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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달수씨 Apr 24. 2023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내게 암이 생긴 까닭

원인原因 : 어떤 사물이나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일으키게 하는 근본이 된 일이나 사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부정에서 수용까지...


죽음(에 준하는 슬픔)을 받아들이기까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슬픔의 5단계


이를테면 암을 진단받은 사람은,


"아닐 거야! 검사 결과가 잘못됐을 거야!!"라는 부정(denial)으로 시작해, 

"아니 왜 내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고 분노(anger)하다가, 

"내가 너무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랬나? 마음을 더 곱게 쓸걸..."이라며 과거를 되돌려보기도 하다가(타협, bargaining),

"근데 안 나으면 어떡하지, 죽으면 어떡하지, 병약한 나, 하찮은 존재..."라면서 자기 연민과 우울(depression)에 빠지고 난 후에야

"그래, 나는 누가 뭐래도 암 환자야. 치료를 잘 받아야겠다"라고 수용(acceptance)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기가 빠른 나는 이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바로 수용(acceptance) 단계로 뛰어넘었다. (그 시기가 지나갔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걸 수도 있다. 기억의 왜곡이랄까.)


뭐 어쩌겠나. 부정한다고 검사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고, 분노한다고 암덩어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고, 타협한다고 검사 전 몸 상태로 바뀌는 건 아닌데 말이다. 다만 우울의 단계를 잠시 거치며 암 발병 원인을 찾아보려 한 것 같긴 하다.



내가 암이라니...


내가 고... 아니 암이라니..



(전략)… 타고난 성정은 바꿀 수 없지만 누구든 성장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장은 어느 시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된다고 믿습니다….(후략)


전 직장 동료들에게 이직 인사를 하며 ‘성장’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내 몸에 암 덩어리가 성장하는 줄도 모르고 저렇게 해맑게 인사를 남겼었다니. 


대부분의 암이 그러하듯이 유방암도 발병 원인을 확실하게 규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유방암을 유발하는 위험 인자*로는 비만, 음주, 방사선 노출, 유방암 가족력 등이 있고, 호르몬과 관련해서는 이른 초경, 늦은 폐경, 폐경 후의 장기적인 호르몬 치료, 모유 수유를 하지 않거나 늦은 첫 출산 연령이 꼽힌다고 한다. 


*그 요인이 있을 때 100% 암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암에 걸릴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인자 (충남대학교병원, https://www.cnuh.co.kr/dcc/sub05_030501.do)


출처 : 분당서울대병원 홈페이지



하지만 이 중 나에게 해당되는 요인은 겨우 두어 개뿐이다. 가족력도 없고, 호르몬 치료는 물론 호르몬 관련 영양제도 먹은 적이 없다. 겨우 40대 초반으로 폐경할 나이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초경은 오히려 조금 늦은 편이었다. 첫 아이 출산연령은 만 27세로 요즘 기준에서는 매우 빠른 편에 속하고, 길진 않지만 두 아이 모두 모유수유도 했다. 키가 큰 편이라 기골장대 해 보이지만 결코 비만이었던 적은 없다.(진짜다.) 


기껏 해봐야 유방암이 가장 많이 발생한 연령대인 40대라는 점, 그리고 음주를 꽤나 즐겼다는 사실뿐인데...  술 좀 마셨기로서니 암이 생겼다고 믿고 싶지 않다.  음주가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수많은 멀쩡한 나의 술친구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건 자존심 문제다!)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


그냥 사는 게 스트레스 @카카오이모티콘


암의 원인을 따지면 따져나갈수록 의문만 남는다. 정말 원인이 없었을까? 그저 운이 나빴다고 넘겨버리기에는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굳이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보냈던 폭풍 같은 시기를 떠올려본다. 영 적응하기 어려웠던 외국생활, 엎친데 덮친 코로나. 온 세상과 격리되어 철저히 혼자였던 그 시기, 아마도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지루한 외국생활을 정리하고 내 나라 대한민국에 돌아와 장밋빛 생활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결코 쉽지 않았다. 몇 년간 쉬었던 회사에 복직을 했고, 적응 좀 하려는 찰나 또 이직을 하게 됐다. 오랜만에 시작한 일은 정말 재밌었으나, 그동안 아이들을 돌보는 문제는 별개로 터져 나왔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는 맘 붙일 곳이 없었고,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다양한 사정으로 일 년 사이에 이모님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 와중에 친정엄마는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아빠는 급성간염으로 사경을 헤맸다.(다행히 지금은 회복되셨다.) 더욱이 이 모든 과정을 혼자 겪어야만 했다. 내 편이 되어야 할 사람은 여전히 외국에 있었으므로. 내편이 아니라 남의 편에서.


잘 헤쳐나갔다고 스스로 토닥였지만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솔직히 너무너무 힘들었다. 시나브로 쌓인 스트레스가 암이라는 형태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렇다고 네 탓도 아니야 @카카오이모티콘


자,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지목됐으니, 또다시 그 스트레스를 일으킨 원인을 찾아 일벌백계할 때다. (아님) 


일개 범인(凡人)으로 남 탓을 하고 싶은 못난 마음이 들 때도 많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으려 한)는다.  남 탓을 해도, 후회를 해도, 울어 보아도 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암 덕분에 제가 더 행복해졌어요’라며 부러 긍정 코스프레를 할 생각도 없다. ‘몸 관리’를 하지 못한 내 탓을 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다만 현재에 충실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헤쳐나갈 뿐.


스트레스로 잔뜩 꼬여버렸던 몸과 마음과 시간과 관계가 서서히 풀려간 건 아이러니하게도 반강제적으로 주어진 휴식시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암 덩어리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이제 조금씩, 모두가, 모든 게 제 자리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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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사진 :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포스터

남탓티콘 https://e.kakao.com/t/dont-blame-me

스트레스로고통받는현대인 https://e.kakao.com/t/im-suffering-from-stress

국가암정보센터 https://www.cancer.go.kr/lay1/program/S1T211C217/cancer/view.do?cancer_seq=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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