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뮈엘 오귀스트 티소,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
바빠서 책도 여유도 없는 시기라 아이쇼핑 하듯 신착 도서를 훑어보던 중에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다.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
표지만 보아도 충분하다. 책상 앞에 앉아 구부정하게 원고(모니터)를 바라보는 모습. 집중하느라 잔뜩 긴장한 어깨. 거북이처럼 튀어나온 목.
이 책의 원제는 <문인文人의 건강에 관하여>이며, 바탕이 되는 논문 제목은 <문인의 병약함에 관한 학술적 담화>이다.
사뮈엘이 말하는 문인이란 성실한 비주류 지식인을 의미하지만 (그는 루소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렇다고 해서 책에서 제시하는 병증이 지식인들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총 92개의 꼭지로 구성된 책의 내용 중 지식인[환자]의 특징을 살피면 아래와 같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질병을 유발하는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은 정신의 과도한 노동과 육체의 연이은 휴식입니다.
사뮈엘 오귀스트 티소,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 34쪽.
고행수도승처럼 그들[지식인]은 자진하여 고행했는데, 그로써 사회에 돌아오는 이득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죠. 오직 고행의 수단만이 서로 달랐습니다. 한쪽은 타는 듯한 열기와 혹독한 냉기에 자신을 그대로 내맡깁니다. 못이나 사슬, 채찍으로 살점을 찢습니다. 다른 쪽은 책과 원고, 고대 인장, 비문碑文, 암호문에 둘러싸여 자진自盡합니다. 지식인의 질병 원인인 '전적인 부동자세'에 속절없이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이죠.
사뮈엘 오귀스트 티소,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 74쪽.
오래 앉은 채 움직이지 않고 정신노동을 하는 것. 현재 좌식노동자들의 필수 구성 요소 아닌가? 뿐만 아니라 사뮈엘은 부동 자세로 진행되는 정신노동이야말로 "진짜 노역"이라고 설명한다.
육체노동으로 생활을 꾸리는 다수의 사람은 머리를 쓰는 일이 전혀 힘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노동자나 수공업 장인이 하는 일 못잖게 고되면서 이득은 그만큼 주어지지 않는 진짜 노역이다. 노동자나 장인이 하는 일은 건강과 힘을 주고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며, 잠도 잘 오게 하고 식욕도 북돋아 준다. 반면 책상에 붙어 앉아 공부만 하는 생활의 결과는 수명을 단축하고 잠을 앗아 가면 식욕을 잃게 만들고 빈번하게 불안증을 유발하는 질병이기 십상이다.
사뮈엘 오귀스트 티소,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 37쪽.
아마 이러한 생각은 정신노동의 힘듦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이 쓰인 1700년대에는 정신노동으로 인한 건강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고행"과 다를 바 없는 "전적인 부동자세"로 뇌를 쥐어짜는 힘듦, 2) 육체노동과 달리 결과는 보이지 않음(있다 하더라도 마음에 차지 않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함), 무엇보다 3) 노동시간이 정해지지 않고 하루 종일 지속됨이라는 특징을 가지는 정신노동은 땀, 근육통, 거친 호흡 등 겉으로 나타나는 표식은 없으나 정신노동자는 어느 순간 쓰러져 눕거나 죽어 버리고 만다.
