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약을 먹었습니다
꽤 예전, 그러니까 2000년대 중반 쯤에 핸드폰을 충전하다가 '너는 왜 핸드폰을 그렇게 충전하냐?'고 한 소리 들어먹은 적이 있다. 핸드폰 충전하다가 갑자기 날벼락 맞은 꼴이었지만 이유가 궁금해서 꾹 참고 물어봤더니 사용하면서 충전하거나 방전 전에 충전하면 배터리 수명이 짧아지니까 완전 방전 후에 충전하라는 거였다.
그래서 이후 그 말대로 했다. 그런데 몇년 후에 또 똑같이 한 소리를 들었다. 너어어는 왜 핸드폰을 그렇게 충전하고 앉아 있냐? 이번엔 가만있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배터리 수명이 오래 간다던데요?"
"야 언제적 얘길... 그건 니카드(니켈-카드뮴) 배터리 시절에나 그런거고 요즘 핸드폰들은 리튬이온 배터리라 완방시키면 금방 죽어"
덕분에 나는 니카드 배터리가 뭔지도 모르고 니카드와 리튬이온 배터리 차이도 모르는데 삼엽충이 번성하던 시절 얘기를 하는 인간이 되었다.
니카드 배터리나 리튬이온 배터리나 에너지를 충전했다가 필요할때 쓴다는 점에선 기능적으로 동일할지 몰라도 소재가 다르고 그로 인해 충전과 방전의 방식도 약간 차이가 있다. 그로 인해 니카드와 리튬이온 배터리가 서로 다른 특성과 장단점을 가지는 것이다.
사실 약의 경우도 그렇다. 통증을 줄여주는 효과를 가진 진통제도 이부프로펜 계열의 진통제냐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의 진통제냐에 따라 몸에서 작용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로 인해 부작용(side effect)도 차이를 보인다. 이부프로펜은 위에 부담을 주고 아세트아미노펜은 간에 부담을 주기에 술을 마신 상황에서 진통제를 먹어야 하는 경우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은 피하라고 하는 것이다.
배터리라고 해서 다 같은 배터리가 아닌 것처럼 진통제도 다 같은 진통제가 아니고 피임약, 위장약, 고혈압약 등 다른 모든 약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의학이나 약학 근처에 갈 일도 없는 일반적인 소비자 입장에선 이 차이를 알 수 없다. 물론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검색을 하면 뭔가 설명은 나온다만 단어조차 익숙하지 않아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약이 우리 몸이 미치는 영향은 핸드폰 배터리와 비할바가 아니지만 정작 우리는 약의 정확한 이용방법을 모른다. 물론 핸드폰은 1년 내내 끼고 살지만 약은 필요할 때만 먹으므로 모를수 있긴 하나 그 미지의 영역이 일반 소비자에겐 너무나도 넓다. '식후 30분, 하루 3번'은 약의 복용에 있어 국룰이라 불러도 무방한 확고한 가이드라인이긴 하나 이건 조금만 예외가 생겨도 혼란을 낳는다. 예를 들어 현대에는 아침을 거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럼 하루 2번만 먹어도 되는가? 점심때 약 먹는걸 깜빡 했으니 저녁때 몰아 먹어도 되는가? 약을 내가 임의대로 쪼개 먹어도 괜찮은가?
페이스북 친구이신 박한슬님께서 쓰신 [오늘도 약을 먹었습니다]는 바로 약을 먹는 소비자 입장에서 알아야할 약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들은 우리가 자주 먹는 의약품이 어떤 방식으로 몸에서 작용을 하며 새로운 약은 전과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무엇이 다른지, 또 각각은 어떠한 부작용이 있는지를 같이 설명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적 특성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약에 관한 책 중에서 질병에 대한 약의 기전과 발전을 다룬 [신약의 탄생]과도 연관성이 높은 편이다.
다만 이 책은 소비자 친화적이고 실용적이다. 사람들이 주로 소비하는 진통제, 피임약, 무좀약, 알러지성 비염, 고혈압약, 당뇨병약, 백신 등에 대해 무엇을 조심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며 무엇이 오해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실상의 복약지도를 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강점을 꼽으라면 비유를 통한 알기 쉬운 이해와 위트다. 이 책은 비유와 위트 있는 농담을 많이 섞어서 읽는 사람이 의학, 약학을 몰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눈높이를 낮췄다. 개인적으로 감탄한게 바로 이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도 언급한 진통제인 아세트아미노펜은 술을 마실 때는 복용하지 말 것을 권하고 굳이 진통제가 필요한 상황이면 이부프로펜 계열의 진통제를 복용할 것을 보통 약국에선 권하고 있다. 이게 왜 그런지를 설명하는 내용들은 '술과 함께 먹을 경우 아세트아미노펜이 간에서 분해될때 독성 물질이 블라블라' 로 얘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도 약을 먹었습니다]는 이걸 뭐라고 하냐면 공중화장실에 비유한다. 아세트아미노펜과 술을 같이 섭취하면 알콜이 변기를 모두 점령해버려서 아세트아미노펜이 들어갈 칸이 없다는 거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선 아무리 신사라도 똥을 지릴 수 밖에 없는데 아세트아미노펜 또한 이때 NAPQI라는 매우 독한 똥을 지린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 똥이 간손상을 유발하며 심할 경우 황달과 함께 의식 혼미, 간 조직의 괴사까지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웃긴 비유다.
원래 비유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바꿔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이해가 쉽긴 해도 그 이해한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는 이게 단점이 되지 않는다. 약을 먹기 위해 약의 기전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기를 사용할 때 알아야 할 것은 사용설명서지 구동 방식과 원리가 아닌 것과 같다.
약에 관한 교양서가 국내에 그리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오늘도 약을 먹었습니다]는 약에 관한 좋은 교양서이자 약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필요한 복약지도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걸 매우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게 보기보다 어렵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었던 시기에 [신약의 탄생], [인류의 운명을 바꾼 약의 탐험가들], [인류에게 필요한 11가지 약 이야기], [면역에 관하여]를 같이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서 같이 보면 좋을 만한 책으로는 [신약의 탄생]과 [면역에 관하여]를 추천하고 싶다.
[신약의 탄생]은 이 책보다는 난이도가 좀 있으나 인류가 직면한 주요 질병들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 약물이 개발되고 발전해나가고 있는지를 다루는 점에서 질병과 약을 이해하기에 좋고 [면역에 관하여]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바이러스와 백신, 면역에 대해 의학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부분까지 같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 두 책은 나중에 따로 정리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