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따로 각자 즐기는 여행도 나쁘지 않다
다음날 아내와 나는 일찍 눈이 뜨였다.
나이 들면 새벽잠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여전히 아침에 잠이 많지만 이렇게 여행을 오면 항상 거짓말처럼 평소와는 다르게 아침 일찍 눈이 뜨인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아직 딸들은 둘 다 자고 있는 틈을 타서 멜버른의 아침 공기를 느끼고 싶어서 아내와 나는 대충 세수만 하고 숙소를 나왔다.
주중의 멜버른 아침은 여느 다른 도시들과 비슷하게 이런 아침부터 출근하는 사람이 많았다. 호주 사람들은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 내가 한국에서 일할 때는 늘 9시에 턱걸이하듯이 출근하곤 했었는데 호주 와서 직장생활을 해 보니 대부분의 동료들이 8시 전에 이미 거의 다 출근을 하고 직급이 놓은 시니어급들은 그보다도 훨씬 전에 출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이렇게 일찍 출근을 하나 봤더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호주 사람들은 일찍 잔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야근도 없고, 회식도 거의 없고 그렇다고 티브이에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이 쏟아지거나 하는 것들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 아이들을 키우는 가정들은 대부분 10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일찍 일어난다. 두 번째로는 호주 사람들은 자가운전으로 출근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트래픽이 많은 복잡한 시간을 피해 일찍 출근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특히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에 다니는 경우 부부 중에 한 사람은 아이를 일찍 픽업을 해야 해서 일찍 시작해서 일찍 근무를 마치기를 선호한다. 일찍 시작하면 일찍 퇴근해도 아무도 말 안다.
살짝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다. 아무튼 멜버런의 아침도 일찍 시작하는 듯 보였다. 멜버른을 한 번쯤 방문했던 사람들은 다 아시겠지만 여기는 도심 곳곳에 오래된 유럽풍의 건물들이 많다. 시드니와 차이 나는 것 중에 하나고 만약 한국에서 오시는 관광객분들은 당연히 신기해서 사진을 찍는다. 나도 자연스럽게 사진기에 손이 가서 몇 장 찍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들 카페를 이미 들렸는지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총총걸음으로 간다. 그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우리가 가려는 카페 앞에 이미 줄을 서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아내와 나도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앞선 글에서도 말했듯이 멜버른은 무척 유명하고 좋은 카페들이 많다. 우리나라처럼 큰 창에 앉을자리들이 무지 많고 인테리어도 어리어리한 그런 카페들이라기보다는 그저 골목 한구석이나 길가나 아니면 코너집에 고작 2-3평 정도의 작은 그런 것들이 많다. 앉아서 마실 수 있는 공간도 거의 없고 대부분의 손님들도 커피를 주문해서 사무실로 가지고 간다. 그러다 보니 이런 카페들은 정말 진심으로 커피 맛으로 승부를 건다. 커피를 만드는 것에 진심이다. 고객들이 선호하는 커피콩(빈)을 직접 골라 주문하고 때로는 직접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적당한 온도의 우유와 마지막 터치 등등에 무척이나 신경을 쓴다. 단골이 많아서 얼굴만 봐도 뭘 주문할지 이미 알고 고객의 이름을 다 기억하는 바리스타 들도 많다. 한 손으로는 커피를 만들면서 얼굴은 고객을 보면서 웃고 인사를 한다. 단지 커피만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다.
우리가 도착한 카페는 멜버른에서 크루아상 빵을 제대로 만들어서 파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왔다. 아내와 나는 시드에서도 크루아상을 파는 가게를 찾아다니면서 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크루아상이 커피와 만나면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역시 가게 앞에 줄이 엄청났다. 인스타그램이나 소셜 네트워크의 힘을 몸소 느꼈다. 30분 정도를 기다려서 비로소 아내와 나는 원하는 빵과 커피를 사서 나올 수 있었다.
우리가 마실 커피와 빵을 들고 근처 길가의 벤치에 앉아서 마시기로 했다. 물론 아이들 빵은 따로 포장해 달라고 했다. 호주는 미세 먼지가 없고 특히 멜버른은 트램이 다니다 보니 도심 내에 자동차가 별로 없는 편이라서 공기가 좋았다. 아내와 나는 이런 여유를 좋아한다. 우리는 늘 여행을 가면 관광지를 가기보다는 그냥 그 도시의 로컬처럼 지내다가 쉬는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커피를 마시면서 그저 지나가는 트램을 쳐다보는 것도 좋다. 아마도 여기 사는 멜버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아내와의 모닝커피와 산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니 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사 온 빵들을 오픈해서 보여주니까 눈을 번쩍 뜨고선 두 녀석 다 너무 좋아했다. 언제 여기를 갔다 왔냐며 왜 자기네들을 안 깨웠냐며 사람들은 많았냐며 빵 종류가 이게 다였냐며 종알종알거렸다. 보통의 딸들처럼 빵을 먹기 전에 카메라로 사진을 마구 찍고 자기네들 소셜 네트워크 계정에 올렸다. 그런 모습들이 보면 아직은 애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은 사 온 빵으로 대충 때우고 멜버른에서의 둘째 날을 보내기로 했다. 옷을 다 입고 숙소를 나오는데 첫째 딸이 갑자기 물었다.
