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받은 밥상

by BreeZE


가끔 생각나는 밥상이 있다.


그 밥상 위에 놓여있는 반찬은 꼴뚜기젓과 곰삭은 총각김치와 함께 먹는 청국장이다.

꼴뚜기젓은 친구네 밥상에 있던 것이고

청국장과 총각김치는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네 집에 들르면 방 한편에 상보를 씌운 채 차려져 있던 키 작은 밥상이 있었다.

상보를 들추면 조그마한 그릇에 꼴뚜기 젓갈과 김치, 김 등이 소소히 담겨 있었다.

초등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서로의 집을 허물없이 드나들며 놀았다. 그러다 보면 그 집 반찬이 뭔지 빤히 알게 되고 서로 얻어먹기도 하고 나눠먹기도 했다. 그중 그 밥상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사실 밥상의 음식보다 친구 엄마가 건네시던 다정한 말들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항상 엄마와 둘이서 얘기를 할 수 없이 항상 분주했다. 이모, 삼촌들이 와 계시거나 4명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엄마는 늘 일을 하고 계셨다. 고추장을 만들거나 냄새나는 국간장을 끓이거나 큰 스텐 통에 켜켜이 배추들이 쌓여있기도 했다. 가끔은 아빠의 회사 분들을 집으로 초청해 교자상을 두세 개 연결한 기다란 초대상을 채우느라 분주하셨다.

난 엄마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엄마는 늘 바쁘셨다. 항상 시간이 없었다.

도넛을 튀겨주시고 누룽지를 기름에 튀겨 설탕을 묻혀 통에 담아두시고 고구마로 맛탕을 만들어 놓고 엄마는 시장에 다녀오겠다며 먹으란 당부와 함께 외출을 하셨다.

반면, 친구네 집은 늘 아늑했다.

원래부터 그 집이 그랬던 건 아니다.

그 집도 방이 위아래로 있는 큰 집이었는데, 친구 아빠가 집을 나가신 후로 친구네는 방 하나에서 친구의 엄마와 세 자매가 먹고 자며 늘 함께 있었다.

언제나 가도 이불이 깔린 아랫목에 친구 엄마가 계셨고

상보가 씌워져 있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밥을 먹었는지 물으셨다. 그러다 먹겠다고 하면 따듯한 밥을 주셨고

밥을 먹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주시고 내 얘기에 웃어주시던 기억이 참 좋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짭조름한 꼴뚜기 젓갈과 함께 오고 가던 대화 속에 느낀 정다움이었던 것 같다.

단짠이 교차하는.


또 하나 기억 속의 음식 청국장과 총각김치도 그랬다.

충청도 지역에 사시던 할머니는 방학 때면 할머니 댁에 가있던 손녀들의 끼니때마다 뭘 해줄지를 고민하시며 부엌으로 가시곤 했다. 아랫목에 누워 티브이를 보다 보면 밥상을 차려 들고 오시면서 "난 이런 것 밖에 못 해''하시며 웃으셨다.

쿰쿰한 냄새가 나던 청국장을 밖의 차가운 독에서 곰삭아 새콤하고 칼칼한 맛이 나지만 아삭 거리는 총각무와 함께 먹을 때면 늘 할머니는 맛있냐며 더 먹으라고 밥을 더 퍼주시곤 했다. 먹고 나면 할머니는 상을 물리시면서 귤이 가득 담긴 소쿠리를 주시며 또 먹을 것을 권하셨다.

그 귤을 까먹다 뜨끈한 방바닥에서 졸다 깨다 티브이를 보던 시간은 할머니와 함께 늘 기억 속에 함께 있다


어릴 적 먹던 음식의 맛은 유독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지금 다시 먹어보면 그때의 그 맛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맛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다시 먹고 싶다.


청국장을 먹는 날에는 늘 웃어주시던 돌아가신 할머니도잠시 기억해내고 꼴뚜기 젓갈과 김을 놓고 혼자 밥을 먹는 날에는 기억 속의 친구와 친구 엄마도 잠시 내 곁에 머물러준다


마음으로 받은 밥의 힘은 제법 세서 어른이 되어 위로받지 못하는 쓸쓸한 일과나 마음 상하는 일로 힘 빠지는 날에는 날 위로하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그 힘을 아는 나는 가족들에게도 음식으로 마음을 나누곤 한다. 아프다는 딸에게는 전복죽으로 도시락을 싸가는 남편에게는 돼지고기가 가득 든 김치찌개로 입맛 없어하는 아들에게는 치즈 가득 넣은 파스타로 내 사랑을 전한다.


마음으로 전하는 밥 한 톨 한 톨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어 따듯이 그들을 덥혀줄 수 있음을 알기에…


오늘은 오래간만에 꼴뚜기젓과 총각김치를 준비하고

청국장을 끓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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