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나는 그냥 달렸다
“할머니, 저기요.”
다행히 노파는 멀리 가지 못했고, 잠깐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나를 알아본 듯했다. 노파의 손목에 걸린 비닐봉지가 바람에 펄럭였다. 어쩌면 비닐봉지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오늘도 지하 주차장 한 바퀴 돌고 오신 건가요?”
이번엔 조금 놀란 눈치였는데, 노파는 비닐봉지를 다른 쪽 손으로 쥐어 구기며 말했다.
“주, 주차장? 아휴. 나도 알아이. 조심헌다고 허는디 젊은 사람들 보기엔 위험해 보이지?”
노파는 어제의 그 건조하게 균열된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할머니. 그게 아니라요. 혹시… 주차장에서 금지 콘 같은 거 본 적 있으신가 해서요.”
노인은 걸음을 옮기려다 주춤거리며 나를 돌아봤다.
“아, 주황색 고깔콘처럼 생긴, 주차하지 말라고 놔두는 그런 거 있잖아요. 이만한 크기고요. 혹시 보신 적 있으세요?”
노파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목을 쭉 빼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금지 콘 이미지를 검색하여 노파에게 보여주었다. 노파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내리쬐는 햇볕 때문일지도 몰랐다.
“본 적 있는디. 그게 콘이여? 난 그게 뭔가 했네. 아가씨가 둔 거이?”
“할머니가 치우신 거 맞죠?”
나는 노파의 얼굴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애써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했지만 나 역시 인상이 찌푸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나야 만날 치우지. 사람들이 참 웃겨. 주차장에 온갖 걸 다 버리고 가. 오늘은 애들 갖고 노는 찰흙 같은 그를 상자때기에 다 버리고 갔더라고. 그건 무거워서 봉지에 넣을 수도 없어서 그냥 왔어이. 근데 아가씨, 그건 왜 물어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겨?”
이렇게 또 일이 꼬여버리다니. 관리소, 건설사, 그리고 노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할머니가 주차장에서 치우신 것 때문에 저한테 문제가 좀 생겼어요.”
노파는 굽어 있던 어깨를 펴며 몸을 바로 세웠다. 마치 누군가가 노파의 긴 목을 정수리 쪽으로 뽑아 올린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여. 난 오늘 아무것도 치운 게 없어이? 오늘은 그냥 왔다니께요. 이봐요. 비닐봉지에 아무것도 없잖여이.”
노파는 손에 쥐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게 보이며 말했다. 움푹 팬 노파의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 내일쯤 저랑 이야기 좀 하실 수 있으실까요? 몇 동 몇 호세요? 일단 어디 사시는지 좀 알려주세요. 저는 107동 503호예요. 저기. 관리소 바로 뒷동이요.”
노파는 비닐봉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더니,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말했다.
“저어기. 104동 살아이. 202호.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만. 그러든가 해요이.”
처음과는 달리 어딘가 많이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노파와 헤어진 후, 다시 관리소로 향했다.
관리소에 도착하자, 어제 보았던 남자 직원이 나를 아는 체하며 인사했다. 그 옆엔 진회색 작업복을 입고 컴퓨터 화면을 보며 앉아 있는 퉁퉁한 사내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아마도 그가 관리소장인 듯했다.
“소장님, 그, 주차장….”
직원의 말에 관리소장은 억지로 얼굴에 진 주름을 펴려는 사람처럼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아, 예. 거기 좀 앉으시죠.”
나는 초록색 펠트지가 동그랗게 깔린 원형 테이블을 앞에 두고 엉덩이를 반쯤 의자에 걸쳐 앉아 말을 꺼냈다.
“금지 콘은 주차장 드나드시는 그 할머니가 치우신 것 같던데…. 제가 방금 그 할머니랑 잠깐 얘기 나눠봤거든요.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그건 그렇고 다른 상황은 어떻게 돼 가고 있나요?”
