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기로 했다
멜버른을 그전에도 왔었지만 시티 근처에서만 놀다가 다시 돌아가곤 했었다. 그만큼 시티에서 볼 것도 할 것도 먹을 것도 많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올 때마다 비행기를 이용해서 멜버른을 오다 보니 현지에서 렌터카를 사용하지 않는 한 멜버른 외곽 지역을 둘러보기는 힘들었던 것이 주된 이유였기도 하다. 물론 일일 관광 상품을 사서 가보고 싶은 곳을 갈 수는 있지만 우리는 늘 일일 관광 상품을 싫어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스타 그램을 통해 알게 된 우리 가족만을 위한 맞춤 여행 상품이 있어서 알아보니 실제로 단체 관광 상품과 가격이 비슷하면서 프라이빗 여행 상품이다 보니 좀 더 편할 것 같아서 예약을 미리 했다. 목적지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The Great Ocean Road). 멜버른을 오면 반드시 가야 할 관광지다 보니 멜버른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를 안 가봤다고 하니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내와 여기를 꼭 찍고 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 여행 코스는 하루가 꼬박 걸린다. 그만큼 멜버른 도심에서 멀다는 것이다. 해안 도로를 타고 꼬박 6시간 정도를 운전해서 가야 도작한다고 하니 대충 거리가 짐작이 되시리라 믿는다. 해안도로는 시드에도 좋은 것들이 많고 시드니 남쪽에 있는 울릉공이라는 도시 근처에 더 멋진 곳이 많아서 우리 가족은 해안 도로를 타고 가는 내내 별 감흥이 없었다. 새로운 것이 없었다. 시드니에서 자주 보던 그 바다와 같았다. 하지만 우리를 태우고 가던 기사님은 열심히 설명을 하셨기에 어쩔 수 없이 중간중간 "네 네"라고 응답을 해줬어야 했다.
중간에 딱 한번 1시간 정도 해안가 조그만 마을에 점심 겸 휴식을 하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3군데 전망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전망대가 바로 12 사도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원래는 12개의 돌기둥들이 해안가에 있어서 12 사도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은 거센 파도, 바람 그리고 비 때문에 4개가 이미 무너지고 8개가 남아 있다고 했다. 직접 보니 실제 모습은 역시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느낌은 웅장했고 신비로운 자연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날씨가 흐렸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아서 그나마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실제로 파도와 바람이 무척 세게 느껴졌다. 무너진 조각들이 보였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12 사도 외에 두세 군데 더 전망대를 둘러보았다. 각각의 전망대는 다른 특징들이 있어서 다른 느낌이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 자연 관광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상위 10위에 늘 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왜 그런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은 아직 8개의 봉이 남아 있지만 그 마저도 사라질 것이며 언제 가는 하나도 없을 수 있기에 빨리 봐야 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연 그 자체가 관광지였다. 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 외에 그 어느 것도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시설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관광지는 어디를 가도 인공적인 터치가 안 들어간 곳이 없다. 입구의 수많은 카페, 술집, 맛집, 그리고 숙박 시설. 하지만 여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불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자연 그 자체만 정말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만약 여기가 우리나라였으면 아마도 여기에 적어도 스타벅스 하나쯤은 만들었을 텐데 라는 웃긴 생각을 해봤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가족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잤다. 자연 관광지 한 곳을 둘러보고 오면서 하루를 꼬박 보냈다는 것에 조금은 아쉬웠다.
다시 멜버른 시티로 돌아온 시간은 저녁 7시. 도시는 이미 어둑어둑해졌고 금요일 저녁이라 불금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거리는 복잡했고 차도 다른 날에 비해서 많았다. 한참을 차에서 자고 나서 그런지 다들 동시에 허기가 졌었다.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가방만 숙소에 던져 놓은 뒤에 바로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차이나 타운으로 결정했다.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이 달라서 이것저것 리뷰를 하다가 결국에 서로 양보하고 양보해서 차이나 타운으로 합의(?)를 보았다. 극적인 합의였다.
