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암이 생긴 까닭
원인原因 : 어떤 사물이나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일으키게 하는 근본이 된 일이나 사건
죽음(에 준하는 슬픔)을 받아들이기까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를테면 암을 진단받은 사람은,
"아닐 거야! 검사 결과가 잘못됐을 거야!!"라는 부정(denial)으로 시작해,
"아니 왜 내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고 분노(anger)하다가,
"내가 너무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랬나? 마음을 더 곱게 쓸걸..."이라며 과거를 되돌려보기도 하다가(타협, bargaining),
"근데 안 나으면 어떡하지, 죽으면 어떡하지, 병약한 나, 하찮은 존재..."라면서 자기 연민과 우울(depression)에 빠지고 난 후에야
"그래, 나는 누가 뭐래도 암 환자야. 치료를 잘 받아야겠다"라고 수용(acceptance)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기가 빠른 나는 이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바로 수용(acceptance) 단계로 뛰어넘었다. (그 시기가 지나갔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걸 수도 있다. 기억의 왜곡이랄까.)
뭐 어쩌겠나. 부정한다고 검사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고, 분노한다고 암덩어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고, 타협한다고 검사 전 몸 상태로 바뀌는 건 아닌데 말이다. 다만 우울의 단계를 잠시 거치며 암 발병 원인을 찾아보려 한 것 같긴 하다.
(전략)… 타고난 성정은 바꿀 수 없지만 누구든 성장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장은 어느 시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된다고 믿습니다….(후략)
전 직장 동료들에게 이직 인사를 하며 ‘성장’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내 몸에 암 덩어리가 성장하는 줄도 모르고 저렇게 해맑게 인사를 남겼었다니.
대부분의 암이 그러하듯이 유방암도 발병 원인을 확실하게 규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유방암을 유발하는 위험 인자*로는 비만, 음주, 방사선 노출, 유방암 가족력 등이 있고, 호르몬과 관련해서는 이른 초경, 늦은 폐경, 폐경 후의 장기적인 호르몬 치료, 모유 수유를 하지 않거나 늦은 첫 출산 연령이 꼽힌다고 한다.
*그 요인이 있을 때 100% 암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암에 걸릴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인자 (충남대학교병원, https://www.cnuh.co.kr/dcc/sub05_030501.do)
하지만 이 중 나에게 해당되는 요인은 겨우 두어 개뿐이다. 가족력도 없고, 호르몬 치료는 물론 호르몬 관련 영양제도 먹은 적이 없다. 겨우 40대 초반으로 폐경할 나이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초경은 오히려 조금 늦은 편이었다. 첫 아이 출산연령은 만 27세로 요즘 기준에서는 매우 빠른 편에 속하고, 길진 않지만 두 아이 모두 모유수유도 했다. 키가 큰 편이라 기골장대 해 보이지만 결코 비만이었던 적은 없다.(진짜다.)
기껏 해봐야 유방암이 가장 많이 발생한 연령대인 40대라는 점, 그리고 음주를 꽤나 즐겼다는 사실뿐인데... 술 좀 마셨기로서니 암이 생겼다고 믿고 싶지 않다. 음주가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수많은 멀쩡한 나의 술친구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건 자존심 문제다!)
암의 원인을 따지면 따져나갈수록 의문만 남는다. 정말 원인이 없었을까? 그저 운이 나빴다고 넘겨버리기에는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굳이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보냈던 폭풍 같은 시기를 떠올려본다. 영 적응하기 어려웠던 외국생활, 엎친데 덮친 코로나. 온 세상과 격리되어 철저히 혼자였던 그 시기, 아마도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지루한 외국생활을 정리하고 내 나라 대한민국에 돌아와 장밋빛 생활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결코 쉽지 않았다. 몇 년간 쉬었던 회사에 복직을 했고, 적응 좀 하려는 찰나 또 이직을 하게 됐다. 오랜만에 시작한 일은 정말 재밌었으나, 그동안 아이들을 돌보는 문제는 별개로 터져 나왔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는 맘 붙일 곳이 없었고,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다양한 사정으로 일 년 사이에 이모님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 와중에 친정엄마는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아빠는 급성간염으로 사경을 헤맸다.(다행히 지금은 회복되셨다.) 더욱이 이 모든 과정을 혼자 겪어야만 했다. 내 편이 되어야 할 사람은 여전히 외국에 있었으므로. 내편이 아니라 남의 편에서.
잘 헤쳐나갔다고 스스로 토닥였지만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솔직히 너무너무 힘들었다. 시나브로 쌓인 스트레스가 암이라는 형태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지목됐으니, 또다시 그 스트레스를 일으킨 원인을 찾아 일벌백계할 때다. (아님)
일개 범인(凡人)으로 남 탓을 하고 싶은 못난 마음이 들 때도 많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으려 한)는다. 남 탓을 해도, 후회를 해도, 울어 보아도 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암 덕분에 제가 더 행복해졌어요’라며 부러 긍정 코스프레를 할 생각도 없다. ‘몸 관리’를 하지 못한 내 탓을 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다만 현재에 충실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헤쳐나갈 뿐.
스트레스로 잔뜩 꼬여버렸던 몸과 마음과 시간과 관계가 서서히 풀려간 건 아이러니하게도 반강제적으로 주어진 휴식시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암 덩어리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이제 조금씩, 모두가, 모든 게 제 자리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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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사진 :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포스터
남탓티콘 https://e.kakao.com/t/dont-blame-me
스트레스로고통받는현대인 https://e.kakao.com/t/im-suffering-from-stress
국가암정보센터 https://www.cancer.go.kr/lay1/program/S1T211C217/cancer/view.do?cancer_seq=4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