소장이라는 남자의 얼굴은 혈색 하나 없는 잿빛에다 입술은 다 부르터서 각질이 하얗게 일어나있었다. 그는 관자놀이 쪽에만 유독 집중된 흰머리를 양 손바닥으로 비벼대며 말했다. 할머니까지 끼어 있다는 말에 놀란 눈치였다.
“아…. 그 할머니까지 관계된 건 몰랐네요. 혹시 건설사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기 전에 상대에게 생각을 떠보는 것은 흔히 상황을 보고 적당히 넘어가길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나는 다시금 이런 골치 아픈 심리전에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에 화가 났다.
“서로 책임 없다는 말만 하죠. 어쨌든 저는 관리소든 건설사든, 차량 피해에 대해 보상이나 빨리 받고 치우고 싶네요.”
시설 주임이 그런 나를 향해 멋쩍게 웃으며 커피 한 잔을 건넸다. 나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종이컵에는 ‘당신을 응원해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일이 좀 복잡하게 됐지요. 주차하셨던 그 자리는 사실 한 달 전부터 천장 누수가 있었는데, 건설사에서 보수 작업을 해주겠다, 해주겠다, 말만 하고 미루더니 결국 입주민께서 피해를 보시게 돼서. 참….”
소장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원형 테이블로 와서 앉으며 말했다. 남자에게서 역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사이 잠깐 나갔다오더니 한 대 피우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건설사 쪽에선 관리사무소의 관리 소홀 책임이 있다고 하던데요. 금지 콘 설치도 본인들이 해 둔 거라고.”
“어? 아닌데요. 금지 콘 그건 저희가 둔 건데.”
쓰레기통에 새 비닐을 끼워 넣고 있던 시설 주임이 기다렸다는 듯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건설사에선 자기네들이 했다던데요? 그래서 자기네는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나는 주임과 소장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소장은 입속말로 무어라 중얼거렸고, 시설 주임은 나와 소장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나는 커피가 든 종이컵을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놓고 나왔다.
그날 저녁은 덥고 습했다. 창문을 사방으로 활짝 다 열어놓아도 소용없었다. 주차장 사고 이후로 며칠째 달리기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가는 것은 달리기를 하지 못한 탓일지도 몰랐다. 얼른 러닝 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불운을 따돌릴 수 있는 속도, 6분 페이스. 오늘은 어떻게든 그 속도 이상으로 달려야 했다.
8시가 넘은 시각이라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아파트 단지를 돌며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다녔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흙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나는 관리사무소를 지나 101동 출입구 앞에 섰다. 이곳에서 시작하여 아파트 단지를 크게 돌면 대략 500m 정도의 코스로 달리기가 가능했다. 스마트워치의 ‘운동 시작’ 버튼을 눌렀다. 3, 2, 1. 3초의 카운팅 음이 울렸다.
여든이 넘은 노파가 단순히 건강 유지를 목적으로 매일 지하 주차장을 도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볕을 쬘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공기도 좋지 않고, 아파트 단지 내의 우레탄 바닥과는 달리 지하 주차장의 바닥은 딱딱한 시멘트여서 무릎이나 허리에도 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남편이 세상을 뜬 후로 매일 그곳에서 쓰레기까지 줍는다는 점은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의미라는 게 그렇지 않나. 무슨 일이든 의미를 갖다 붙이면 대부분은 이해 가능한 것이 된다. 노파에게 지하 주차장에서 쓰레기를 줍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 그런 생각이 이어지던 중에 스마트워치에서 알람이 떴다. 1km 지점 통과. 6분 9초 페이스였다. 좀 더 속도를 내야 했다. 습한 날씨 탓에 호흡하기가 힘들었지만 나는 상체를 좀 더 내밀고 보폭을 늘렸다. 러닝에서는 조금만 속도를 올려도 온몸의 근육이 급격하게 피로해진다는 것을 알지만, 오늘은 조금 무리해서라도 6분 페이스를 넘어서야만 했다. 이따금 오른쪽 슬개골 쪽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계속 달려야만 했다. 조금만 더 달리면 될 것이었다.
