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쌀알 권지연 Nov 17. 2022

인생은 11자



 오늘도 뒷산을 바라보고 앉는 일로 사적인 하루가 시작된다. 아이와 남편의 아침을 돕는 일은 내 나름의 공적인 일이므로. 거실 테이블에 앉아 뒷산을 살피는 일부터가 사적인 시간이 되고, 그러므로 사적인 뒷산이 된다. 한데 내 사적인 풍경엔 낯선 등장인물이 많다. 처음 보는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날아갔고, 바로 보이는 등산로에는 산을 오르는 낯선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노란 재킷 아주머니가 쉰두 개짜리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을 지켜본다. 아주머니가 계단을 오르는 리듬에 맞춰 개수를 세어 보았다. 마흔여섯 번째 계단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오른다. 이번엔 노부부가 산을 오른다. 할아버지 뒤를 할머니가 따라간다. 할머니께서는 한평생 영감 뒤꼭지만 따라 걸으셨으려나 생각하다, 그 간격 속에서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간격이 서글프지 않았다.     



 마흔 세월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에서 줄다리기를 해왔다. 다가오면 밀고 멀어지면 당기는 세월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점에 대해서 생각했다. 관계에는 늘 크든 작든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다.     


 

우리에겐 진정한 접점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마음과 마음은 포개질 수 있는 걸까.


    

 같은 것들에 대해서 그때에도 생각했었다. 그때 열아홉 소녀 적, 단발머리 찰랑거리는 풋내 나던 시절에.     






 고3 졸업여행이었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문장이다. 이제 곧 완전한 자유가 눈앞에 있고 이별이 있을 것이다. 자유와 이별과 여행이라는 단어가 뒤섞여 심장이 쿵쾅거렸고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한도를 초과했다. 마지막 밤 숙소는 에버랜드 통나무집이었을 거다. 어디서 잤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가 이 밤을 같이 보낸다는 것만 중요했다.     



 그 밤은 우리가 모두 아는 그 밤이 맞다. 단발머리 소녀들이 맛도 모르는 투명하거나 노란 음료를 어디선가 주섬주섬 꺼내온다. 선생님들은 안 들리거나, 안 보이거나 일찍 주무시는 척을 해주신다. 이 지점에서 선생님께 그간 쌓였던 미움과 원망은 발효되고 존경의 마음만 남는다. 단순해서 살기 편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날 잊지 못할 금언을 남겼다. 맛도 없는 걸 들이부으며, 이 쓴 걸 왜 먹냐며 또 들이부으며, 친구 얼굴 보고 웃다가 또다시 들이붓고는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인생은 11자~~ 인생은 11자~~!!     



 웃겨 나자빠진 친구들 앞에서 인생은 그런 것이라며 일장 연설을 했던 장면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에 대한 것이었다. 숫자 11처럼 가까이서 걸을 순 있지만 서로 포개질 순 없는 존재들이라고. 그래서 슬프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는 사람들 사이의 틈, 그 간격이 서글펐다.       


 

 그렇다고 해도 어디서 그런 표현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생각해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낮 동안 쿵쾅거렸던 심장이, 낯설고 쓰디쓴 알코올과 만나면서 일으킨 화학작용의 결과였을 것이다. 내 안에 살던 또라이 하나가 이때다 싶어 튀어나와서는 싸지르고 간 말이었다. 그냥 또라이 아니고 상 꼰대 또라이..    



 공주라는 별명의 장 씨 성을 가진 내 친구 장공주는 그날 나의 일장 연설에 탄복하여 싸이월드 대화명을 ‘인생은 11자’로 바꿨다. 싸이월드에 들어가서 장공주의 대화명을 볼 때마다 목덜미가 후끈거리고 낯이 뜨거워져 로그아웃을 했다.      



 한동안 ‘인생은 11자’라는 말이 뒤를 따라다녔다. 친구들은 자꾸 내 얼굴을 보고 키득거렸다. 그 후 내 인생에 술은 없었고, 나는 술 없는 20대를 보냈다. 고3 졸업여행에서 내 안의 잠자던 또라이를 발견한 건, 앞으로 맞닥뜨릴 청춘, 평화로운 청춘을 위한 신의 축복이라 생각했다. 나는 술을 들이붓는 대신 전도서 1장 2절을 읽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점은 완벽한 포개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점에 불과했다. 살면서 가끔 그 점을 찾을 수 있었고 책을 읽으면서도 종종 그 점을 발견했다. 비록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지만 말할 수 없는 환희와 안도를 느꼈다. 점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기도 했지만 욕심이었다. 점은 소멸되기도 했다.



 11로 걷다가 손만 내밀면 되었다. 가끔씩 서로 맞잡는 손이면 충분했고 그 온기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었다. 서로를 향한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이면 족했다.       


   

 지금은, 사랑하는 이들과의 좋은 자리가 있으면 한 잔 정도 잔을 채운다. 접점을 찾고자 하는 갈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열아홉 이후 들이붓는 일은 다시없었고, 열아홉에 만난 그 재기 발랄 또라이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다만 그가 남긴 금언을 기억하는 것으로 진정한 의미의 역사 청산을 이루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자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