄마를 돌봐야 한다니 미안하고 민망하다. 아픈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싫은데 자꾸 늘어지는 몸을 나는 어쩔 수 없다.
벌려놨던 사업은 수습이 되지 않았고 빚더미에 앉았다. 중증질환 산정특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는 병원비도 너무 많다. 남편은 사업을 접고 리무진 버스까지 운전하게 됐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돈이 없으니 다툼도 잦아진다. 내 몸 아픈 게 과연 내 탓인가. 남편이 원망스럽지만, 남편도 내가 원망스럽긴 마찬가지겠지.
한때는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었다. 재밌게 일했고, 큰 부자는 아니어도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지낼 수 있었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우리 아이들도 우리 만큼 즐기면서 사는 삶을 살았으면 했다. 지금은 지위 대물림은커녕 식사 챙기기도 버거운 상태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한다. 그러나 남겨질 아이들이 걱정이다. 끝까지 살아서 최소한의 보호막이 되어주고 싶다. 그런데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영 케어러, 희준이 생각하다>
언젠가부터 우리 집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부터 인 것 같다.
많은 게 바뀌었다. 아빠는 돈을 버느라 얼굴 볼 새가 없다. 가끔 집에서 마주치는 날이면 엄마와 다투기만 하는 모습일 뿐이다. 엄마와 동생을 돌보는 것과 집안일은 내 차지가 됐다. 엄마가 아프니 아들로서 이 정도는 해야 마땅하다. 기꺼이 할 수 있다. 그런데 돌봄을 하다 보면 남는 시간이 별로 없다. 공부할 시간도, 친구 만날 시간도 없다.
나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까? 하루하루 살아가고는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공부도 하고 싶은데 집안 여건이 받쳐주지 않는 것 같아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가장 힘든 건, 내가 힘든 걸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는 거다. 나와 비슷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또 없겠냐마는, 적어도 내 주위에선 그런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혼자 힘들어야 하는 시간이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이해받고 싶고, 공감받고 싶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빨리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엄마를 돌보느라 힘들지만, 엄마가 돌아가신다면 더 절망적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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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내 아이의 입장일 수도 있었던 희준의 심정을 상상하며 써 내려가다 보니 어찌나 울컥하던지.
다행히 희준이는 학교 상담을 계기로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선생님께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으며 꽉 막힌 마음이 풀렸다. 친구들도 희준이의 마음 상태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희준은 ‘영 케어러’로서의 현실을 직시하며 동시에 ‘청년’으로서 앞으로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안정적이었던 희준네 가족은 아픔과 돌봄을 만나면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 사실은 엄마가 암 진단을 받기 훨씬 전부터 부부사이는 위태로웠을지도, 집 안팎의 경제 사정은 엉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희준과 희준의 동생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엄마의 병이 트리거가 됐을 뿐, ‘정상'가족은 언제 ‘비정상'가족으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던 희준은 ‘영 케어러’가 됐다. 안타깝지만, 피할 수 있었던 상황은 아니다. 희준이 원해서 영 케어러가 된 게 아니었듯이, 엄마가 원해서 암 환자가 된 건 아니었으니까. 바꿔 말해 희준네 가족과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내 아이들이 ‘영 케어러’가 되지 않은 까닭은 지극히 운이 좋아서일 뿐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 그렇지 않기를 다시금 바랄 뿐이지만 - 우리 아이들이 그 상황에 놓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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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케어러’의 존재를 더욱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용어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나도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겐 된 단어이다.) 이미 ‘영 케어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고령화, 저출생, 한부모가정, 만성질환과 중증질환의 증가 등 젊은이들이 돌봄의 주체가 되는 상황은 결코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영 케어러'에 대한 인식 확대를 통해 이들이 짊어질 부담을 당연하게 여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돌봄을 하는 아이의 돌봄 받을 권리가 소외되지 안’도록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자는 것이다.(p73) 문제를 문제로 인식해야만, 존재가 비로소 드러나야만, 돌봄을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관련 정책이 뒷받침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작가는 돌봄 문제를 연구하는 정치학자 김희강의 말을 인용해 학교에서 ‘돌봄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돌봄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우리는 마치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예외’처럼 여긴다. 언제든 겪을 수 있지만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정보도 없는 상태에 머무른다. 조금 더 일찍 돌봄 교육을 받는다면 돌봄을 마주할 때 겪게 되는 혼란을 줄일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쓸모가 있게 될 배움이기도 하다.”(<새파란 돌봄>, p78)
돌봄 교육은 비단 ‘영 케어러’만을 위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돌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물론이고, 나와 같은 중년, 황혼에 접어든 노년층들도 언제든 돌봄을 받고, 돌봄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작가의 말마따나 돌봄 교육은 "당위의 차원을 넘어서 누구나 삶에서 마주하게 될 순간을 각자도생으로 두지 않겠다는 의미"이다.(<새파란 돌봄>, p78)
나는 마흔이 훌쩍 넘었고, 이미 가정을 이루어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다 큰 어른’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가 부모님이 (다행스럽게도) 정정하게 살아 계신 덕분에 여태껏 ‘영 케어러’는 차치하고 돌봄에 대한 걱정을 별로 해보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 암에 걸리며 - 돌봄이 필요한 입장이 되면서 비로소 나의 어린 자녀들도 ‘영 케어러’의 입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겨우 인지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난 내 아이들이 ‘영 케어러’가 되지 않길 바랐다. 가능한 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미안했고,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소진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의 고통과 필요는 애써 숨기며, 아이들에게는 학업에만 충실하라고 강조했다. “아이가 돌봄의 ‘대상’ 일뿐만 아니라 돌봄의 ‘주체’ 일 수도 있다는 현실을 인정”(p73)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고, 감사히도 주위의 넘치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기는 무난히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새파란 돌봄>을 읽었다. “돌봄은 삶의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돌봄이 곧 불행이라면 삶의 조건 자체가 불행인 셈이다.”(p76)라는 구절을 읽으며 조금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새파란 돌봄>에서 ‘새파란’은 ‘영 케어러’라는 의미 외에도 새로운 물결, 새로운 ‘파란(波瀾)’이라는 뜻을 지녔다. 희준이네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갑자기 돌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누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야 만다. 돌봄이 필요하고, 돌봄을 제공하는 우리 모두가 돌봄의 새로운 파란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 누구나 돌봄을 준비할 수 있길, 모두가 준비된 돌봄을 받을 수 있길.
※ 작가의 다른 글
- <아빠의 아빠가 됐다> (조기현 저, 이매진)
- <몫> (조기현 저, 이매진)
- <돌봄의 시간들> (공저, 모시는 사람들)
- <가족의 무게> (이시이 고타 저, 조기현 설명, 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