5km 지점 통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비볐다. 온통 땀 범벅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침을 삼키기 어려워 거칠게 호흡을 내뱉자 가슴을 긁는 듯한 통증과 함께 온몸의 땀구멍이 열릴 것만 같은 작열감을 느꼈다. 나는 스마트워치 화면을 확인했다. km당 5분 53초. 목표 달성. 그러나 여전히 개운치가 않았다. 달리기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는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누웠지만,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까지 시원하게 비가 내렸다. 하지만 꿈속의 나는 여전히 역풍을 맞으며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좋게 좋게 해결해. 할머니 상대로 뭘 얼마나 하겠어.”
한희의 말은 묘하게 내가 별 것 아닌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당해 봐야 알아. 누군들 좋게 해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딨니?”
나는 집에 가방만 던져놓고 바로 노파의 집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고도 한동안은 인기척이 없었다. 현관문 틈으로 귀를 대어 집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던 찰나에 노파가 인터폰을 통해 나를 확인했고, 잠시 뒤 문을 열어주었다. 노파의 앙상한 팔뚝에는 검버섯이 가득했다.
“뭔 일이여. 그 아가씨 아녀.”
노파는 아래턱을 우물거리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노파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는 특유의 그 기괴한 걸음으로 느릿하게 거실로 향하더니, 나를 보고 앉으라 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빛이 어둑한 거실에 적당한 조도를 만들고 있었다. 거실 한 가운데에는 오크나무 재질로 보이는 작은 소파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리모컨과 수북한 약봉지가 올려져 있었다. 네이비색의 낡은 가죽 소파 하나가 거실의 나머지 공간을 겨우 채우고 있었다.
“할머니,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리고 갈게요. 그 주차장 일 때문인데요. 주차 금지 콘을 누가 치우는 바람에 제 차 천장이 엉망이 됐어요. 그거 할머니가 치우신 거 맞죠? 맞다, 아니다만 말씀해주시면 돼요. 그 이후의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나는 노파가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이 너무 빨랐나. 다시 천천히 설명해야 할까. 노파마저도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계속 내뺀다면 어떡해야 하나. 그 순간, 노파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려 말했다. 부엌의 가스레인지 앞에 선 채였다.
“아가씨, 나는 참말로 그게 뭔 일인지 몰러이. 아가씨 말대로 알아서 처리해요이.”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이 보리차 같기도, 옥수수 차 같기도 했다. 노파는 식탁에 두 손을 짚고 서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어쨌든 차가 그래 됐다니 미안해서 어쩐다이.”
노파는 다시 가스레인지 쪽으로 뒤돌아서며 말했다. 불을 끈 후, 마른 헝겊을 냄비 뚜껑에 올려 손으로 그 부분을 잡아 뚜껑을 열었다. 냄비의 김이 노파의 얼굴 가까이까지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그 뒷모습이 마치 안개가 가득 낀 곳에 갇힌 사람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노파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파는 그릇에 있던 물을 종이컵으로 옮겨 담고는 나에게 건넸다.
“뜨끈한 보리차여. 이거나 한 잔 마셔요이.”
노파는 거실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겨 앉더니 무릎을 문지르며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었다. 더 이상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노파에게 가보겠다는 인사를 했지만, 노파는 여전히 무릎만 문지르며 말이 없었다. 잠깐 고개를 끄덕인 듯도 하여 나는 노파에게 받은 종이컵을 쥐고 집을 빠져나와 관리소로 향했다. 종이컵은 금세 눅눅해졌다.
“CCTV 확인을 해 봤는데, 그날 이사를 나가는 세대가 있었어요. 그 집에서 부른 이삿짐센터 직원이 금지 콘을 옮겼더라고요. 잠깐 치워놓고는 짐 싣고 그냥 가버린 모양이에요. 거참. 하하.”
관리소장은 원한다면 CCTV를 보여줄 수도 있다며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오해 받으실 만했죠. 이참에 할머니도 좀 마음을 바꿔 먹으시면 좋겠어요. 계속 이러다 진짜 사고라도 나면 그거는 뭐, 아이구. 끔찍하죠. 천장 누수 이거는 그에 비하면 별일도 아닙니다. 아, 오신 김에 커피나 한잔하시고 가세요, 입주민님.”
