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우리 집이 이사를 했다. 평생을 안동에서 뿌리내리고 살 줄 알았던 권씨 집안의 민족 대이동 덕분에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첫 학교였던 청송에서의 마지막 일 년은 학교 사택에서 지냈다. 원룸식의 빌라였는데 동네 집들 중 제일 새삥이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근처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함께 소복이 모여 살았다. 시골 동네에서 자취할 수 있는 방을 구하기가 어려워 사택 경쟁률이 높았다. 그래서 그해 신규로 들어온 정 선생 그녀는 사택 방을 얻지 못했고 학기가 시작되었는데도 집을 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쉬는 시간마다 복도와 현관에서 휴대폰을 붙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서성댔다. 오명가명 보게 된 그녀의 초조한 뒤통수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별수 없이 “저 선생님,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지낼까요?”라고 먼저 말했다. 원룸에서 낯선 이와 함께 사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망설였는데, 그 망설임을 초조해 보이던 그녀의 뒤통수가 밀어낸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뒤통수에서 시작되었다.
합가(?) 후 룸메이트가 된 그녀는 서서히 먹거리들을 싸 들고 오기 시작했다. 함께 살자고 먼저 손을 내민 것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자주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고, 음식이 든 봉지를 주섬주섬 꺼냈다. 포항에 살았던 그녀는 과메기나 해산물은 물론 두릅, 민들레, 씀바귀 무침 같은 엄마표 음식들을 가져왔다. 덕분에 나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배를 괴롭히지 않고 정성 담긴 맛깔나는 음식으로 든든하게 끼니를 챙길 수 있었다.
그날은 그녀가 굴을 싸 들고 와서는 굴국을 해주던 날이었다. 평소 굴을 즐기지 않았지만 정성을 담아 개운하게 끓여낸 그녀의 굴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 거뜬히 비워냈다. 그녀를 향해 쌍따봉을 날리고.. 그러고서 시작되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살살 아프더니 뒤틀리기 시작했다. 토하기 직전의 위험 감지 신호가 왔다. 얼른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내뿜었고, 굴이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왔다.
두어 시간은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식은땀이 흐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배가 꿀렁거리는 걸 눈으로 보았다. 배 속 내장들이 굴을 밀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단합하는 행태가 그 와중에 놀라웠다. 중력을 거스르며 안의 것을 역류시키는 결사적 투쟁으로 배가 꿀렁꿀렁 움직였다. 우웩---
다음 날 학교에 가자, 나를 본 아이들이 소스라쳤다. 나도 내 몰골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선생님 얼굴이 왜 그래요!!” “응.. 좀 그렇지? 어제 배가 좀 아팠단다..” “헐...” 안쓰럽게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난 지금 공空이고 무無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단다. 공기이자 바람이란다.’라는 뜻의 말을 하고 싶었으나 기운이 없어 참았다.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나부끼듯 휘청거리며 다니는 나를 볼 때마다 아이들은 “헐...” “쌤...”이라 말했다. 동네에 병원이 없어서 생으로 견뎠다. 보건소가 있긴 했지만 거기까지 가느니 얼른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사택 방에서 마치 공기가 된 듯 누워있는데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때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우리 반 소년 S가 보낸 문자였다.
쌤, 현관문 확인해 보세요...
무슨 일일까 싶어 현관문을 열어 보았더니 현관문 손잡이에 검정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비닐봉지 안에 든 것은 약 봉투였다. 동네 약방에서 지어온 약이었다. '약 드시고 얼른 나으시고, 아프지 마세요'라는 문자를 읽고 약 봉투를 여는데 그제야 눈물이 쏟아졌다. 짜식.. 열여섯이 너무 따뜻하잖아.. 나잇값 못하고 이러기니. 남아있던 눈물 콧물까지 다 쏟아내고 나니 진정한 공空이, 공기가 되었다.
굴을 쏟아내던 날, 화장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그 사이사이에 굴국을 끓이며 즐거워하던 그녀 뒤통수가 떠올랐다. 우웩- 소리가 미안해서 참으려 했는데도 참아지지가 않았다. 모조리 쏟아내고 공기가 된 채로 나가서 마주친 그녀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화장실에서 치러지는 치열하고 필사적인 사투의 아우성을 들으며 그녀도 내내 초조했을 것이다. 가까스로 방에 드러누워 ‘나 괜찮아’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손을 저으면서 웃어 보였다. 그런 몰골로 무슨 위안이 되었으려나 마는.
그 일로 나의 내장들이 굴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억지로 친해지게 할 순 없어 나는 굴을 먹지 않는다. 싱싱한 굴을 볼 때마다 그녀 생각이 난다. 싱크대 앞에서 그녀는, 아니 그녀 뒤통수는 내내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까딱거리기도 했다. 굴국에 담긴 그녀의 포근한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이 지글지글 그득히도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굴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약 봉투가 떠오른다. 선생은 베푸는 자리라 생각해 베풀 것만을 다짐했지 받을 줄은 몰랐다. 열여섯 소년에게도 타인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따수운 마음이 있었고, 소년이 건넨 약 봉투가 서글픈 몸과 마음을 따숩게 쓰다듬었다. 모든 것을 게워내고 세상 가벼운 존재가 되어 잠깐이나마 공空의 경지를 맛보았던 그때 그 시절의 굴국과 약 봉투는 더할 수 없는 훈기였다. 지나온 청춘, 두고두고 생각나는 내 인생의 아랫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