금요일 저녁 차이나 타운은 말 그대로 불금이었다. 어느 식당으로 가던지 무조건 줄을 서야 했고 차이나 타운은 아시안인 전용이 더 이상이 아니었다. 서양인들이 더 많아 보였다. 우리가 가끔씩 한국 음식이 질려서 외식하러 나가면 다른 나라 음식들을 먹고 싶은 것과 사뭇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허기는 목까지 차 오르고 있는데 줄을 서서 기다려만 한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팍 올라왔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 사이 첫째 녀석이 작전을 제안했다. 각자 흩어져서 줄을 서서 가장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다시 모이자는 것이다. 속으로 오호 굿아이디어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차이나 타운에는 식당들이 다 붙어 있어서 따로 줄을 서더라도 다시 모이기가 쉬웠다. 결과적으로 작전 성공. 첫째 녀석이 기다리던 식당이 가장 빨리 줄이 줄어들어서 많이 기다리지 않고 테이블을 잡았다. 그리고 첫째 녀석은 기다리는 동안 메뉴 오더를 이미 다해버렸다. 그래서 앉자마자 곧 음식이 나왔다. 첫째 녀석의 행동은 아내와 나를 할 말 없게 만들었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온 가족이 동시에 폭풍 흡입을 했고 아무 말이 없었다. 음식을 거의 다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 갔었던 그레이트 오션 로드 후기를 말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스케일과 자연 그대로를 보존한 것에 대해 말했고 정말 한 번쯤은 꼭 봐야 할 곳이라는 데는 서로 동의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는 멜버른의 마지막 밤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아내도 나도 애들한테 좀 더 자유를 주기로 했다. 아이들은 디저트 아이스크림 집을 검색해서 갔고 아내와 나는 따로 카페로 이동했다.
사실 이번 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에는 나와 첫째 딸만 오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온 가족이 다 같이 오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아내는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가 내가 등 떠밀어서 왔다. 아내에게 쉼을 주고 싶었었다. 아내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가 좀 강제로 끌고 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더니 아내가 대뜸 그랬다.
"여보, 우리 다 같이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
"웬일이야? 오기 싫다고 그러더니...."라고 나는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맨날 집, 회사, 학교만 쳇바퀴 돌듯이 살다가 우리도 아이들도 이렇게 다른 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다른 것들이 보이고 그래서 많이 생각하게 되네...."라고 아내가 말했다.
"뭐가 보여?"라고 나는 짧게 물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너무 어리게만 본 것 같아. 바쁘게 사는 동안 아이들도 이제 어른이 다 된 것 같아. 시드니 우리 집에서 살 때 안 보이던 그런 것들이 보여...."라고 아내는 말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래서 뭐가 서운해?"라고 나는 또 짧게 던졌다.
"........." 아내는 말이 없었다.
"왜 그래?" 나는 아내의 눈을 쳐다봤다
"서운하기보다는 미안하지. 저렇게 좋아하는 여행을 자주 못 갔잖아 우리....." 라며 아내의 눈이 약간은 촉촉해졌다.
"미안해하지 마. 우리가 너무 열심히 달려온 거야. 너무 일만 하고 살았던 거지. 그리고 부모님한테 효도한다고 휴가 때면 맨날 한국에만 가다 보니 다른 데 갈 수가 없었지 뭐....."라고 하면서 급하게 위로를 했다.
아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도 동의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보였다. 내가 알고 있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아내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첫째 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성숙하게 어른이 되어 버렸고 나를 따라만 하던 그 어린아이가 더 이상은 아니고 자신이 이끌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변했다. 계획되어 있어야 하고 그 계획에 오차가 생기면 또 다른 계획을 짜려고 하는 그런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둘째 아이는 사실 몇 해 전부터 말이 없었다. 뭔가 기가 빠진 사람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잘 웃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자기표현도 없었다. 둘째 녀석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혼자 잘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려고 무척 애를 쓰고 했다. 하지만 도와주는 것을 너무 싫어했다. 자신의 문제로 인해 아내와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더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런 둘째 녀석이 멜버른에 와서 지내는 동안 말을 참 많이 했다. 평소와는 달리 말이다. 멜버른의 좋은 맛집, 가볼 만한 장소, 카페 등등을 검색해서 추천해 주었고 때로는 우리를 그런 곳으로 직접 인도하기도 했었다. 시드니에 살 때는 주로 우리를 따라만 다니던 녀석이었다. 저녁에 밥 먹을 때는 웃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해서 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했더니 신나서 나를 데리고 그 밤에 같이 나가던 모습을 보고 나와 아내는 또 다른 둘째 아이를 보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이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이번 여행을 "각자를 인정하자"로 정리했다. 두 딸들을 있는 그대로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더 이상 아내와 내가 그들을 변화시키려 하고 움직이려 하고 이끌어 가려고 하는 억지를 부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들이 생각하는 방향대로 그들이 생각하는 인생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인정하자고 하고 나니까 사실 너무 편했다. 뭔가를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짧았던 3박 4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뭐 특별한 기억은 안 나지만 적어도 우리는 잠깐이었지만 "쉼"을 가졌다. 그동안 달려오기만 했던 각자의 여정에서 우리는 이제 한숨을 돌렸고 그리고 돌아봤고 앞으로의 미래를 계획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가족을 좀 더 알았다고 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던 여행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여보, 아이들이랑 자주 여행 가자 더 자라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