아아. 맥이 탁 풀렸다. 나는 관리소에서 나와 아파트 벤치에 앉아서 부르튼 입술만 뜯었다. 노파를 의심했던 것, 그리고 그 의심이 곧 확신으로 바뀌어 저지른 무례함까지 더해져 마음이 불편해졌다. 자전거며 킥보드를 타는 꼬마들이 까르르 소리를 내며 놀이터 주변을 한 바퀴 돌다가 가로등마다 내려진 그림자를 밟고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뉴스에서는 며칠 전 쏟아진 폭우로 일가족 세 명이 침수로 사망했으며, 감전사나 실종 사고도 잇따르고 있다는 보도가 떴다. 두유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고 출근 전에 조금 서둘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노파는 오늘도 비닐봉지 하나를 손목에 걸고 지하 주차장을 돌고 있었다.
“할머니, 어제는 불쑥 찾아봬서 죄송했어요. 죄송하다는 말씀드리려고….”
노파는 입술을 비죽하게 오므린 채 눈을 치켜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나마 인사를 드렸으니 이걸로 됐다, 최소한의 예의는 다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올라가려는데 노파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내가 왜 여길 이렇게 돌아다니는 줄 알어이?”
“예?”
“아가씨도 그것이 궁금했을 거 아니여이? 저 노인네는 왜 여길 돌아댕겨서 여러 사람 골치를 썩이는 건가. 맞지이? 내 말이?”
노파는 웃고 있었다. 입가의 자글한 주름이 잔잔한 호수의 물결이 퍼지듯 서서히 노파의 얼굴 전체로 퍼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팽팽하게 긴장된 젊은이의 얼굴과는 다른, 나는 문득 세월이 만든 노파의 얼굴에서 묘한 이완감을 느꼈다.
“여서 쓰레기를 줍다 보면 참 이상한 것들이 참 이상한 곳에 떨어져 있어이. 언제는 양말 한 짝만 누가 버려놓고 가기도 허고, 또 언제는 멀쩡한 우산이 며칠이나 이래 그대로 펼쳐져서 있기도 혀이. 물건만 그른가이. 아가씨처럼 멀쩡하고 예쁜 사람이 차 뒤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것도 봤어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출근하는 차들이 연이어 우리 옆을 지나갔다.
노파는 손목에 걸고 있던 비닐봉지를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연두색 껍질에 든 청포도 사탕이었다.
“오늘은 이것들을 주웠어이. 봉지도 안 뜯은 거이 지난주부터 떨어져 있던건디 여태 안 가져가서 내가 치웠어이.”
노파는 손짓으로 어서 가보라 했다. 나는 노파가 준 청포도 사탕을 주머니에서 굴리며 건너편 블록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는 노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ㅅ 보리차얻어먹음걸로 모자라서 사탕까지 받아온거야?>
통화가 어렵다는 한희는 오늘도 어김없이 치열하게 바빴고, 카톡 하나만 덜렁 보내고선 또 오랫동안 답이 없었다. 한희는 앞으로도 쭉 오타가 남발하는 카톡을 보낼 것이고, 툭 하면 전화를 끊어 버릴 것이다. 이유도 모르는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옆에서 밤을 새우고, 밤을 새운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밥 한 숟갈을 떠먹다가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고 저도같이 엉엉 우는 일. ‘엄마’가 되어 살아보는 엄청나게 의미 있는 일이란, 그런 것들을 그냥, 그냥 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냥 달렸다. 바람이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느낌. 그 느낌 하나만 생각하면서. 그냥 달렸다. 시간도, 거리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곤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파 위에 드러누워 연신 하품을 해댔다. 차는 내일 오전에 바로 공업사에 맡겨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이 쏟아졌다. 이런 건 참 오랜만이었다. (끝)
© 일러스트: Unsplash의Esma melike Sez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