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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Nov 11. 2020

낙엽이 흩날리면 너를 생각해

열다섯을 쓰다듬어

 

 이상한 반을 만났다.

 보통은 첫 만남 이후 보름 정도만 지나도 살갑게 인사를 하거나, 슬금슬금 다가와 말을 다. 지금까지 만난 보통의 중학생들은 그랬다. 그런데 올해 우리 반은 다르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기만 한다. 진짜 앉아있기만 한다. 아이들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몹시 낯설다.


 처음엔 '오, 역시 신입생! 때묻지 않은 순수함 귀엽군.'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세 달이 지나도 조용-히,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눈만 끔벅끔벅 거렸다. 심지어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도 그랬다. 작년 아이들이었다면 늬들이 드디어 철이란게 들었구나! 어화둥둥 우쭈쭈 잘한다 잘한다 했겠지만, 어쩐지 이런 모습이 반갑지 않다.  


 수업 시간은 더 문제다. 질문을 해도 답이 없다. 계속 눈만 끔벅끔벅 거린다. 나 혼자 떠들어 본다. 나 혼자 웃어 본다. 나 혼자 당황한다. 나 혼자 지친다. 소통이 되지 않는 수업은 기억되지 않는 수업이 된다. 누구 하나 먼저 용기 내어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담임 수업이라 그런가 싶어 다른 교과 선생님들께 수업 분위기를 여쭈어도 같은 반응들이다.


 이놈의 코로나 때문인가도 싶었다. 입학식도 없이 마스크를 쓰고 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소녀 소년들에게 교실에서 지켜야 할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했다. 잡담을 삼가고, 신체적 접촉을 하지 말고, 가능하면 자기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담임의 부탁대로 착실하게 따라왔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마음의 거리를 두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다른 반 수업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늘 그래 왔듯 교실은 흥겹고 생생하다. 우리 반은 그 생생함이 없다. 서로 눈치만 보며 친해지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닦달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에 좀 더 찬찬히 소녀 소년들을 살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들의 눈빛에는 분명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서툴고 어색했다. 긴장하고 경직된 아기 사슴들처럼 보였다.


 그렇게 우리에게 가을이 오고야 말았다. 운동장 느티나무 잎이 가을볕에 그을린 얼굴로 흔들린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운동장 데이트 신청받아요.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우리 데이트합시다.
조회대 옆 느티나무 아래에서 기다릴게요.


 고민이 있거나, 특별히 선생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신청하라고 말했다. 역시나 아이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고, 과연 몇 명이나 데이트를 신청해 올까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 여학생 두 명이 찾아왔다. 그리고 남학생 두 명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여학생 네 명이 찾아왔다. 또 남학생 두 명이 찾아왔다. 그렇게 조용히 찾아와 선생님, 운동장 데이트 신청하러 왔어요. 라고 말했다. 조심스럽고 소심한 데이트 신청에 혼신의 힘을 다해 웃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이 되면 만났다. 나는 서둘러 점심을 먹고 커피를 들고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한 모금, 두 모금 커피 냄새가 기분 좋게 퍼지고, 온기가 손에서 입으로 발끝으로 전해질 때쯤, 자박자박 바스락바스락 수줍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우리 걸읍시다.


  운동장은 따뜻한 색감을 지녔다. 수 십 년의 세월 동안 이곳에서 누군가는 웃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울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감격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한숨지었을 것이다. 운동장은 늘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웃음과 울음과 땀과 노력과 한숨과 감격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운동장은 단단하고, 그래서 밟으면 폭신폭신하다. 우리는 폭신폭신한 운동장을 밟으며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음을 꺼낸다.

 

 선생님 그냥 같이 걷고 싶었어요.
 제가 요즘 소설을 쓰고 있는데 잘 안 풀려요. 이야기가 자꾸 산으로 가요.
 수업 시간에 대답하는 게 부끄러워요.
 혼자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걸고 싶은데, 싫어할까 봐 말을 못 붙이겠어요.

   

 어느 날은 진지하고, 어느 날은 가볍고, 어느 날은 유쾌하다. 같이 걸으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까르르 웃기도 한다. 반 아이들 반 정도가 운동장 데이트를 마쳤을 때쯤, 퇴근 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운동장 데이트 신청할래요.


 내성적인 아이들이 많은 우리 반 중에서도 유독 말수가 적은 소년 A이다. 담임이 말이라도 붙일라치면 큰 눈망울이 갈 길을 잃은 듯 흔들린다. 목소리 듣기가 힘들다. 뜻밖의 데이트 신청이 반갑고, 놀라워 당장 날짜를 잡았다. 화요일 12시 50분 느티나무 아래.

 막상 담임과 상담을 하더라도 속마음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아이들이 많다. A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요즘 무슨 고민이 있니?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중학교 생활이 적응이 안 돼요. 저는 초등학교 때는 밝은 성격이었어요. 친구들과도 잘 지냈어요. 그런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다 다른 중학교로 갔고, 저만 우리 학교로 오게 되었어요. 저는 지금 친구가 없고, 그래서 자꾸 다른 친구들 눈치를 보게 돼요.


 소년 A가 또박또박 자신의 고민을 술술 이야기하는 모습에 사실 조금 놀랐다. A의 고민은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였지만, 고민을 듣는 순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A가 늘 말없이 축 쳐져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무거웠다. A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기도 했다. 그런 A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시원스럽게 표현하다니. 함께 풀어야 할 숙제가 생기긴 했지만 A가 자신의 고민을 씩씩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싶었다.


 솔직하게 고민을 이야기해 주어서, 운동장을 함께 걸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했고, A는 예쁘게 웃었다. 그날 저녁 A의 어머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A가 중학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웃으면서 집에 돌아왔다고 하셨다. A의 고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지만 운동장 데이트는 A를 웃게 했고, 나를 안도하게 했다.


 쉬는 시간에 교실이 웅성 인다. 옳지, 좀 더 떠들어라. 뚫린 입은 떠들라고 있는 것이야. 웃음소리가 참으로 반갑구나. 마스크 안 표정을 모두 읽을 수는 없지만, 눈이 진심으로 웃는다. 우리 교실은 안전한 곳이구나,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곳이구나 라고 아이들의 눈이 말해준다.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느리지만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소녀 소년들이 더 좋아졌다.


 단지 운동장을 걸었을 뿐이다. 같이 흩날리는 낙엽을 보았다. 자박자박 서로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느리게 서로의 속도에 걸음을 맞추었다. 운동장은 전보다 더 단단하고 폭신폭신해졌다.


              아이들과 함께 밟았던 낙엽이 흩날리는 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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