92개의 꼭지 중 79개의 꼭지가 지식인이 앓은 질환의 원인과 방지책에 대한 내용이다. 집중하다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거나, 두통이 심해 쓰러지거나, 소화 기관이 망가져 고생하거나, 우울증에 걸리거나,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거나, 귀가 멀거나, 간질 발작을 일으키거나, 쇠약증에 걸리는 등 셀 수 없이 앓고 죽어가는 지식인들의 모습이 나열된다.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 보다는 <읽고 쓰는 사람의 죽음>이 더 적절해 보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병을 예방하거나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식인이 병에 걸린 게 분명하다면 무엇보다 먼저 공부를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 서재 문을 들락거리지 못하도록 굳게 잠가야 하며, 오직 편안한 휴식과 탁 트인 야외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 합니다. 이것 말고는 골똘한 사색에서 지식인을 끄집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병든 지식인은 사색을 계속하는 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사뮈엘 오귀스트 티소,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 170-171쪽.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이다. 손목이 아파요, 머리가 아파요, 허리가 아파요, 병원에 가면 의사가 하는 말과 동일하다. 그만 쓰세요. 그만 멈추세요. 쉬세요. 이제 사뮈엘에 이야기하는 환자, "지식인"은 "우리"가 된다. 공부, 즉 노동을 중단해야 하는 것,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쉬는 것, 이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우리들이다.
아픈 이유는 명백하다. 일은 끝나지 않고 쉴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일이 끝나면, 끝이다. 쉬는 시간이어야 한다. 인간의 육체는 24시간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쉴 수 있는가? 쉴 수 없다. 1)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 제대로 쉴 수 없거나, 2) 노동이 끝난 이후에도 그 이후의 노동을 '스스로' 이어나가야 한다. 신자유주의 성과사회에서 살아가는 노동자, 우리들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해야 한다. 노동은 정체성으로 포섭되었다.
체인점의 직원들은 "개성과 창조성"을 표현할 수 있는 "일곱 개의 장식물"로 유니폼을 꾸미도록 요구받는다. 이는 '창조성'과 '자기 표현'이 사회의 노동에 내재적인 것으로 변화해 온 방식을 예증하는 유용한 삽화다. (…) 통제 사회는 이제 노동자들에게 생산뿐 아니라 정서도 요구한다. (…) 종업원인 조애나는 정확히 일곱 개의 장식물을 유니폼에 달고 있었다. 그러나 일곱 개가 공식적으로는 충분하더라도 실제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이 곧바로 드러난다. 매니저가 그녀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만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기 때문이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72쪽.
충분한 것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 이상으로 해내야만 하고, 결과물을 짜내야 한다. 현재 있는 노동 현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이 상황에서 계발이라는 말은 부적절하다)해야만 한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해" 같은 광고 문구가 우리를 부채질한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 불가능이란 패배자들이나 쓰는 말이다. 퇴근하면 밤이라 할 수 없다면 잠을 줄여라. 주는 일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찾아라, 자신의 창의성(생산성)을 무한으로 발휘해라!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한병철, <피로사회>, 28-29쪽.
최근 클래스 101과 같은 온라인 강의 플랫폼이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강의 목록에서 가장 의아한 것은 <직무 교육>이다. 직무 교육은 회사에서 비용을 들여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ppt 작성하는 방법, 엑셀 사용법, 기획 작성하는 법, 디지털 퍼포먼스 마케팅 하는 법… 스피치나 외국어, 악기나 자수 같은 취미 영역이 아니라 실무 영역의 수요가 넘친다는 것은 기업의 태만이다. 노동 시간에는 교육 또한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데, 일하는 방법은 밖에서 배워 오고 회사에 와서는 결과물을 뽑아내라는 것이다. 물론 돈은 네 주머니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고.
삶이 노동, 더 나은 노동, 다른 노동(부업)으로만 이루어지면서 만연하는 번아웃과 자기 소진은 당연한 결과이다. 충분한 것은 충분하지 않다, 플러스 알파, 더 많은 것을,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사뮈엘이 보았다면 당장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이 주일, 안 먹으면 14일이 걸린다고 했던가. 우리는 이 주일 동안 눕지 못하므로 14일치 약을 받아 서서, 혹은 앉아 일하면서 앓는다. 왼쪽 귀와 오른쪽 귀에서 울리는 속삭임을 모른 체 하면서.
"그렇게 일하시면 (육체적으로) 죽어요. 그런데 그렇게 일하지 않으셔도 (사회적으로) 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