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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Nov 10. 2023

빼빼로 데이의 쓴 맛

그것은 열두 살 인생 최대의 비극이었다

 초딩인 내가 하던 사랑은 모두 짝사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애가 나를 좋아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애만 좋아했다. 이미 경쟁률이 치열한 걸 알기 때문에 고백은 당연히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한 명의 팬으로서 우리 반 인기남이 축구하는 걸 지켜보거나, 수업 시간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따금 훔쳐볼 뿐이었다.


 그나마 일 년 중에서 가장 용기가 생기는 때는 발렌타인 데이와 빼빼로 데이였다. 다만 발렌데인 데이는 방학 중이라 친구들을 만나기 어려우므로, 빼빼로 데이를 잘 써먹어야 했다. 나에게 빼빼로 데이는 유일하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날이었다. 입 밖으로 "좋아해"라고 내뱉는 건 어쩐지 부끄럽고 부담스럽지만, 빼빼로를 주는 건 부담이 덜했다. 왜냐면 인기남은 어차피 나 말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빼빼로를 잔뜩 받을 테니까. 그러면 내 마음을 적당히 표현하면서도 튀어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열두 살의 빼빼로 데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튀어 보이는 건 부끄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또 남들과 같아 보이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빼빼로만 살 때, 나는 빼빼로와 함께 예쁜 포장지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특한 생각이었다.


 포장지를 사기 위해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문방구에 갔다. 구석에 있던 골판지에 눈길이 갔다. 각진 골판지로 포장하고, 빼빼로가 보이도록 가운데를 뚫어 투명지로 덧댄 후, 마지막에 리본을 다는 상상을 했다. 완벽한 시뮬레이션이었다. 시뮬레이션대로 우선 골판지를 골랐다. 내가 봐왔던 하트는 늘 정열의 빨간색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상징적인 의미로 빨간색을 골랐다. 다음으로 골판지를 예쁘게 감쌀 리본을 골랐다. 많은 리본 사이에서 찬란함을 뽐내던 은색 리본으로 골랐다. 그리고 집에 와서 상상대로 포장했다. 예쁘게 포장된 빼빼로에 스스로 거듭 감탄했다. 내일이면 내 빼빼로는 수많은 평범한 빼빼로들 사이에서 빛이 나겠지!


 다음 날, 학교는 시끌벅적했다. 우정의 의미로 빼빼로를 주고받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내게는 그런 날이 아니었다. 오늘만큼은 우정을 넣어두고 사랑을 챙기는 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서 그 애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내 빼빼로를 소중히 들고 그 애에게 걸어갔다. 복도는 온통 난장판이었지만, 나는 그 애만 보였다.


 드디어 내가 포장한 빼빼로를 그 애의 손에 건넸다. 건네기가 무섭게 친구들이 달려들며 그 애를 둘러싸는 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어떤 애가 "와! 짱이다!"라는 말을 꺼냈고, 나는 점점 그 애와 멀어졌다. 그 애의 입에서는 어떠한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된 나는 기웃거리며 그 애의 표정을 보려고 했다. 친구들 틈으로 보인 그 애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기뻤다. 그 애가 만들어 낸 미소의 한 조각으로 보상은 충분했다. 역시나 내 빼빼로는 빛났다.


 그러나 몇 시간 뒤, 비극이 나를 덮쳤다. 그것은 열두 살 인생 최대의 비극이었다. 나는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 애가 내가 준 빼빼로를 다른 여자애한테 건네고 있는 것이었다. 빨간색 골판지에 은색 리본을 단 빼빼로는 누가 봐도 내 빼빼로였다. 그 여자애는 크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쫑알거리며 내 빼빼로를 아무렇게나 들고 있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포장한 그것은 내게 빼빼로 이상의 의미였다. 나는 그 애와 사귀고 싶다거나 어떠한 화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저 그 애를 좋아하는 소중한 마음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을 뿐이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상관없었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하는 게 내 맘인 것처럼, 그 애도 다른 사람을 좋아할 자유가 있으니까. 그런데 내 마음을 자신의 것인 양 속이는 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애의 마음이 아니었다. 명백한 나의 마음이었다.


 다음 날, 나는 참담함을 그대로 가지고 학교에 갔다. 삶에 의욕이 없었다. 이제 누구도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여느 때처럼 남자애들이 축구를 했지만, 더 이상 관전의 재미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에 아주 조금이나마 고소한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좋아했던 그 애가 어제 다른 여자애한테 빼빼로를 주면서 고백했는데 차였다는 것. 그 애도 차였다니 쌤통이었고, 다행이었다. 그 마음은 가짜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포장한 빼빼로를 받고도 거절을...? 애꿎은 내 빼빼로가 불쌍했다.



사진: UnsplashAmerican Heritage Choc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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