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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Oct 09. 2022

샤인머스캣을 먹으며 너를 생각해

열다섯을 쓰다듬어

 마트에 샤인머스캣 풍년이다. 영롱한 연둣빛에 자꾸 눈길이 간다. 초창기 샤인머스캣 한 송이에 5만 원 하는 보고 뭣이? 치킨 2마리잖소?? 며 내 목구멍으로 넘길 것은 아니라 여겼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저 포도는 안 되겠다 했는데, 우연히 먹게 되었을 때 이건 뭐랄까. 포도계의 대혁명!이었다. 아삭한 식감에 기분 좋은 당도와 상큼함이 한 세트로 치고 들어왔다.     


 그러던 것이 최근 재배량이 증가하면서 마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과일이 되었다. 그래도 샤인머스캣이 마트 가판대를 채우고 있는 광경이 아직은 좀 낯설다. 고등학교 때 오렌지가 폭발적으로 들어왔을 때도, 낯선 것에 점령당한  묘한 기분을 느꼈었다.


 어제 사둔 샤인머스캣을 흐르는 물에 씻는다. 초1 딸아이 가을 소풍 간식이다. 포도를 좋아해서 청포도를 살까 하다가 샤인머스캣을 골랐다.      


 어느 날 열다섯 소년 S가 말했다.

샘, 저는 공부 안 할래요. 유튜버 될 거거든요.
응 그렇구나. 잘할 것 같은데?     

 

 며칠 뒤,

샘, 저 뭐 해 먹고살지 모르겠어요.
유튜버 될 거라며?
별로인 것 같아요.
음. 그럼 진로 선생님께 진로상담 받아 보는 거 어때?     


 종례 시간,

샘, 진로 샘께서 농사지으래요.(앞뒤 다 잘라먹음)
응? ;; 농업분야로도 알아봐 주셨구나. 요즘 청년 농부들 많아지고 있잖아. 지자체에서도 지원해주고. 스마트팜도 있고.
그게 뭐예요?
학교도서관에 가면 관련 책이 있을 거야.     


 다음 날, 도서관에서 책 빌려옴.

샘 저 책 빌렸어요!(책이 꽤 두껍다)
이야. 잘했다. 천천히 읽어보면 도움 될 거야.


 다음날,

샘!! 저 샤인머스캣 농장 할 거예요!!(대발견)
오, 좋은데? 샤인머스캣 맛있잖아!

 

 며칠 뒤,

샘 저 그거 안 할래요.
뭣이라...?-_-   


 열다섯 소년 S는 조금 요란하게 진로를 탐색 중이다. S의 의식의 흐름이 반 전체 아이들에게 죄다 공유되고 있다. 열다섯 소년 M은 카페 사장님이 꿈이라고 했다. 그래서 10년 뒤 M의 카페에서 반창회 하기로 약속했는데, 지금은 꿈이 대통령이다. 청와대에서 만나야 하나. 집무실 앞? 암튼 꿈이 급격하게 커졌다. S나 M처럼 떠들썩하게 진로를 탐색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오랜 시간 조용하게 꿈을 찾아가는 아이도 있다.     

 

 학기 초 상담 때 소년 K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었다.

장래 희망이 없습니다.     

 

1학기 말 상담에서는,

아직 고민 중이에요.     

 

학년말 학교생활기록부 작성을 앞두고,


 그래서 소년 K의 생활기록부 진로희망란에는 ‘진로탐색 중’으로 적었다.     


 올해 육아 휴직을 하고 집에 있는데, 9월에 K로부터 안부 문자가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진로 생각이 났다. 근 1년 만에 다시 물어봤다.


 학창 시절에 장래 희망을 적으라고 하면 긴 생각 없이 ‘국어 선생님, 작가’라고 적었다. 그러고는 놀기 바빠서 공부는 뒷전이었다. 수능을 치고 울아부지는 애매한 성적으로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다고, 집 근처 대학의 행정학과에 들어가서 공무원을 하라고 했다. 때마침 그곳이 공무원 합격률 몇 프로라고 뉴스까지 나왔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 가출을 했다. 별 소용없었다.     

 

 행정학과에서 수업을 들으며 태어나 처음으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는데 자연스럽게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래서 사범대 윤리교육학과로 전과를 했다. 생각해보니 내 꿈은 원래 국어 선생님이었다. 국어를 복수 전공해서 국어로 임용고시를 쳤다. 그리고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도 쓰고 있다. 작가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다.      


 학창 시절 막연하게 꿈꿨던 일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어디선가 튀어나와 내 등을 떠밀었다. 꿈꾸는 대로 살아진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런데 가끔, 아이들에게 지금 당장 꿈을 꾸라고 재촉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어른들은 자꾸 지름길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열다섯 소년 S와 M과 K는 각자의 방법과 속도로 세상을 탐색하고 있다. “진로 탐색 중입니다”라는 말은 불안한 말이 아니다. 제대로 걷고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나보다는 낫다.



※ 이 글을 적고 있는데 소년 M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소름이 돋았습니다. 몇 달 전  M은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드려야 하는데, 실수로 작년 담임인 제게 전화를 한 것 말고는 처음으로 연락을 해온 것입니다. 국어 성적이 올랐다며, 요즘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꿈이 뭐냐고 물으니 대통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내용이 완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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