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엘레나의 침묵

마지막 여정 전, 씨앗의 깊은 잠에 대하여

by BREWOLOGY

제 이름은 엘레나입니다.

제 손에는 붉은 흙도, 끈적이는 과육도 묻어있지 않습니다. 대신 제 손에서는, 오래된 곡물 창고의 서늘하고 쾌적한 '침묵'의 냄새가 납니다.

저의 존경하는 친구 사무엘은, 물과 태양의 힘으로 붉은 과육의 외피를 제거하거나 과육의 모든 것을 품은 채 그 영혼(씨앗)을 더욱 깊게 물들이게 한 후에 그 안에 잠든 '씨앗'을 꺼내는, 격정적인 탄생의 순간을 주관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씨앗은, 마지막 '파치먼트(Parchment)'라는 얇은 잠옷을 입은 채 저에게로 옵니다. 방금 세상에 나온 아기처럼, 씨앗은 아직 숨이 고르지 못합니다. 껍질과 과육이 분리되는 그 격렬한 순간을 겪으면서, 씨앗이 품고 있는 '수분'은 아직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부분은 젖어있고, 어떤 부분은 말라있지요.

만약 이 씨앗을 지금 당장 먼 길(수출)을 떠나보낸다면, 씨앗은 그 여정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변질되거나, 그저 날카롭고 설익은 맛만을 낼 것입니다.


저의 일은 이 '숨이 고르지 못한 씨앗'을 재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일하는 이곳을 그저 '창고(Warehouse)'라고 부르지만, 저는 이곳을 '씨앗의 요람'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씨앗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위대한 선물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씨앗들은 이곳에서 30일, 60일, 때로는 90일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저는 이 시간을 '휴식(Resting)'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스스로를 완성하여 비로소 '완전한 응답'이 되는 시간입니다.


이 고요한 침묵 속에서, 씨앗 내부에서는 위대한 일이 벌어집니다.

씨앗의 중심부에 몰려있던 수분은, 이 시간을 견디며 서서히 껍질 쪽으로 이동합니다. 이동한 수분은 메마른 껍질 사이사이로 스며듭니다. 씨앗은 이 '휴식'을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수분을 콩 전체에 고르게 나누어 갖는 법을 배웁니다. 씨앗의 심장 박동이 일정해지는 순간입니다.


수분이 안정화되면서, 사무엘이 지켜냈던 과일 향, 아베베가 기다렸던 꽃 향, 호세가 물려준 흙의 기운, 그 모든 맛과 향이 서로 다투는 것을 멈추고... 비로소 조화롭게 '통합'되기 시작합니다.

씨앗은 이 깊은 잠을 통해,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고, 비로소 '성숙한 존재'가 됩니다.

저의 일은, 이 성숙의 시간이 방해받지 않도록,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지키며 이 요람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씨앗이 스스로 완성해 가는 이 순간을, 매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60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씨앗은, 더 이상 혼란스러운 아기가 아닙니다. 수분은 고르게 안정되었고, 풍미는 깊고 조화로워졌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먼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씨앗은 여전히 '파치먼트'라는 얇은 잠옷을 입고 있습니다. 제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저는 이 잘 익은 씨앗을, 다음 전문가에게 보냅니다. 그는 이 마지막 잠옷을 벗겨내고, 드디어 우리가 '생두(Green Bean)'라고 부르는, 그 연둣빛 속살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할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이 마지막 껍질을 벗겨내는 '탈곡'과, 그 씨앗의 운명을 결정하는 '등급'의 이야기에 대해 나눠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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