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해는 피카소 탄생 140주년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같이 사는 우리 딸의 탄생 9주년이기도 했다. 갤러리 투어 좋아했던 엄마가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딸을 위해 일타쌍피 선물을 슈퍼얼리버드로 신청했으니, 바로 피카소 전이었다.
내 예상 시나리오는 완벽했다(늘 상상은 그렇지 아니한가). 딸이 오전 수업을 마치면 픽업해서 기분좋게 오월의 햇살을 맞으며 예술의 전당으로 향한다. 대중교통을 두번 갈아타야 하지만 1시간20분 쯤이야 (이미 내겐 다 컸다 싶은) 아홉살 딸과는 도란도란 대화 나누며 순식간에 지나갈 줄 알았다. 평일인데다 코로나 상황이니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고, 한적하게 미술관을 함께 거닐며 그림감상도 호젓하게 하고 돌아오면, 딸도 나도 넘 만족스런 데이트이리라.
현실은 늘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
1차 복선은 초등학교의 재량휴업일.
어린이날 부터 지금까지 쭉 집에서 놀고계신 어린이느님들. 텐션 높은 이 고객님들 덕에 이미 40대 엄마의 에너지레벨은 간당간당.
2차 복선은 오늘 아침폭우!
와~ 천둥번개에 미친듯 쏟아지는 1시간여의 바깥날씨를 보고 있자니 전의가 자꾸 새어나갔다. 둘째 유치원 데려다 주고 올때 이미 폭삭 젖어버린 탓도 한 몫.
3차 복선, 아니 이건 복선이라기보다 그냥 사건현장이었다. 예술의전당까지 여차저차 갔다.(그 사이의 많은 소소한 해프닝은 할많하않.) 한가람미술관으로 들어서기 전, 들려버린 한 엄마의 통화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어떡해, 큰일났어. 오전에 올걸 그랬나봐. 정말 일 났네."
우리가 사건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10분경.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든 생각은?
'와~ C, 대국민 눈치작전 대실패다!'
무슨 명절 놀이공원 줄 서듯이, 뱅글뱅글 눈앞이 어지러웠다. 온라인 티켓 예매자도 얄짤없이 줄 서야 한다. 굽이굽이 줄의 끝을 따라 2층 라운지까지 빽빽하게 뱀 모양으로 똬리를 튼 사람들. "1미터 간격 유지해주세요~" 라고 외치던 현장스태프가 불쌍해질 노릇이었다.
1미터 간격 유지하고 섰다간 4층까지 줄이 올라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1층 내려와서 안 사실인데, 매표소서 티켓팅하고 줄 서야한다!!! 스태프가 대신 잠깐 서 준덕에 얼른 티켓팅하고 돌아옴ㅠ)
덕분에 피카소 작품 관람하기 전에 오랜만에 사람구경 실컷했다.
내 기준에서 괜춘하다 싶었던 웨이팅 방식은 책을 가져온 사람이었다. 긴 줄에도 여유로운 느낌으로 책에 몰두하는 모습이 심히 부러웠다. 그 다음으론 애들 없이 혼자 오거나 취향 맞는 사람끼리 온 부류. 하아, 북새통에 멀리 앉혀놓은 딸 주시하랴 줄 따라 가랴 정말 여기 왜 왔지? 하며 있던 피카소에 대한 애정도 사라질 판이었다.
줄은 생각보단 빨리 줄어드는 편이었지만, 2차전은 입장해서 시작이었다. 온라인 도슨트 구입을 한 사람이 많아서인지 당췌 작품 앞에서 사람들이 비키질 않는다. 게다가 한가람미술관 1층 전시실은 오목하고 아늑한 느낌의 방들로 구성이 되어있어서 한적할 땐 모르겠지만 오늘은 병목현상이 지대로였다. 안내하는 분의 "자유롭게 관람하셔도 되요~~~" 라는 메아리에 힘입어 키작은 딸을 델고 상대적으로 한산한 작품 사이를 비 사이로 막 가듯이 관람했다.
나도 우아하게 차려입고 와서 여유롭게 도슨트 들으며, 천천히 산책하듯 갤러리를 거닐고 싶었다. 하필 난, 아홉살 딸의 생일 선물로 이 전시회를 택했고, 8월 말까지인 이 전시회의 오픈 완전 초기에 방문하는 우를 범했으며, 비가 온다는 핑계 하에 점심 이후에 도착 한 것이 큰 실수 아닌 실수였다.
스무살 때 파리에서 피카소 박물관 갔을 때랑은 정말 달랐던 오늘의 관람 소감.
1. 사후 140년이 지나도 다른 나라에서 열린 자신의 전시회가 대인기를 끈다는걸 알면 피카소의 기분은 어떨까?
2. 반 고흐가 살아생전에 이처럼 좀 유명했다면 어땠을까?(갑자기? 응...최근에 영화 '소울'과 '미스터 터너'를 연달아 본 탓이...)
3.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정말 피카소가 좋아서 온 걸까, 이 전시회에 방문한 자신을 포스팅하는게 기대되는 걸까?(벗어나지 못하는 1인 여기 추가요.)
4. 과연 이 전시회가 아홉살 딸의 생일선물로 적합한걸까? 괜히 피곤한델 엄마욕심으로 데려온건 아닐까?
5. 피카소의 작품세계는 그의 여성편력만큼이나 정말 넓고 깊었구나~ (작품과 그의 직업가치관, 예술혼은 존경! 사랑이라는 미명은 아쉽)
물론, 오늘의 내 소감은 엄청난 대 인파에 휩쓸려 극도로 피곤하고 예민해진 성깔에 덧대진 패브릭처럼 얼룩져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