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꼬마일 때,
부엌으로 마당으로 정신없이 다니며 일하는 엄마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엄마는 사는게 재미있을까?'
어느날의 엄마를 보면 살림이 천직인 사람처럼
온 집안을 쓸고 닦으며 공을 들였고
또 어떤 날의 엄마는 켜켜이 쌓여있는 구석의 먼지를 지적하는 내게 '사는게 다 그렇다'며 못 본 체 하라셨다.
또 어느날은 당신이 아픈데 어느 가족도 아는체를 하지 않는다며 우울해했고
또 어떤 날은 무슨 얘기가 그리 재미있는지 수화기 너머의 상대와 아줌마들 특유의 유쾌한 웃음을 끊임없이 주고 받으셨다.
내게 남겨진 중년의 여인들의 세상은 그랬다.
조금은 어수선하고 조금은 정신없는..
그럼에도 더 강한 인상으로 남은 모습은,
적당히 과묵하고 점잖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던 엄마다. 비록 집에서는 남은 반찬을 긁어 큰 입으로 먹어대고 반찬이 짜다는 식구들의 조언에 당신의 입맛엔 딱 맞다고 억지를 부릴지언정 사람들을 대하는 엄마의 모습은 좀전의 퍼진 중년은 누군지 모른다는듯한 태도였다.
그 괴리감이 내겐 위선이나 내숭 정도로만 이해됐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흘러 어느덧 나도 그 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다. 누구도 내게 중년임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하루하루 절실히 느끼는 중년이다.
몸의 변화가 그렇다고 느끼게 한 것도 있다.
하지만,가장 절실히 느껴지는 때가 언제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난 나의 점잖은 척하는 태도라고 하겠다.
젊음이 빠져나가 쉬이 피로해진 내 몸은
번잡함을 싫어한다는 구실로 시끄러운 곳은 가지않는다. 시간과 함께 무뎌진 감성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둘러대며 무덤덤히 대한다. 상대하기 싫은 사람은 애매한 웃음과 적당한 대답으로 뭉퉁거려 대하고 만다.간혹 내 맘에 드는 누군가를 만나도 친밀해진 다음에 생길 불편함을 내세워 적당한 거리를 둔다.
아마도 멀리서 이런 나를 본다면 점잖고 교양있는 사람이라 오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점잖아지는 과정속에서
난 항상 무언가를 뺏긴 허전함도 함께 키워갔다.
그 허전함은 내 마음속의 진실보다 그냥 적당히 살기에 마땅한 기술을 쓴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한동안은 괜찮았다.
그런데 살살 마음속의 내가 묻는다
이렇게 잠잖게 살아도 되냐고..
이제 내게 남은 건 이 점잖음과 상실감의 괴리를 채우는 작업이다.
그게 무어라도 좋을 것 같다.
내 가슴이 재미있어할 그 무엇이라면 말이다.
이젠 젊을때의 나보다
더 '나'로 살고싶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