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25년을 넘게 같이 살았고 지금도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초반은 한국에서 그리고 후반은 호주 시드니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시드니에서 산 기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가끔 한국을 갔다가 다시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면 집에 왔다는 평온함을 느끼곤 합니다.
아무튼 길다면 길고 짧다고 말하면 또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우리 부부만이 기억하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고 그냥 우리만 아는 그런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들은 굳이 끄집어내어서 말하지 않아도 나와 아내는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가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잊히지도 않습니다. 확신하건대 죽을 때까지 아마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들이라고 봅니다.
이제는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지 요즘 들어서 가끔씩 그런 것들이 불쑥불쑥 생각나곤 합니다. 한 번도 끄집어낸 적이 없었던 이야기들을 말입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그냥 그런 것들은 대부분 좋았던 것들 아니면 나빴던 것 아니면 뭐 힘들었던 시간들인데 굳이 지나간 과거를 다시 말한다고 해도 우선은 그것을 이제는 더 이상 바꿀 수 없고 두 번째 이유는 약간의 생채기 같은 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다 아물었다고는 하지만 마음에 났던 상처는 몸에 난 그것과는 달리 완전히 아물어지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다시 말하면 오래전 상처가 덧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내도 저도 포기한 듯 보입니다. 가끔씩 지나갔던 시간들을 끄집어내면 웃으면서 지나갑니다.
사실 최근 들어 느꼈던 것이긴 한데 뭐랄까 아내에 대한 나의 감정들이 변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좀 더 아내가 사랑스럽고,
좀 더 아내가 내 사람같이 느껴지고,
좀 더 아내가 내 동반자라고 느껴지고,
좀 더 아내를 보듬어 주고 싶고,
좀 더 아내를 보호해야 되겠다고 생각되고,
무엇보다도 좀 더 아내가 안쓰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갱년기인가라고 스스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딸아이 둘을 키우고 그것도 남에 나라에 와서 이리저리 치이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하다를 반복하면서 바쁘게 살다 보니 그동안에는 아내가 그리고 그녀의 자리가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했던 두 녀석들이 다 자라고 성인이 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손볼일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적어져서 그래서 내 삶에 빈 공간이 생겨서 아내를 보는 것이 달라졌나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냥 아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이 드니까 철들었나 아니면 이제 정신을 좀 차린 것인가 라는 물음표가 떠올랐습니다.
아내와 나는 연애를 정말 짧게 했습니다. 아니 요즘 말하는 그런 연애는 아예 안 하고 결혼을 한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해?라고 물으실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정말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서로의 차이를 본격적으로 발견하고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많이 부딪혔으며 싸우고 울고 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같이 사는 것이 좋았고 싸웠던 순간들 보다도 신나고 행복한 시간과 순간들이 훨씬 길고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들이 성장해 가는 것을 보는 것들이 차지했던 부분이 의외로 컸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여전히 가끔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볼 때 "그래 역시 무자식이 상팔자야"라고 서로 동의하곤 하지만 주변에 아이가 없이 지내시는 커플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을 볼 때는 그래도 자식이 있는 것이 더 행복한가?라고 헷갈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았던 우리 가족에게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호주 시드니로 이민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소중한 가족들과 헤어지고 몇 년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다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힘든 일인지 알지 못한 채로 아메리칸드림과 같이 오스트레일리아 드림만을 생각하고 건너왔습니다.
역시 이민은 잠깐 머무는 여행이랑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15년 조금 더 지난 지금 시점에서 다시 이민을 시작했던 그 시점에서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간중간 위기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아내와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그것들을 방어했고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그것들을 이겨냈던 것 같습니다. 서로의 방식은 달랐지만 언제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 시간들은 우리만 기억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딱 그럼 시점인 듯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더 사랑하고 싶고 그리고 소중하지만 더 소중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 때. 또 그런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뭔가의 감정적인 트리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더 지나가서 만약 그때도 여전히 내가 여기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들만 기억하는 것들을 주제로 별도의 브런치 책으로 연재하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면 너무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노출될 것 같아서 그리고 아내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라도 소중히 마음속으로만 간직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시드니는 이제 가을이 골목 끝에 벌써 와 있는 느낌이 듭니다.
바람이 시원하고 하늘이 파랗고 나무에 매달린 잎들이 떨어질락 말락 하는 것이 곧 단풍들이 들 것만 같습니다. 조만간 단풍 보러 블루 마운틴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시드니 린필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람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고린도전서 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