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딸은 세 살때부터 꿈이 화가였다. 사실 화가가 정말 어떤 직업인지, 그림으로 생계를 잇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그저 그림이 좋아서 그랬을거라고 추측해본다.
매일 그림을 짬짬이 몇 십장씩 그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본인이 그린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울기도 한다. 내가 매일 읽어주는 그림책을 혼자서도 꼼꼼히 읽어보기도 하고 만화영상을 보더라도 꽤 세밀히 관찰하는 모습이다.
작년 7월, 공저이긴 하지만 엄마가 쓴 책이 출판된 걸 보고 본인도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처음엔 그림 여백에 삐뚤빼뚤 커다란 글씨들이 개연성 없이 들어선 모양이었다. 그 일도 매일 반복하더니 이젠 제법 '글, 그림 O.O.O' 라고 쓰기도 하고, 줄거리를 먼저 구상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매번 나아지는 글, 그림에 감탄하기도 하고 때론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너의 재능을 엄마인 나는 어떻게 더 빛내줄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누군가는 그림 그리는 걸 유투브로 찍어 업로드 해주라고 조언도 해주었다. 게으른 엄마이자 자기 하고픈 일도 많은 나는 엄두를 못 내었다.
대신 짬날때마다 아이의 그림을 스캔해서 포토북 형태로 표지와 작가소개 등 그럴싸하게 편집해서 '그림책' 명목으로 출판했다~치고 딸에겐 "작가님~" 이라고 불러줬다. 그렇게 딸이 만들어낸 그림책들이 이제 열 권이 넘었다. 내가 작업해준건 아직 서너권 뿐.(게으른 엄마라 미안해~~)
딸의 영감을 일깨워주기 위해 종종 전시회도 보러 갔었는데 그간 코로나라 통 가보지 못했다. 제주에 머무르고 있는 참에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전시가 있을까 검색하다 '전이수 갤러리' 를 발견했다. 일전에 영재발굴단이라는 TV프로그램에 나온 어린이작가라는 기억이 났다. 참, 작년인가 재작년에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봤었지?급 흥미가 일어 검색해보니 오히려 어른들이 더 눈물바람에, 위안을 받는 전시라 해서 기대됐다.
최근 함덕으로 갤러리를 옮겼고 신간 '소중한 사람에게' 의 원화 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없이 예매했다. 어른은 9000원, 어린이는 1000원인데 특이하게도 어른의 관람비용은 3000원은 미혼모센터, 국경없는 의사회 등에 기부금으로 쓰이고 5000원은 교환권으로써 아트샵이나 카페에서 쓸 수 있었다. 갤러리 자체가 하나의 나눔의 장으로 쓰이는 것이다.
전시는 조용한 관람과 어린이와 함께 관람으로 나뉘어져 시간별 예약제로 운영되었다. 관람도 하기 전인데 이리 상세한 설명과 예약시스템을 보니 더더욱 기대가 되었다.
갤러리가 함덕이라 사십춘기에 미술혼 불태우는 내 욕심도. 채우려 김택화 드로잉전도 함께 봤다..김택화미술관을 먼저 들러 제주 풍경을 그린 유화도 보고 목탄?이나 파스텔을 사용한 스케치 그림들도 봤다.
김택화미술관 2층 화실커피에 마련된 종이와 도구로 그림을 그리는 딸
뒤이어 '걸어가는 늑대들' 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전이수 작가의 갤러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전이수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는 TV에 나왔고, 책도 내고, 제주에 산다 정도였다. 막상 사방에 펼쳐진 그의 그림과 색채, 그림의 의미, 철학적인 글과 심금을 울리는 전시장의 음악을 마주하자 자꾸 울컥했다.
그림의 색채가 너무 고와서~
글을 통해 보이는 그의 생각이 아름다워서~
잘 어우러지는 음악이 가슴으로 다가와서~
영상을 통해 보는 그의 드로잉 모습과 제주생활이 멋져서
자꾸 자꾸 눈물이 났다.
전이수 작가는 이제 14세가 되었는데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엄마와 아들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사랑하는게 이수 작가의 그림에서도, 전시장의 영상에서도, 관람객들에게 남긴 엄마의 편지에서도 느껴졌다.
자꾸 생각하게 됐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포용적인 엄마인가, 나는 아이들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허용하는 엄마인가. 많아진 생각을 뒤로 하고 아트샵에 들렀다. 전시에 심드렁한 남편도 이번 전시는 좋았다며 마우스패드를 교환권으로 구매했다.
나는 내심 딸이 이수 작가의 그림책을 고르길 기대했다. 그림들도 너무 좋았고 소장하고픈 마음이 컸다. 우리딸은 결정에 신중한 편이라 너댓권 되는 책들을 계속 뒤적이며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재희야 어떤 책 사고 싶어?"
"글쎄요 잘 모르겠어서 다른 아이템들도 둘러보려구요"
아...더 기다려야겠구나.
한 7분쯤 지났을까. 딸이 고른건 스케치북이었다.
"재희야, 그림책 안 살거야? 오늘 그림 좋았잖아?"
"네, 이수 오빠 그림은 참 멋졌어요."
"그럼, 오늘 봤던 그림이 많이 수록된 '소중한 사람에게' 그림책은 어때?"
"저는 그냥 스케치북 사려구요."
"왜에?"
"그 그림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저는 제 그림책을 만들려구요."
아...
딸애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졌다. 딸애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미 잘하고 있는 남을 따라하라고 부추겼던 것 같아서다. 그런 한편 딸애의 생각에 감탄했다. 남의 그림도 멋지다고 인정하고, 자기는 자기만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는 느낌이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