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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대로 Apr 06. 2019

익명을 빌린 독설가의 회사생활2

본부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니잖아요. 우리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어릴 때, 학교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다리가 계속 꼬이고, 몸도 이리저리 꼬아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어제는 회사 내 본부에서 타운홀 미팅(Town Hall Meeting)을 했다. 매년 한 번씩 하는데 벌써 세 번째 타운홀 미팅이다.

타운홀 미팅(Town Hall Meeting) : 지역 주민들을 초대하여 정책 또는 주요 이슈에 대하여 설명하고, 의견을 자유롭게 공유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비격식적인 행사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facebook직원들과 타운홀 미팅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이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이 미팅은, 미국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곳에서 주민들과 직접 만나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대답함으로써 정치적인 지지율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단계의 보고 체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결정권자에게 의견을 전달하고 대답을 들을 수 있기에 매우 좋은 자리다.


이렇게 멋진 미팅을 바로 어제 회사에서 했다. 본부 직원 450여 명을 모아 두고 금요일 아침에 진행한 것이다.

우선 타운홀 미팅을 하기 이틀 전에 회사 본부 내 임직원들에게 메일이 한통 왔다. 구글 Doc를 통한 익명 설문조사였다. 곧 타운홀 미팅이 있으니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마음껏 적고 본부 내 개선 희망사항도 적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질문은 없었다. 희망사항 하나만 적었다. (물론 익명이라 마음껏 적었다. 난 구글을 믿는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Q. 본부 내 희망사항을 적으시오. (익명)
A. 혹시 타운홀 미팅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가요? 혹시 본 적이 없고 그냥 '네O버', '다O' 같은 곳에서 글로만 찾아보셨다면, 당장 '유O브'에 들어가셔서 타운홀 미팅 영상 한 번 찾아보시고 미팅 준비하세요.

저는 작년, 재작년에도 본부 타운홀 미팅을 참석해 봤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말하는 시간은 채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고, 심지어 직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마저 그저 '교장님 훈화' 말씀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결정권을 가진 분께서 그런 기계적인 대답을 할 거면 왜 직원 400명 모아 두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이런 미팅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본부장님의 훈화 말씀을 들으러 모인 게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에 따른 실질적인 방안과 조치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1시간 30분 중에 1시간 이상을 직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틀이 흘러, 타운홀 미팅이 시작되었고 본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줘서 고맙습니다. 본부의 발전을 위해 직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틀 전 설문조사에 이런 내용이 있어서 여러분께 공개합니다"

400명이 보는 앞에 내가 앞서 쓴 '희망사항'이 적혀있었다. 그것도 타운홀 미팅 PPT 첫 페이지에 말이다.

"이런 의견을 주신 직원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따끔한 의견을 보내주신 직원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직원들의 의견을 더욱더 많이 듣겠습니다"


그리고 이내 올해 새롭게 수립된 회사 비전에 대한 소개가 20분간 이어졌고, 그다음 본부에서 하고 있는 과제들에 대한 소개, 우수 직원 포상이 줄줄이 이어졌다. 1시간 30분간의 미팅 시간 동안 1시간 이상을 짜인 일정 순서에 따라 진행하였고, 직원들의 목소릴 듣기 위해 본부장이 마이크를 다시 잡은 건 미팅 20여분이 남았을 때쯤이었다.


그렇다. 세 번째 타운홀 미팅도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을 하기 위한 자리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얻은 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익명을 빌려 말한 의견에 대해 최소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기뻤다.


글을 마무리하며

익명을 이용하여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더욱 나은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목소리 낼 수 없는 우리 사회에서 가만히 있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익명 활동보다는 필요에 따라서 하나의 수단과 방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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