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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M Jun 01. 2024

우당탕탕 가족여행 2- 멜버른 첫째 날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각자의 일상을 사는 곳을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가 갔던 멜버른은 시드니와 꽤나 가까운 거리에 있다. 비행기로 1시간 10분 정도를 날아가면 도착하는 거리지만 실제 체감상으로는 30분 만에 도착하는 느낌이다. 출발할 때 우당탕탕했던 분위기와는 달기 비행기는 높은 고도에서 마치 눈썰매를 타듯이 아무런 진동이 없이 고요하게 미끄러져 가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고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오랜만의 평온을 잠시나마 만끽했다. 아내도 그동안 미루었던 잠을 잤다. 보통 그 시간이면 아내도 나도 뭔가에 정신이 없을 가장 바쁜 시간인데 그날만큼은 그 모든 것들이 읽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보통 나는 비행기를 타면 책을 읽거나 평소에 바빠서 못 보고 저장해 둔 글 등등을 읽으면서 시간을 때우는 편인데 그날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책 읽는 것조차도. 한 시간은 정말 너무 짧았다. 아내와 나는 잠시 눈을 붙였을 뿐 중간에 음료수 제공하는 소리에 좋은 단잠을 깨는 바람에 그 이후로는 다시 잠들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았다. 사람들이 이래서 자주 여행을 가고 싶어 하나라고 문득 생각했다. 


주중에 멜버른 공항은 한산했다. 사람들도 여유로워 보였고 무엇보다도 혹시나 했던 날씨가 생각보다 춥지가 않았다. 가방을 하나 찾아야만 해서 나는 그래도 얼른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고 싶었어 걸음걸이에 속도롤 냈다. 아내가 중간에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해서 아이들과 나는 어쩔 수 없이 잠시 기다렸어야 했다. 나는 그 사이를 못 참고 가방 찾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인지 첫째 딸이 또(?) 뭐라고 했다. 


"아빠, 먼저 가서 가방 찾고 싶어?"


나는 즉각 반응했다.


"아냐, 뭐 천천히 가서 찾으면 되지 뭐. 괜찮아...."


아내는 예상보다 화장실에서 꽤나 긴 시간을 보냈다. 결국 첫째 딸이 말했다.


"아빠, 먼저 가서 가방 찾아. 엄마는 내가 나오면 데리고 나갈 테니까. 입구에서 만나. 응?"


나는 멈칫하다가 그냥 첫째 딸의 조언(?)을 수용하기로 했다. 요즘은 세상이 참 좋아져서 항공사 앱에서 실시간으로 가방이 도착했고, 가방이 나오는 중이고, 그리고 어디에서 가방을 찾으면 된다고 정보를 알려준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뭐든 쉬운 세상이 된듯하다. 덕분에 별로 헷갈릴 일이 없이 가방이 나오는 곳을 찾게 되었고 정말 우연히도 내가 도착하자마자 가방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가방을 픽업하고 첫째 딸이 알려준 대로 입구에서 조금 기다리니까 아내와 아이들이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첫째 딸이 말했다.


"아빠, 가방 어디서 찾는지 안 헷갈렸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럼 물론이지. 바로 찾았어!" 내가 자신 있게 말했다.


첫째 딸은 아직도 출발할 때 내가 했던 실수들을 안 잊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나를 도와주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나를 못 믿어서 그러는지 살짝은 기분이 나빴다. 


멜버른 공항에서는 시내로 들어가는 지하철이 없다. 공항버스를 타거나 우버를 부르거나 아니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당연히 공항버스가 가장 저렴하다. 그래서 다 같이 공항버스 타는 곳으로 걸아갔다. 예상대로 줄이 길었지만 금방 없어졌다. 버스 티켓을 끊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 첫째 딸이 나타나서 말했다. 


"아빠, 왕복으로 끊어야 되는 거 알지? 그게 더 저렴해 (아주 퉁명스럽게)"


순간적으로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요?'라고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키오스크 기계에서 4인 가족 왕복 티켓을 카드로 결제하니 4개의 QR 코드가 프린트되어 나왔고 버스 기사님은 그것을 스캔해서 체크했다. 왕복 티켓이니까 잘 보관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스캔을 해야 한다고 했다. 공항버스는 2층으로 되어있는데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좋았다. 아이들은 따로 앉았고 나와 아내가 맞은편에 앉았다. 좌석에 앉자마자 내가 아내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첫째 딸 오늘 왜 저래? 뭐 도와주겠다는 거야 아니면 뭐야? 정말 까칠해요...."


아내가 피씩 웃으면서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냥 둬. 귀엽지 않아? 다음에는 아예 그냥 딸이 다 하도록 내버려 둬도 될 것 같다"


주중이라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덕분에 30분 정도만에 도착했고 오랜만에 멜버른 시내 공기를 확인했다. 우리 가족은 2008년에 시드니로 이민 와서 그다음 해에 내가 테니스에 꽂히는 바람에 그 이듬해 2009년에 호주 오픈 테니스 경기를 보러 처음으로 온 가족이 멜버른에 왔다. 그 이후로 나는 개인적으로 회사 출장으로 몇 번 오고 아이들은 친구들과 여행으로 몇 번 왔지만 아내는 2009년 이후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온 가족이 함께 멜버른에 오는 것도 2009년 이후 처음이었다. 


