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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Nov 01. 2020

기차가 지나갈 때 너를 생각해

열다섯을 쓰다듬어

토요일 오후, 전화가 왔다. 뜻밖의 발신자였다.

 권지연쌤 B중학교 왜 갔어여. 담이는 뭐해여.


 높낮이 없는 일정한 톤과 특유의 말투, 소년 H다. 본 적 없는 내 딸의 안부를 항상 묻는다. H는 작년까지 근무했던 중학교의 학생이고, 1, 2학년 2년 동안 담임으로 만났던 도움반 학생이다. H 특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코 끝이 찡해졌다. 학교를 이동한 지 반년이 지났다. 사실 H가 연락을 할 줄은 몰랐다.


 H는 학급에서의 시간보다 도움반에서 보냈던 시간이 더 많았고, 내가 담임이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지도는 도움반 선생님께서 맡아하셨다. 물론 우리 반에 도움반 학생이 있으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다. 다른 친구들과의 원만한 소통과 관계 유지, 학급에서의 적절한 역할 부여, 조금 불편한 친구와 일 년을 살아가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것들 배워가기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H는 학급의 무거운 책임감이라기보다는 만나면 즐겁고 기분 좋아지는 존재였다. 이상하게도 복도에서 H와 만나 이야기를 하면, 특유의 목소리와 말투를 들으면, 마음에 살랑- 산들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H 덕분에 오히려 힘을 얻었다.

 선생님 어제저녁에 뭐 먹었어여.
 김밥 먹었어.
 김밥 맛있어여?
 응 당연하지. 너는 뭐 먹었어?
 밥이여.


대화라고 해봐야 전날의 식사 메뉴를 묻거나,

 담이 어딨어여?
 유치원 갔지.
 유치원 갔어여?
 응. 유치원 갔어.
 담이 몇 살이에여?
 5살."


 우리 아이 이름을 알고부터는 만난 적 없는 딸아이 안부를 물었다. 매일 물었다. 매일 같은 질문, 같은 내용의 대화였지만 귀찮거나 싫지 않았다. H를 만나게 되면 그의 말에 온전히 집중하게 되는 게 신기했다. 학생 생활 지도와 업무 부담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H와 마주치면 분주하게 돌아가던 머릿속 회로가 일시 정지된다. H는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철도 기관사가 꿈인 소년 H는 세상에서 기차를 가장 좋아한다. 주말마다 기차역에 가서 기차 구경을 하거나, 가까운 역까지 기차를 타고 다녀온다. 그래서 H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차가 지나가는 우리 학교를 좋아한다. 운동장 느티나무 사이로 기차가 지나갈 때면, 수업 중에도 기차 소리에 귀 기울인다. 넋 놓고 기차를 바라보고 있다. 어떤 선생님도 나무라지 않았다. 소년의 눈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H는 우리 반 우유 당번이었다. 오전 8시 40분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교실 뒷문을 열고 나갔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반에서 아무리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어도 8시 40분이 되면 칼 같이 우유를 가지러 갔다. 매일 오후 3시 30분이면 산책을 했던 칸트처럼,  H가 드르륵 뒷문을 열고 나가면 '8시 40분이군' 했다. 교직 인생에서 이토록 성실하게 우유를 가져다준 우유 당번은 처음이었다.


 학기 초 도움반 선생님께서 H에게 우유 당번을 시켜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추천해주셨을 때 의아했다. 우유는 학생들이 기호에 따라 대금을 지불하고 먹는 것이라서 당번은 상당한 책임감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내 봉사활동으로 인정되어 봉사 시간이 부여되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나름 선호하는 역할이다. H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의향을 물어보았다. 소년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우유 당번 2년 연임의 역사를 만들고, 우유 당번계의 표상이 되었다.


 우리 반에는 작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그 전 해에 쓰던 것이다. 학기 초이고 봄이었다. 버릴까 싶었는데 H가 틈만 나면 트리 옆을 서성이는 것이다. 반 아이들이 "선생님 H가 크리스마스트리 엄청 좋아해요"라고 말했고 우리는 1년 동안 트리를 치우지 않았다. 교무실에는 12월에 전구 달린 트리를 놓아두었는데, 종종 전구가 반짝였다. H였다. 선생님들은 트리가 반짝반짝 불빛을 내고 있으면 H가 왔다 갔구나 생각했다. 


  교무실 동료 선생님들이 "권 선생, 밖을 좀 봐요." 하면 어김없이 H가 서 있었다. H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H는 어쩜 저렇게 잘 컸을까 늘 궁금했다.


 학부모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학부모 교육을 마치고 학부모님들과 교실에서 둥글게 모여 앉았다. 그 자리에 H 어머님께서도 앉아 계셨다. H 어머님은 H와 등하교를 함께 하셨다. 가끔 같은 반 친구들에게 과자를 쥐여 주시기도 하셨다.


 학부모님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 여쭙자 H 어머님께서 일어나셨다. 저희 애 때문에 늘 미안하고 고맙다며 다른 학부모님들께 두 번, 세 번 고개 숙여 인사를 하셨다. "어머님, H가 얼마나 착하고 성실하게 학교생활하고 있는데요. 미안하실 일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을 드렸지만 계속해서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셨고, 그다음 해에도 똑같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셨다. H는 피해를 준 것이 없다. 우리는 서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H는 좋은 엄마를 만나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H가 지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랄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 H에게서 반년 만에 전화가 왔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여.
 선생님도 H가 궁금하고 많이 보고 싶었어.


 소년 H는 지금도 특유의 유쾌함으로 웃으며 지내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8시 40분이 되면 스르륵 교실 뒷 문을 열고 나가거나,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H가 앞으로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머님의 마음이 좀 더 편해지셨으면 좋겠고, H가 꼭 멋진 철도 기관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기차를 타고 매일 차창 밖 세상을 구경했으면 좋겠다. 성실하고 야무지게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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