"아빠, 오늘은 계획이 뭐야? 우리 어디가?"
속으로 말했다. 역시 첫째 딸이야.
사실 나는 오늘 뭐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내일은 하루종일 가는 투어 계획이 있어서 오늘은 그냥 여유 있게 도시를 둘러보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없어. 뭐 그냥 나가서 맛있는 데 있으면 들어가서 먹고 이것저것 구경하고 그럴 생각인데...."
계획이 없으면 안 되는 큰딸은 바로 입술이 부루퉁해졌고 실망한 표정이었다. 순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의견 충돌인가?라는 떨림이 있었다.
사실 아주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전에 빅토리아 주립 미술관에 가서 예술작품을 보고 눈을 정화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첫째 딸에게 미술관에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동의를 했고 일단은 그쪽으로 향했다. 근데 썩 좋아라 하지는 않았다.
미술관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규모가 컸다. 그림인지 사진인지 착각할 정도로 굉장히 디테일이 있는 작품들이 많았고 특히 유럽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그림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멜버른을 오신다면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역시 미술관은 한창나이의 두 딸들에게는 흥미롭고 신기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지루한 곳이었다.
결국 우리는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딸들은 지네들이 가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하고 아내와 나는 따로 시간을 보내고 나중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딸들은 멜버른 시내에서 쇼핑을 한다고 했다.
아이들을 보내 놓고 아내와 나는 멜버른 야라(Yarra) 강옆에 있는 카페를 갔다. 아직 점심 먹기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우선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커피는 이미 마셨고 알코올이 더 당겼다.
멜버른 날씨는 시간대별로 변하는 듯하다. 흐렸다가도 금방 파란 날씨가 나오고. 누구는 지랄 같은 날씨라고 하지만 뭐 개인적으로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그래도 역시 날씨는 시드니가 최고인 듯하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한동안 야라 강을 보면서 여유를 즐겼다. 최근에 아내가 일이 많았고 신경 쓰는 일이 많이 생겨서 머릿속이 복잡했었다. 여행을 오게 된 이유 중에 하나였다. 옆에서 보는 내내 안타까웠고 번아웃이 올까 봐 내심 조마조마하곤 했다. 아내는 나와 결혼해서 오랜 시간 주부로 지냈었다. 나를 뒷바라지해 주고 아이들이 어려서 여러 가지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도저히 일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혼자 벌어서는 살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호주 이민을 처음부터 생각하고 계획할 때부터 제일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것이 아이들에게 최대한 부모와 많은 시간을 가지자고 말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도 이제는 둘 다 대학생이 되었다. 결혼기간의 반 이상을 남의 나라에게서 보냈다. 참 세월이 빠르다. 아내는 몇 해 전부터 일을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전 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그만큼 손해 보는 것도 많았다. 역시 세상은 아내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두 사람이 벌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역시 돈은 돈이고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것을 깨달았다. 소소한 일상을 잃어버렸다. 그전에 누리던 그런 소소한 일상의 호사를 이제는 누리기 힘들어졌다. 나도 바쁘고 아내도 바쁘고 일하는 시간도 각자 다르다 보니 오늘처럼 이렇게 여유롭게 같이 앉아서 맥주 마실 시간도 없어졌다.
오랜만에 둘 만의 시간을 즐겼다. 중간중간 아내는 여전히 딸들이 걱정이 되었는지 뭐 하고 있을까 뭘 좀 먹고 돌아다니나 등등 궁금해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더 이상 어린애들이 아니라고 안심시켰다. 아내와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시드니에서도 종종 그랬다. 커피를 하나 사들고 사람들이 잘 안 가는 동네 어귀에 차를 세워두고 그 동네길을 걷곤 했다. 길은 인생이고 길에서 많은 대화가 되기 때문이다.
맥주랑 피자로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아내와 나는 곧장 야라 강 건너편의 공원으로 이동했다. 좀 걷고 싶었다. 배가 부른 것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아내와 같이 걷고 싶었다.
