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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Jul 27. 2023

꽃이 스러졌는데

2023년 7월 18일




 초등학교 2학년 우리 아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선생님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공부를 잘 가르쳐 주시고, 친절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중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수 년째 담임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 딸아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담임 선생님인 것이 참 좋습니다.          


    

 운이 좋게 훌륭한 담임을 만났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맞습니다. 우리 아이는 운이 좋게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묵묵히 담임의 자리를 지켜내느라 애쓰시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2023년 7월 18일 세상을 떠나신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말입니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은 학교를 사랑하게 하고, 교실에서의 일상을 너그럽게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 아이의 시선은 선생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언젠가 한 소년이 교실에서 ‘선생이’ ‘선생한테’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녀 소년들은 학교에서 매일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선생’이란 은 아이들에게 자연스럽지 않은  단어이고, 그 뒤로 이어지는 문장 또한 아이들의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소년은 부모로부터 흘러들어온 문장을 교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학교에서 지내다 보니, 학교가 돌아가는 생태도 자연스럽게 알아가게 됩니다. 가끔 딸아이의 학교 소식을 접하며 어, 왜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입에서 흘러나오려는 소리를 의식적으로 막습니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제 입에서 흘러나온 부정의 언어로,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불신이 아이의 마음에 자리 잡을까 봐서입니다. 삶의 자리이자 배움의 터전인 학교가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이에게도 괴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시선의 흐름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부모의 관점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물과 현상과 학교와 사회에 대해서 관찰하고, 정의 내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실은 딸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도 선생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존경한다는 표현을 사용할 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2학년인 지금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습니다. 공부보다 중간 놀이 시간을 많이 주시고, 이해를 잘해주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언제든 혼낼 수 있는 '선생'이 있는 곳에서 과연 어떠한 배움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아이는 그런 '선생'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함부로 소리치고 막무가내로 덤벼듭니다. 아이는 실수와 잘못을 통해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르칠 수 있는 권위를 박탈당한 교사는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배움을 박탈당한 채 어른이 되어 갑니다.    



 아이의 부정적 시선을 모두 부모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다만 많은 경우, 훌륭하게 자란 소녀와 소년들 뒤에는 언제나 그보다 더 훌륭한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고학력에 돈이 많은 양육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기 빠듯하더라도 너그럽고 일관된 시선으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고자 애쓰는 어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러한 부모가 되기를 소망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한 아이의 부모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날 선 이야기의 마지막은 담임을 향한 원망입니다. 부모의 귀는 자녀에게만 열려 있고, 상황의 앞뒤와 맥락과 스토리는 어쩔 수 없이 일정 부분 추측과 상상으로 채워집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말입니다. ‘학생을 위해서’ 했던 열심이 ‘자식을 위해서’라는 열심 앞에 무너집니다. 사랑으로 바라봤던 아이를 향한 시선에 벽이 생깁니다. 부모님이 들이댄 법의 잣대로 아이를 바라보게 됩니다. 따뜻함은 사라지고 빈틈없는 냉정만 남게 됩니다.               



 선생님은 기계가 아니고 인간입니다. 그러나 촘촘하고 파괴적인 잣대는 기계적인 교사로만 남게 합니다. 윽박질러 주문한 가르침은 즉시로 완성되어 나올 수 없습니다. 가르침도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과 학생은 관계하고 소통합니다. 위축과 상실, 무기력 안에서 사랑과 보살핌의 마음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사랑과 보살핌의 관계가 이어질 수도 없습니다. 어느 때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아이들에게 그런 교사의 마음이 흘러 들어가겠지요. 아프고 병든 마음 그대로 아이들에게 흘러 들어갈 것입니다.        


        

  때론 학부모님의 날 선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마음 깊게 자리한 불안과 두려움이 전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행한 열심이 분노로 표출될 때, 그것은 이미 자식을 위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행한 열심의 끝에 자식의 행복이 아니라, 부모 자신의 자존심과 욕구만 남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문제입니다. 부모님의 자녀의 문제임과 동시에 우리 반 학생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 이전에 학생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혜를 모으고 협력해야 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진실된 원인과 방안을 찾는 데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젠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신뢰가 필요합니다. 학교와 선생님이 내 아이를 억울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 공평하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이끌어 줄 것이라는 신뢰, 우리가 같은 편일 것이라는 신뢰 말입니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의 치열하고도 반짝이는 성장의 시간을 함께 지켜보는 같은 편입니다.(https://brunch.co.kr/@breeze95/77)


           

 소중한 내 아이가 처음으로 세상을 공부하는 곳인 학교가 아픕니다. 가르칠 수 없고, 배우지 못하는 무너진 학교를 아이들의 정직한 눈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교권과 학생 인권은 서로 존중되어야 하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짓누르고 으르고 협박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서로에 대한 예의가 절실한 때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교사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교육당국은 더이상 교사를 벼랑 끝으로 몰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게도 닥칠 일이라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운이 좋지 않은 어느 때, 내게도 한 번은 닥칠 일들이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놀라지 말자고 그리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국화꽃 든 손이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헌화를 합니다. 꽃다운 젊음이 스러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선배 교사로서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꽃이 스러졌는데 세상은 온통 갈 길을 잃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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