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레오의 무대

마지막 1g, 1초, 1ml에 담긴 존중

by BREWOLOGY

제 이름은 레오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바리스타'라고 부릅니다.


제 무대는 '땅'도, '창고'도, '항구'도 아닙니다. 이 작은 '바(Bar)'가 제 무대의 전부입니다. 제 손은, 저의 위대한 친구들이 겪어온 그 험난한 여정의 마지막을 책임집니다.


마르셀이 불의 연금술로 '번역'해낸 그 위대한 '원두'가 제게 도착했습니다. 저는 이 갈색의 원두를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5년 가까운 시간을 생각합니다.

호세의 흙, 아베베의 기다림, 사무엘의 철학, 엘레나의 침묵, 마르코의 저울, 안드레아스의 항해, 그리고 마르셀의 불꽃까지... 이 모든 서사가, 지금 제 손 안의 이 작은 원두 안에 잠들어 있습니다.


저의 임무는 '창조'나 '번역'이 아닙니다.

저의 임무는 '공연'입니다.


이 원두에 담긴 모든 목소리, 모든 감정을, 단 하나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가장 정직하게 당신의 잔 위에 '재현'해내는 것입니다.

이 공연을 위해, 저에게는 '물'과 '시간'이라는 두 명의 단짝 배우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막: 분쇄(Grinding)

이 원두는 아직 자신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저는 이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어, 그 단단함을 부수는 '해체'의 순간을 선사합니다.

'우르르' 소리와 함께 원두가 갈라지는 순간, 마르셀이 가두어두었던 그 위대한 향기가 비로소 폭발합니다!


이것은 5년의 이야기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겠다는 첫 번째 신호입니다. 저는 이 향기를 맡으며, 이 원고가 어떤 목소리(굵기)로 읽히길 원하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너무 가늘면 이야기는 거칠고 쓰게 변질될 것이고, 너무 굵으면 그 이야기는 채 다 전달되기도 전에 끝나버릴 테니까요.


두 번째 막: 대화(Extraction)

이제 '물'이라는 배우가 등장할 차례입니다.

저는 정확하게 94°C로 데워진 물을, 정확하게 20g의 분쇄된 원두 가루 위에 떨어뜨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을 '붓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물에게 길을 열어주는 일입니다.


물은 이 작은 입자들 사이를 여행하며, 그 안에 숨어있던 모든 이야기를 하나씩 깨우기 시작합니다. 아베베의 재스민 향을 깨우고, 사무엘이 선물한 블루베리의 달콤함을 녹여내며, 마르셀이 피워낸 캐러멜의 풍미를 이끌어냅니다.

저는 이 모든 과정이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3분 안에 끝나도록 '시간'을 통제합니다. 3분이 넘어가면 우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닌, 불필요한 잡음까지 듣게 될 테니까요.


마지막 막: 완성

물이 모든 여행을 마치고, 필터를 통과해 서버 안으로 떨어집니다.

이제 더 이상 '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5년의 세월과 여러 명의 전문가의 철학이 녹아든,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검은 보석 같은 액체를 당신 앞의 하얀 잔에 조용히 따릅니다.


제 임무는 끝났습니다.

저는 5년의 여정을 3분의 공연으로, 마침내 당신의 잔 위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 위대한 원고의 마지막 문장은 바로 이 잔을 받아 들 당신의 '입'과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이 모든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이자, 이 모든 이야기가 비로소 '의미'가 되는 순간... 바로 '당신'의 이야기에 대해 나눠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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