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담론에서 빠져 있는 전제
PGR에서 마이클 센델의 새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능력주의에 대한 주제로 글이 하나 올라왔고 거기에서 내 책 멀티팩터의 내용을 인용하여 소개한 모양이다. 친구로부터 제보 받아서 읽게 되었는데 본문에 내 책에서 인용한 월령효과에 대한 설명이 나오므로 저자로서 따로 능력주의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먼저 능력주의(Meritocracy)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을 말하는데 능력에 따라 더 많은 기회를 받아야 하고 그 능력이 개인이 투입한 결과물이기에 능력으로 얻은 결과물 또한 개인이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고 타당하지만 현대에 들어 경쟁이 워낙 치열해지면서 오히려 경쟁강도를 낮추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꼽힌다.
능력주의에 대한 담론은 노력에 대한 담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능력주의를 내세우는 주장은 '나의 능력은 모두 내 노력으로 쌓은 것이므로 내 능력은 보상 받아야 하고 능력을 통한 보상은 보호 받아야 한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것이 공정에 대한 주장의 핵심요소가 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 주장은 개인의 능력에 있어 노력 외의 다른 요소의 영향을 부정하는 발언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다른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면 보상의 독점과 보호를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한번 검증해보자. 개인의 능력과 노력은 측정하기가 매우 모호하다는 현실적 한계가 존재하지만 세상엔 극한의 능력과 능력이 충돌하고 경쟁하는 곳이 있긴 하다. 바로 프로 스포츠 시장이다.
프로 스포츠 중에서도 축구는 전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산업이 구축된 종목이다. 연령대별로 리그가 설립되어 있고 이 유스팀에 들기 위해선 스카우터들의 눈에 들어 입단해서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노력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이 유스 클럽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증명해야 그제서야 성인팀으로 콜업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축구에서 프로 레벨은 그 재능과 능력을 증명한 선수만 이를 수 있는 곳이다. 프로 레벨에서 재능파/노력파를 구분하는게 무의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로 레벨에 들어선 순간 이미 재능과 능력을 증명한 셈이고 그런 재능이 매년 새롭게 등장하기에 노력이 없다면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프로 축구야 말로 능력과 보상 논리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능력과 능력이 충돌하는 곳에서 조차 다른 요소가 영향을 미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월령효과(Relative age effect)'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를 통해 소개되면서 대중들 사이에 유명해진 개념으로 유소년팀의 선수 선발에 있어 선수선발 기준일에 가깝게 태어난 아이들이 늦게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육체적 성장이 더 이뤄져 있기에 더 많은 기회와 경험을 쌓는 것을 말한다.
유소년 축구의 경우 보통 1월 1일이 기준이 되므로 1,2,3월 출생자들이 선수 선발과 경험에서 이득을 얻고 10,11,12월 출생자들은 반대로 그만큼 기회에서 배제되는 현상인데 잉글랜드의 경우엔 선수 선발 기준일이 9월 1일인데 그래서 잉글랜드의 경우는 월령효과가 9월 1일을 기준으로 발생한다. 즉, 이건 능력이 아니라 단순히 출생월의 행운으로 얻게되는 기회다. 실제로 레전드 반열에 오른 선수들을 보면 딱히 먼저 태어난 사람이 특별히 더 능력이 있는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를 통해 설명한 월령효과는 여기서 그친다. 그럼 그것이 유소년 레벨을 벗어나면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알아볼 단계다. 내가 멀티팩터에서 다룬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이 월령효과는 프로 무대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유럽 31개 1부 리그에서 뛴 선수들의 출생월을 조사한 결과 1분기에 태어난 선수의 비중이 가장 높고 4분기에 태어난 선수의 비중이 가장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극한의 재능과 능력으로 경쟁하는 프로 축구에서조차 능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찍 태어났다는 운이 프로 선수로 활동하는데 있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제대로 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하면 바로 밀리고 마는 이 시장에서조차 말이다.
이 자료가 보여주는 바는 극한의 재능과 능력이 경쟁하는 프로 축구 분야에서조차 노력이나 능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진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물며 능력과 노력의 측정이 매우 어렵고 평가가 훨씬 애매한 일반적인 직업과 산업 분야에선 다른 요인이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더욱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월령효과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월령효과가 감소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프로에 입성한지 얼마 안되는 21살 선수들의 평균 탄생일은 6월 9일이지만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맞이한 32세 선수들의 평균 탄생일은 6월 23일이다. 월령효과가 전혀 없는 상태의 평균 탄생일인 7월 1일에 가까워져 가는 것이다.
빠른 월생 선수들이 프로 입성 후에 특별히 남들보다 더 나태하거나 노력을 덜 한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탄생월이라는 운으로 더 많은 기회와 경험을 쌓은 선수들도 결국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재능의 한계로 그만큼 밀려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효과가 완전히 제거되진 않는다. 그만큼 운으로 더 많은 기회를 얻은 빠른 월생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현상을 보고 '결국 능력이 운을 극복하는 것 아니냐'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 말이 맞긴 하지만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프로 축구계가 극한의 경쟁이 이뤄지기에 경쟁자보다 낫지 않다면 언제든지 주전에서 밀려나고 리그에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우리의 삶과 가까운 좀 더 일반적인 산업과 직업에선 이 정도의 경쟁과는 거리가 멀다. 당장 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는 다른 고용 형태에 비해 더욱 보호 받으며 이 보호가 경쟁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능력을 증명하지 못해도 퇴출되지도 않는다. 능력주의가 논의되는 다른 분야라고 다를까?
올 한해 뜨거웠던 능력주의와 노력에 대한 보상 논쟁은 보상으로 보다 약한 경쟁, 경쟁의 면제, 혹은 지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진짜 능력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다.
프로 축구에서 볼 수 있듯이 능력에 따른 자유로운 진입과 퇴출이 전제되어야 다른 요소의 영향을 줄이고 진정 능력으로 승부하고 경쟁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정작 능력에 대한 보상은 요구하면서 완전경쟁은 기피하는 것이 현재 국내에서 논의되는 능력주의의 빈 틈이자 함정이다.
즉, 엄밀히 따지자면 경쟁을 완화시켜줄 진입 장벽이 필요한 것이지 그 누구도 진짜 능력주의를 원치 않는 것이다.
이 글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국내에서 논의되는 능력주의는 그 능력을 만든 개인의 투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능력은 단지 개인의 투입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능력으로 낸 성과와 보상을 개인이 독점해야한다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2. 능력주의가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선 완전자유경쟁과 그에 따른 자유로운 퇴출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이상 능력주의는 진입장벽 구축과 지대 추구를 위한 명분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진짜 능력주의가 될 수 없다. 즉, 이 논의가 없는 한 능력주의를 제대로 논하기란 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