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은경 언니는 귀 뒤로 구불거리는 긴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일부러 뽑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곳곳에 흰머리가 보였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고, 살짝 팬 두 볼은 늘어진 모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언니는 서리힐의 비스트로에서 보조 셰프로 일한다고 했다. 그제야 언니를 잊고 지냈던 10년의 세월이 실감 났다.
“뭐, 그냥 지냈지.”
나는 막 나온 호주식 브런치 접시를 보며 말했다. 달걀물을 묻혀 구워낸 식빵 위에 으깬 아보카도와 수란이 올려져 있었다. 한국에서 본 프렌치토스트보다 훨씬 두꺼운 식빵이었다. 나는 토스트 위에 올려진 이름 모를 작은 보라색 꽃을 포크 끝으로 뒤적거리며 이 꽃도 먹는 거냐며 언니에게 물었다. 먹어봐. 언니는 웃었다.
“호주는 커피가 진짜 맛있어. 실컷 마시고 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언니는 그런 나를 보며 한 번 더 웃었다. 높은 천장 위로 듣기 좋은 정도의 소음이 모여들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일주일이면 시드니를 구경하기엔 충분할 거야.”
정확하게는 엿새 정도 이곳에서 연말을 보낼 예정이었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12월의 호주는 여름이라 짐도 거의 없었다. 다만 문득 은경 언니가 보고 싶었다.
“걱정 마. 나 혼자 사니까.”
언니는 막 나온 플랫 화이트를 한 모금 들이켜며 웃었다. 언니의 작은 손에도 쏙 들어올 만큼 작은 커피잔이었다.
“진작에 한 번 봐야 했는데, 그치?”
입에 묻은 우유를 살짝 닦아내며 언니는 말했다.
언니에게 연락을 한 건 그야말로 10년 만이었다. 우리는 같은 빌라의 위, 아래층으로 만났다. 대학교 2학년을 코 앞에 둔 2월이었다. 신입생 전용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야 해서 나는 학교 근처로 집을 찾고 있었다. 기왕이면 밥도 차려주는 하숙집이면 더 좋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바로 은경 언니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하숙집이었다.
“딱 방 하나가 남았는데, 반지하예요.”
1층 공용 부엌에서 밥을 먹고 있던 은경 언니가 전화를 받는 주인아줌마를 대신해 말했다. 작은 체구와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 대충 질끈 묶은 까만 머리칼의 언니는 스물여덟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방은 세로로 길게 뻗은 구조였다. 문을 열자마자 침대의 머리 쪽이 발로 차일 만큼 좁았는데, 희한하게 창문은 방 크기에 비해 너무 컸다. 방 안쪽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작은 화장실에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진하게 났다. 사방은 흰 바탕에 옅은 살구색 꽃무늬가 잔잔하게 흩뿌려진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지만, 촌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저도 이 방을 썼었어요. 스무 살 때.”
은경 언니의 그 한마디에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곧 방을 계약해 버렸다. 방이 좋았다기보다는 언니가 좋았다.
2~3층짜리 주택들이 나란히 높이를 맞추어 늘어선 거리에 어느새 붉은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제법 시원한 바람도 불었다. 언니의 집은 레드펀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먼트였다. 거실은 상아색 패브릭 소파와 원목의 둥근 티 테이블만으로도 이미 공간이 가득 찰 정도로 작았지만, 곳곳에 크고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어 답답하기보다는 아늑했다.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친 후에 언니와 함께 호주의 인기 리얼리티쇼를 보다가 소파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다. 식탁 위에는 출근 전에 언니가 준비해 둔 바나나와 요거트, 단호박과 체다치즈가 듬뿍 들어간 사워도우 빵이 먹기 좋게 썰어져 있었다.
<냉장고에 탄산수랑 주스 있으니 꺼내먹어. 커피는 나가서 마시고.>
언니의 카톡을 확인한 건 식탁 위의 음식을 모조리 먹어 치운 뒤였다. 구글맵에서 근처의 카페를 찾다가 생각보다 오페라 하우스가 멀지 않아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서큘러키 쪽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트레인을 타고 T8 노선으로 세 정거장쯤 이동했다. 서큘러키 역에서 바로 내리려다가 보태닉 가든이 보고 싶어 일부러 한 정거장 먼저 내려 공원을 둘러 갔다. 오후 두 시를 넘긴 때라 너무 더운 것을 제외하면 완벽한 산책이었다. 공원을 가로질러 십 분쯤 걷자 오페라 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조개껍데기를 겹치듯 세워놓은 모양의 바로 그 오페라 하우스. 두드리면 깨져버릴 듯이 쨍하게 새파란 하늘 위로 볼록한 흰 구름이 보기 좋은 무늬를 만들었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갈매기들이 머리 위를 정신없이 날아다녔고, 광장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느라 바빴다. 오페라 하우스로 이어진 방파제 쪽으로는 고급 카페와 식당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찾아 두었던 카페는 내부가 이미 만석이라 할 수 없이 야외 테이블이 비어 있는 곳을 찾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빠를 본 건 바로 그때였다.
처음엔 아빠인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시드니였으니까. 아빠는 짙은 남색의 얇은 등산바지 위에 회색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버 브리지 쪽을 향해 양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배를 조금 내밀듯 뒷짐을 지고 선 채였다. 일 년 만이었다. 튀어나온 이마와 살짝 휜 크고 긴 코, 하얗게 센 아빠의 구불거리는 머리칼까지.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나는 아빠를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사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고, 서버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쉬지 않고 나에게 무어라 말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아빠를 놓치고 말았다. 아빠가 있던 곳에는 스무 명 남짓한 관광객 무리만 요란하게 줄을 지어 지나갔다.
아빠는 일 년 전에 갑자기 떠났다. 말도 없이. 나는 그즈음 너무 바빴다. 다니고 있던 영상 제작사에 외주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였다. 야근은 기본이었고 집으로 돌아와 남은 작업을 마무리하다 보면 서너 시간 겨우 눈을 붙이는 일이 일상이었다. 왜 하필 그럴 때였을까. 아빠가 떠난 건.
(2편에서 계속)
© 사진: Unsplash의Andreas Rasmus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