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 라이프

따로 그러나 또 같이

by BreeZE


TV 프로그램 중에 '불타는 청춘'을 즐겨 본다.


예전 활동하던 연예인 중에서 활동이 뜸한 싱글들이 M.T를 가서 밥 지어먹고 얘기를 나누고 게임을 하는 구성이다. 매 번 한 명씩 새로운 사람이 추가될 뿐 거의 같은 형식이 되풀이된다. 내가 대학 시절 M.T 가서 놀던 것과 똑같아서 재미있게 보고 있다. 우린 거기에 덧붙여 술도 꽤 많이 마셨으니 하이라이트가 빠진 것 같은 느낌도 간혹 들지만 말이다.


처음엔 제목이 좀 싫었다. 청춘도 아니고 뭔가에 불타고 있는 열정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제목이 싫어서인지 볼 기회가 없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나와 학번이 같은 동년배의 얘기들을 듣다 보니 시대를 함께 보낸 이들끼리 통하는 정서나 얘깃거리가 낯설지 않고 동질감마저 들어 찾아보게 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지상파와 공중파에도 많고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고

이젠 개인 방송까지 흔해져서 그야말로 찾아보기에도 벅찬 지경이 되었다. 크리에이터란 직업이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상위에 오를 정도로 핫한 트렌드다.


방송국에서 틀어주는 것만 보다가 유튜브에 들어가 음악을 찾아 듣다 보니 내게 이것저것 권하는 영상들이 꽤 많단 걸 알게 됐다. 그래도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연예인도 아니고 검증되지도 않은 개인들이 올리는 콘텐츠가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딸이 먹방을 보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고 의아함만 들었다. 내가 먹는 것도 아니고 먹는 것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군침 삼켜가며 먹어야 하는지 이상할 뿐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이상함보다 강한 나는 곧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할머니 크리에이터도 계시고 상상초월의 먹방을 보여주는 이들도 많았다. 어린이 크리에이터도 있고 트랜스젠더, 동성 커플, 연예인, 자신이 구매한 명품을 소개하는 주부, 이색적인 개인 취미를 소개하는 사람, 자신이 번 돈으로 일궈가는 병원과 명차를 소개하는 의사, 전문 정보를 주는 전문가들. 요리사, 자신의 재능을 소개하는 예술가들..

정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방송을 켜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콘텐츠가 많은 이들에게 소개되고 구독이 늘어나면 크리에이터들은 광고로 수입을 얻게 되는 구조라고 했다.


유튜브에서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활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눈에 띈 건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공감과 소통으로 새로운 모습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호나 취향이 같기 때문에 더 쉽게 공감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개인의 취향이라는 건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저 이상한, 싫은, 맘에 안 드는 무언가로 불려지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끼리 꽤나 재미있게 대화하고 있었다. 간혹, 악플러들도 어느 그룹에나 껴있는 눈 치켜뜨는 친구처럼 눈에 띄게 활동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her’이 생각났다.

주인공은 남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지만 자신은 정작 부인과 이혼을 준비하며 시스템 안에서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와 사랑 아닌 사랑에 빠진다.

실제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조절하는데 어려움을 지녔지만 목소리로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 사만다가 자신의 의견에 예스나 노로 표현하지 않자 그는 회색지대가 존재하는 그녀와의 관계에 점점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빠져드는 그와 달리 다른 인간들에게도 호감을 표하던 사만다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한다. 남겨진 남자는 연인과 헤어진 아픔이 있는 친구의 방문을 두드리고 친구에게서 자신의 감정을 위로받는다.


불청을 보고 있는 내가 대학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처럼 남자 주인공도 가상의 그녀지만 자신이 이해받고 공감받는다는 사실에 점점 실제 연애 감정을 느끼며 빠져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투버의 크리에이터들이 보여주는 세상에 참여하는 것도 바쁘거나, 또 다른 이유로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대신해주면 대리만족이 채워지기에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의 취향은 너무 다양해졌고 확고해졌다.

양보를 배우기 전에 내 취향이 무엇인지 먼저 찾아내는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내 걸 포기하고 양보해가며 굳이 즐거움을 찾진 않는다.

전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신물물들은 혼자서도 내가 원하는 걸 찾고 만들고 듣고 보고 다양한 게임을 통하여 놀기까지 다 할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비슷한 취항을 가진 사람끼리 또 모여있다.


노는 방식이 달라졌지만,

결국엔 서로 간의 공감과 소통을 좀 더 진화된 기술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각자 소외된 삶 속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불 앞에서 춤추며 함께 나누던 원시인들의 놀이를 따로 그러나 다시 모여 또 같이 하고 있는 것 같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또 다른 불을 따로 피워 올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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