공항버스의 종착점은 멜버른의 Southern Cross Station이고 우리의 에어비엔비 숙소는 그 위치에서 조금은 떨어진 곳이었다. 가방이 없다면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나는 시티 트램을 타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의기양양하게 내 스마트폰을 열고 구글 앱에 숙소 주소를 넣어서 경로를 검색하려고 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뒷짐을 지고 내가 하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내 스마트폰의 인터넷 연결 상태가 좋지 못했다. 아무리 검색을 해도 내가 원하는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또 짜증이 팍 올라왔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하면서 투덜거리고 있으니 이번에도 첫째 딸이 자기 스마트폰을 보여주면서 비집고 들어왔다. 


"아빠, 여기 트램 96번 타면 된다고 나와. 저쪽 건너편에 건너가서 타면 돼"라고 하면서 그녀는 이미 그쪽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내가 말했다.


"여보, 딸 말대로 해. 얼른 저쪽으로 가자 ㅎㅎ"


둘째 녀석도 옆에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언니 말이 맞아. 저쪽에서 타면 돼. 걱정마"


걸어가면서도 나는 계속 내 스마트폰이 이상하다며 투덜거렸다. 약간은 멋쩍은 순간이었다. 


96번 트램은 금방 왔다. 멜버른이 좋은 것이 시내 중심으로 무료 트램 구간 있다. 올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시드니는 아직도 트램을 어디서 타던지 상관없이 페이를 해야 한다. 관광객들 입장에서 보면 멜버른의 트램이 더 좋은 셈이다. 그리고 트램도 자주 온다. 비록 트램 사이즈가 조금 작기는 하지만 자주자주 오다 보니 출퇴근 시간을 빼고는 별로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한국에서 멜버른에 여행을 온다면 무료 트램 구간에 있는 숙소를 구하기를 권장한다. 그러면 이동할 때 따로 페이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무료 트램 구간을 벗어나면 별도로 페이를 해야 하지만 멜버른 시티 중심으로 돌아다니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무료 트램으로 가능하다.



둘째 딸이 트램 안에서 혼자 서 있는 내 옆으로 오더니 자기 스마트폰을 켜고서는 언제 내려야 하고 내려서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둘째 녀석은 그저 그것뿐이었다. 다른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한편 첫째 딸은 멀찍이 혼자 서서 뭔가를 열심히 텍스팅 중인 것 같았다. 아내는 또 아내대로 혼자 서서 암 말이 없었다. 


트램에서 내려서 5분 정도 걸어야 했다. 이번에는 둘째 딸이 앞장섰다. 멜버른의 아침 공기는 시원했다. 약간 차가운 정도였고 아주 춥다거나 하는 날씨는 아니었다. 멜버른은 시티가 거의 바둑판처럼 되어 있고 좋은 점은 도로가 거의 대부분 평지다. 그래서 여행용 가방을 끌고 이동하는 것이 결코 힘들지는 않다. 단지 조심해야 할 점은 도로 중간중간에 트램이 지나가는 선로가 있어서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을 무심코 마구 밀고 다니다가 바퀴가 중간 끼거나 부서지거나 하는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드디어 숙소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마지막 챌린지가 남았다. 에어비엔비 숙소는 셀프 체크인방식이다. 한국은 대부분이 전자식 도어록이지만 아직 호주는 디지털 도어가 아니라 여전히 열쇠를 이용해서 들어가야 하는 아날로그 방식이 대부분이다. 법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에어비엔비 호스트들이 앱을 통해서 숙소 열쇠를 픽업하는 장소와 방법을 따로 알려준다. 우리 숙소 호스트도 당일 알려주었다. 숙소 근처 편의점에서 어떻게 픽업을 하면 되는지 알려 줬다. 편의점 앞에 도착하자마자 큰 딸이 말했다.


"아빠, 얼른 가서 열쇠 픽업해 와. 할 수 있지?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게"


나는 그 말에 대꾸도 안 하고 홀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앱에서 알려준 데로 편의점 한쪽 구석에 케이스가 걸려 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케이스를 열고 나니 드디어 숙소 열쇠가 나왔다. 편의점에서 나올 때 나는 이미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자, 이제 나 따라오면 돼"라고 말했다.


