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껍질이 벗겨지는 운명의 순간
제 이름은 마르코입니다.
제 손은, 엘레나의 손처럼 '침묵'의 냄새가 배어있지 않습니다. 대신 제 손에서는, 기계의 차가운 금속성 냄새와, 방금 껍질을 벗은 '생두(Green Bean)'의 풋풋하고 비릿한 '날것'의 냄새가 납니다.
저는 '드라이 밀(Dry Mill)'의 관리자입니다. 아베베가 4년 9개월의 인내로 열매를 맺게 하고, 사무엘이 물과 태양으로 영혼을 꺼내고, 엘레나가 시간으로 그 영혼을 성숙시켰다면...
저는, 그 모든 여정의 '최종 증인'이자 '냉정한 심판관'입니다.
엘레나의 '요람'에서 60일의 잠을 마친 '파치먼트'가 저에게로 옵니다. 이것은 씨앗이 입고 있는 마지막 잠옷이자, 그들의 영혼을 보호하던 마지막 보호막입니다.
제 첫 번째 임무는 이 보호막을 벗겨내는 것, 바로 '탈곡(Hulling)'입니다.
씨앗들은 훌링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기계는 정확한 압력으로 이 얇은 껍질들을 '깨뜨려' 벗겨냅니다. '와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오는, 연한 녹색빛을 띤 이 씨앗의 속살... 우리는 이것을 비로소 '생두(Green Bean)'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4년 9개월, 그리고 60일의 기다림 끝에 마주한, 그 어떤 것도 감출 수 없는 '씨앗의 맨얼굴'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껍질을 벗겨내는 진짜 이유는, 그저 '맨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판'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제 두 번째 임무, 바로 '등급(Grading)'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모든 껍질을 벗어던진 생두들은,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저울과 제 눈앞에 증명해야 합니다.
먼저, 생두들은 크기별로 나뉘는 '스크리너(Screen)'를 통과합니다. 더 크고 단단한 씨앗, 즉 고산지대에서 더 긴 시간의 긴장감을 견디며 자란 씨앗들이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완전함'입니다.
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펼쳐진 수만 개의 생두들 사이에서, 이 위대한 여정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결점두(Defect Bean)'를 찾아내야 합니다.
어떤 녀석은 너무 일찍 수확되어 덜 익었고, 어떤 녀석은 벌레의 상처를 입었으며, 어떤 녀석은 사무엘의 '태양의 길'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발효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이과정은 '차별'이 아니라, '존중'입니다.
만약 이 상처 입은 단 한 알의 콩이 섞여 들어간다면, 그것은 아베베와 사무엘, 엘레나가 지켜낸 수많은 완벽한 콩들이 만들어낼 조화로운 향기(Harmony)를 모두 망쳐버릴 테니까요.
저는 이 '결점두'들을 냉정하게 골라냄으로써, 완벽한 여정을 마친 씨앗들의 가치를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분류가 끝나면, 저는 마침내 이 생두의 운명이 적힌 '등급'을 매깁니다. 'G1(Grade 1)', 'G2', 혹은 'Specialty'라는 이름표를 붙입니다.
이 이름표는, 4년 9개월과 60일간 이어진 모든 사람들의 '땀의 성적표'입니다. 이 등급에 따라 이 생두가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가격에 팔려, 어떤 먼 나라로 떠날지, 그 모든 '운명'이 결정됩니다.
제 일이 끝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껍질을 벗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받은 이 '생두'들은, 삼베(Jute)로 만든 커다란 자루에 담깁니다.
하지만 이 생두는 아직 '커피'가 아닙니다. 이 생두는, 자신을 낯선 땅으로 실어 나를 거대한 배를 기다립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이 자루에 담긴 생두가 드디어 고향을 떠나, 거친 바다를 건너는 '수출'과 '운송'의 긴 여정에 대해 나눠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