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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Sep 30. 2022

뒷산 전 상서

친애하는 나의 뒷산에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려고 앉았는데, 엄마 다음으로 생각이 났어요. 요즘 우린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죠. 처음으로 마음을 표현해볼까 해요. 우리가 만날 때마다 하고 싶었던 말들인데 차마 할 수 없었어요. 다른 이들에겐 혼자서 중얼거리는 제 모습이 공포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말을 편하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내적 친밀감의 정도로 봤을 때 당신과 저는 이미 절친 사이나 다름없죠. 그럼 지금부터 말을 놓을 테니 당신도 편하게 들어주세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라. 대구라는 낯선 도시에서 집을 구하다가 우연히 들어가게 된 아파트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산이었어. 뒷산. 너를 보는 순간 그 집이 내가 머물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올 때도 말이야. 이전 집과 같은 길을 끼고, 같은 뒷산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라서 계약을 했어. 모델하우스도 한 번 둘러보지 않고 말이야. 그냥 그거면 됐다 싶었어. 이 정도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꽤 진심이지?     


 오늘도 너를 만났어. 육아휴직을 한 후,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너에게로 가. 벌초의 계절이 왔어. 곳곳이 반듯하게 이발을 하고 멀끔해졌구나. 그래서 산은 온통 풀 냄새로 가득해. 향긋한 풀 냄새, 나무 냄새가 코로 들어오는 순간의 느낌을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행복이라고 해야 할까, 평온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바람이 불었잖아? 우수수수수...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축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넘실거리고, 초록이 일렁거리는데, 바람은 너무 시원하고 내 모든 감각은 온통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있어. 이 모든 건 우연일 수가 없겠구나 생각했어. 감사해. 너도 지금 이 순간도.     


 개망초꽃, 부처꽃이 진 자리에 파란 나팔꽃이 피었어. 살구가 떨어진 자리에 도토리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했고, 이름 모를 버섯들이 큼지막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어. 가을이 오고 있는 거지? 봄, 여름 부지런히 산을 오르며 튼실해진 허벅지처럼 내 마음도 단단해지고 있어. 속세에 찌든 가여운 영혼도 진정한 휴식을 누리고 있어.     


 종종 8살 딸아이와 함께 산을 오르기도 하는데, 딸아이도 나를 닮아 산 냄새를 좋아해. 산을 오르는 뒷모습이 즐거워 보여. 종알종알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하는데, 참 신기하지? 평소와 다른 새로운 이야깃거리들이 쏟아져. 일상의 언어들이 아니라, 마음속 언어들이 시처럼 노래처럼 쏟아져 나와. 너의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이겠지. 넌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구나.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들숨날숨을 반복하며 산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혼 빛에 물 들은 여인의 눈동자...- 기타 할아버지였어. 꽃나무로 둘러싸인 벤치가 할아버지의 무대지. 한여름 무더위 동안은 보이지 않으셨어.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원래의 자리로 오신 거야. 처음 들어보는 낯선 노래도 의외의 장소에서 듣게 될 때는 이상하리만치 깊게 꽂혀. 전에는 이곳에서 하모니카 할아버지가 종종 하모니카 연주를 하셨어. 산속 하모니카 소리는 마음을 울렁이게 해. 아득한 곳으로 데려다 주지.      


 그리고 집에서 30분 정도 늦게 출발하면 그분을 만날 수 있어. 장구 할아버지. 스틱 두 개를 양손에 쥐고 나무벤치를 두드리시는데, 처음엔 드럼 연습을 하시는 줄 알고 드럼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었거든. 연습에 방해가 될까 봐 안 보는 척, 곁눈질로만 봤을 때는 드럼을 치시는 것 같았어. 그런데 내가 장구 할아버지 옆을 지나갈 때 할아버지의 몸동작이 더욱 크고 현란해지는 걸 보았거든. 착각인가 싶었는데 몇 번 그러고 나서는 장구 할아버지에게 관객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때부터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천천히 지나가며 자세히 보니 드럼이 아니라 장구였어.      


 현란한 손목 스냅과 역동적인 움직임은 벤치가 아닌 장구를 치고 계시는 할아버지 모습을 상상하게 해. 노랫소리, 기타, 하모니카, 벤치의 장구 소리가 인생 뭐 별 거 없다라고 걸쭉하게 말해주는 것 같아. 조금 더 경쾌하게 살아볼까 생각이 들면, 목덜미가 시원해지고 어깨가 가벼워져. 나는 발걸음을 좀 더 늦추는 것으로 뒷산 뮤지션들에게 응원을 보내.     


 너를 생각하면 엄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 3년 전 엄마는 딸자식 육아를 돕기 위해 이곳으로 오셨어. 남편의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주말부부가 되었고, 워킹맘인 나 혼자서 아이를 돌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친정부모님께서 내려오셨지. 평생 고생만 한 엄마를 다시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엄마는 또 기꺼이 고생을 하러 오신 거야. 항상 ‘기꺼이’가 문제였어. 엄마의 ‘기꺼이’는 일방적 희생뿐이었어.     


 엄마와 지낸 2년 동안 난 사실 엄마를 볼 때마다 울고 싶었어. 우리 엄마는 왜 또 여기에 계신 걸까, 고마움과 미안함이 범벅이 되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 엄마는 사실 6년 넘게 심한 갱년기 증세를 겪고 계셨거든. 서울 어디 유명한 대학병원에서도 특별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어. 엄마가 이곳으로 ‘기꺼이’ 오신다고 했을 때 증세가 호전되셨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엄마는 여전히 아팠던 거야. 가벼운 걷기조차도 버거워하셨어.      


 그런데 말이야. 엄마가 산을 오르기 시작하셨던 거야. 병원에서 고지혈증, 지방간 진단과 함께 당뇨와 고혈압 전 단계라는 진단을 받으시고 걱정하시는 엄마에게 –엄마, 힘들더라도 산에 가보는 거 어때요?-라고 말했어. 엄마는 거의 매일 거실에 앉아 창 밖 뒷산을 보셨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시는 걸 알았지. 망설이시던 엄마가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너도 잘 알지? 얼마간의 몸살이 지나고 나서부터 엄마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어. 매일 새벽마다 산에 오르셨지. 3개월 뒤 검진에서 모든 증상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어.     


 엄마는 몸과 마음이 살아나고 있었고, 목소리도 크고 씩씩해지셨어.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감사했어.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프셨던 엄마가 산을 오르고 계셔. 어지럽지도 않고 두통도 거의 사라지셨대. 내가 어떻게 너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 편지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겠지.     


 지금 엄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냐고? 올 초에 남편이 다시 대구로 돌아왔어. 엄마는 친정집으로 가셨고. 일주일에 4번 새벽 조깅을 하신대. 걷기도 아니고 조깅을. 남은 이틀 중 하루는 근력 운동을 하신다기에 힘들지 않으시냐 물으니 하나도 힘들지 않으시대. 목소리에 생기가 느껴져.      


 넌 나에게, 우리 엄마에게, 우리 가족에게 은인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어. 나는 이전보다 더 네가 특별하게 느껴져. 너에게 가면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아. 꽁꽁 싸매고 있던 마음의 실타래가 풀어져. 한껏 숨을 들이마실 때면 나무 냄새 속에 스민 엄마 냄새가 나. 바라지 않고 기꺼이 퍼주기만 하는 엄마 같아. 엄마가 죽기 살기로 올랐던 뒷산에 매일 올라가. 그때마다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야. 고마워. 이미 넌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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