이렇게 좋은 길을 걸으면서 대화를 하면 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아내는 그동안 고민거리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머릿속에 있던 것들을 쏟아 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 주었다. 한창을 걷다 보니 어느덧 멜버른의 가장 크고 좋은 로열 보타닉 가든(Royal Botanic Garden)에 도착하게 되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중의 보타닉 가든은 너무 여유로웠다. 그저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나 아니면 운동을 하는 사람들만 가끔씩 보였을 뿐 마치 우리가 가든의 주인같이 느껴졌다. 나무도 많고 아직 단풍이 남아 있는 것들이 보였다. 새들도 여유로웠고 공기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뭐 여행이 별거 있나. 이렇게 힐링하면 되는 거지 뭐.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지 아내는 피곤하다며 숙소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숙소로 돌아왔고 그 시간에 아이들은 여전히 시티 쇼핑몰을 구경 중이라고 했다. 잠시 낮잠을 잤다. 초인종 소리에 잠이 깼다. 벌써 도시는 어둠이 내려 있었고 아이들이 드디어 돌아왔다. 뭘 잔뜩 사들고 들어올 거라는 기대는 허망하리 만큼 날아가고 둘 다 빈손이었다.
"뭐냐? 아무것도 안 사고 왔어?"라고 내가 말했다.
"응. 구경만 했고 사고 싶은 것은 일단 찜했어. 내일 엄마랑 보고 사려고" 첫째 딸이 말했다.
"엄마 카드 쓰지 그랬어?" 내가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둘째 딸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한숨을 자고 났더니 배가 고팠다. 아이들이 그냥 시켜 먹자고 했다. 다들 동의했다.
"뭐 먹을까?" 또 결정의 전쟁이 왔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둘째가 쨉 싸게 말했다. "마라탕 어때?"
참고로 둘째 녀석은 어제부터 마라탕을 먹고 싶었던 눈치였다. 그런데 자기 언니가 싫어하고 엄마도 싫은 표정을 지으니까 쏙 들어갔었다.
"굿 아이디어! " 아내가 말했고 첫째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반대 없이 전원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둘째 딸은 즉각 인터넷 검색으로 근처 마라탕 맛집 검색을 했고 나와 같이 나가서 사가지고 와서 숙소에서 먹기로 했다.
푸짐한 마라탕이 제법 맛있었고 우리 넷은 포만감으로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밖에 나가서 줄 서서 기다리지 않고 숙소에서 먹어서 너무 좋았다.
먹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마라탕은 먹을 때는 맛있고 기분 좋지만 먹고 나면 후식이 꼭 생각난다. 소화도 시킬 겸 해서 아이들과 나는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호주는 목요일이 쇼핑 데이이다. 평소에는 샵들이 일찍 문을 닫지만 이날만큼은 보통 9시 또는 10시까지 오픈을 하기 때문에 목요일 저녁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편이다. 멜버른 목요일도 시드니와 다름없었다. 마치 서울의 밤거리처럼 사람들이 많았으며 식당이며 커피숍이며 사람들로 꽉 찼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아이스크림의 왕은 둘째 녀석이다. 둘째 딸은 평소에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왠 만한 아이스크림 가게 이름과 위치는 다 아는 편이다. 더군다나 새로 오픈한 아이스크림 가게도 일찍 시식을 해보고 평가하곤 한다. 아마도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이랑 결혼하지 않을까 싶다. 둘째 녀석은 이미 가고 싶은 이니스 크림 가게 몇 군데를 알아봐 두었던 모양이다. 나가자마자 앞서서 걸어가면서 우리를 리드했다.
정통 이탈리아 젤라토 아이스크림집은 아니었고 둘째 딸 말로는 인도네시아 쪽이라고 한다. 특이했다. 그래서 그런지 줄이 어마 어마 했다. 20분 정도를 기다려서 겨우 그 조그마한 컵에 세 스쿱을 받아서 셋이서 나눠 먹었다.
아이들이 가고 싶은 곳에 따라만 다니고 그들이 가고 싶은 곳에 가니까 충돌할 일도 없었다. 이제 둘 다 그런 나이가 되어 버렸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숙소를 돌아오는 길에도 두 녀석들은 자기 내들이 가고 싶은 곳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나를 끌고 다녔다. 나는 그저 그때마다 카드 결제만 하면 되었다. 둘 녀석들 다 행복해 보였다. 이럴 때는 둘이 동맹이다. 평소에는 별로 친하지 않다가도 이럴 때는 또 너무 친하다. 이해가 안 되는데 아내는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멜버른에서의 둘째 날도 지나갔다. 내일은 투어가 있다. 기대를 하면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