 숙소는 예상보다 작았지만 우리 가족이 짧게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더군다나 숙소에서 보는 뷰가 정말 멋지고 좋았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멜버른 시티에 랜딩을 하고 세틀을 하게 되었다.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급 허기가 느껴졌다. 아내도 빨리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드디어 또 선택을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우리 가족들의 공통점이 있다. 다들 결정 장애가 조금씩 있다. 그나마 내가 좀 덜한 편이긴 한데 쇼핑을 하거나 음식점을 찾거나 할 때마다 좀체 결정을 잘 못 내리는 편이다. 멜버른 시티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아이들에게 맛집을 검색해 보고 가까운 곳에 맛있는 집으로 찾아서 가자고 얘기하고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아이들은 각자 검색을 시작했고 그 사이에 아내와 나는 숙소 1층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려서 마실 생수와 간단한 과일을 사가지고 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이들은 여전히 검색 중이었다.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타이 음식, 중국 음식, 일식, 한식, 등등 옵션은 많았지만 거리, 가격, 평점 등등을 비교하던 아이들은 꼭 한 곳을 정하지 못했다. 결국 최종 결정은 나와 아내의 몫이었고 일식으로 결정하고 배고픔에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출발했다. 


한상 가득 나온 일식은 말하자면 일본식 가정식 백반 같은 느낌이었다. 

이 식당은 첫째 딸이 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가격 때문에 망설였다. 출발하면서부터 그때까지 첫째 녀석이 나름 이것저것 신경 쓴 것이 많아서 첫째 딸이 원하는 곳으로 가기로 했고 대만족이었다. 예상대로 가격이 살짝 비싸기는 했지만 먹고 나서 기분이 굉장히 편하고 좋았다. 진짜 집밥을 먹고 난 느낌이었다. 멜버른에 가신다면 추천하고 싶다. 


멜버른은 커피가 아주 특별하다. 사실 시드니에서도 괜찮은 커피를 마실 곳은 상당히 많다. 그렇지만 커피 애호가들에 의하면 멜버른의 커피는 사뭇 다르다고 했다. 커피 전문가는 아니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멜버른의 좋은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커피는 둘째 녀석이 추천해 준 곳으로 가기로 했다. 둘째와 나는 종종 커피를 자주 마시러 다니는 편이다. 우리는 둘 다 커피 맛과 바이브를 아주 좋아하는데 취향이 비슷하다. 



예상한 대로 커피 맛이 너무 좋았다.  플랫화이트와 라떼는 부드러운 실크 같은 느낌이었고 롱블랙의 커피 향은 진하고 좋았다. 무엇보다도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 모든 것들의 바이브가 커피의 맛을 더욱 좋게 만들어 주었다.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멜버른 시내를 그냥 걷기로 했다. 그냥 목적 없이 걸어면서 좋은 곳이 있으면 들어가는 정말 말 그대로 자유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이것은 둘째 녀석의 제안이었다. 둘째 딸은 첫째와는 다르게 계획해서 여행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반면에 첫째 딸은 무조건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 한치의 착오도 있으면 안 된다. 정말 극단적으로 다른 두 아이들이다. 


멜버른 시내는 걷기가 참 좋다. 신호등이 있지만 대충 무시해서 지나가도 되고 트램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차가 적게 보인다. 거리도 바둑판처럼 나눠져 있어서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다. 혹시 잘못 들어갔거나 하면 360도를 돌아서 나오면 다시 시작했던 곳으로 오게 되어있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이 있어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상상이 안되지만 말이다. 첫 번째로 들어간 곳은 'State library" (주립도서관) 였다. 도서관인데 도서관 같지 않은 곳이었다.  


멜버른에서는 유럽풍의 오래된 건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Flinders Street Station 역사 건물은 언제 봐도 이뻐 보인다.  


시드니는 바다가 참 이쁜 도시다. 그래서 이쁜 비치도 참 많다. 날씨 좋은 날에는 그중에서 어딜 가도 관광엽서에나 나올 법한 곳이 정말 많다. 반면에 멜버른은 서울처럼 도시를 간통하는 강이 있다. 야라 강(Yarra River)라고 부른다. 한강처럼 크지 않아서 더 좋다.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로지르는 그런 아기자기한 강이다. 


이번 멜버른 여행 첫날의 메인이벤트는 사실 따로 있었다. 바로 손흥민 선수가 뛰는 이벤트 축구 경기 관람이었다. 손흥민 경기를 영국에서 직접 보는 것이 나의 오래된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인데 손흥민이 호주에 온다고 하니 냉큼 티켓을 끊었다. 처음에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나와 첫째 딸만 오기로 했다가 다 같이 오게 되었다. 그런데 다 같이 오길 잘한 것 같다. 

손흥민이 과연 올까 그리고 경기에 출전할까 조마조마했지만 결국 우리는 손흥민을 보게 되었고 오랜만에 소리도 지르고 응원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숙소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첫째 딸이 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아빠, 고마워. 오늘 너무 좋았어"


아침부터 까칠하기만 했던 첫째 녀석 때문에 약간은 삐져있던 내 마음이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어쩌면 우리 가족은 이 여행을 계기로 서로를 더 잘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어린아이들이라고 생각했던 딸들이 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아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나를 따라 움직이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스스로 뭔가를 하고 자기주장도 하고 표현도 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아이들의 다른 면을 보고 알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첫째 날은 끝났고 피곤함에 일찍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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