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경, <용기>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용기를 내야 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못 해요
이규경, <용기>
어젯밤,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평소처럼 약속에 가서 평소보다 조금 더 좋은 밥을 먹고, 오늘따라 길가에 사람이 없다며 웃다가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인적이 드물어 전세 낸 것만 같은 길가, 유달리 차가 없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조용한 도로는 갑자기 스산해졌다. 영화는 영화인데, 장르가 갑작스럽게 바뀐 듯한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집으로 돌아와 유튜브와 뉴스를 뒤져 보니 비상계엄의 뜻, 해야 할 일, 예측 상황과 사람들의 불안과 낙관, 공포가 한데 뒤섞여 아무리 스크롤을 새로고침해도 목소리가 넘쳐났다. 상황을 지켜보아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국회 앞으로 와 달라는 문자는 꾸준히 날아왔다. 곁에 있던 친구는 겁을 잔뜩 집어먹으면서도 가야겠다고 하면서 나는 집에 있으란다. 그런다고 내가 안 갈 수 있겠나. 곧바로 같이 차를 타고 여의도로 갔다. 내일 수업 어쩌지, 총알도 살살 맞으면 안 아픈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국회 쪽으로 걸어가는데 길이 더 한산하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과한 몸짓과 큰 목소리로 이 사태를 욕하면서 지나갔다. 나는 위협적인 사람도 아니고 사복경찰도 아니며 이 상황이 아주 불만스럽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처럼, 두 손을 펼쳐 보이는 것처럼.
살다살다 군인과 경찰과 헬기를 동시에 보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국회 정문에서 후문으로 모여든 사람들과 삼삼오오 움직이고, 핸드폰으로 의결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과정에 흠 없도록 절차대로 하는 건 알지만, 조금만 더 빨리 진행 좀 해 줘요, 조금만 더. 헬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움찔거리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흐르고 계엄해제에 대한 사안이 의결되었다.
사람들은 기뻐하면서도 반신반의하면서도, 경찰이 곧바로 해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불안해서 자리를 뜨지 못하면서도, 일렬로 걸어가는 군인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물으면서도, 버스를 향해 우르르 달려가는 경찰을 보고 움찔 떨면서도, 또 정문 담을 넘는 군인들에게 소리쳤다. 가도 되는지 좀처럼 확신하지 못하면서, 국회 주위를 서성이면서, 총을 든 상명하복의 질서가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할지 염려하면서 말이다.
세상에는 큰 목소리가 있다. 힘 있는 목소리가 있다. '헤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있다. 거스르면 큰일 날 것 같은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를 거스르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큰 목소리는 윽박지르기도 하지만 다정하게 격려하기도 한다. "넌 충분히 할 수 있어"라고.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어딘가 께름찍할 수도 있지만 "용기를 내야 해"라며 어깨를 두드린다. 그냥, 그러면 돼. 내가,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게 맞으니까.
<언다잉>의 작가 앤 보이어의 글 <아니요No>는 부정이 지니는 가치와 그것이 자신의 "예술을 이끄는 주축"이라고 말한다. 왜일까? '마땅해 보이는' 것, '당연해 보이는' 것은 실상 강한 목소리를 따르는 경우가 많이 때문이다. 그것이 옳아, 그대로 살도록 해, 라는 공기 같은 가볍고 다정한 명령의 형태로 말이다.
때로 시는 그 자체로 아니요다. 시의 상대적 침묵은 은밀한 방식으로 부정성을 노래하는 소리다. 격렬한 움직임이 가득한 외부 세계에서 드넓고 다양한 내부 세계로 도피하는 시의 행위는 때로 지시를 따르지 않는 한 방법이다. 10대와 혁명가 사이에서 비교적 인기를 끄는 시가 능숙하게 해내는 일은 무언가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고 무언가와 정반대되는 아무 말이나 던지며, 유의미한 말에 대고는 무의미한 말을, 우려스러울 만큼 무의미가 넘쳐 나는 세상에 대고는 유의미한 말을 하는 것이다.
앤 보이어, <아니요>
<용기>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말하는 동시다. 이 시를 읽으면 쪼그라진 어깨와 축축한 눈동자와 빨개진 코끝과 꼼질거리는 손가락 발가락이 떠오른다. 몇 번이나 달싹거리는 입술의 떨림이 느껴진다. 위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내려다보다가, 반복하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가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못 해요"라는.
이 안타까움을 눈으로 입으로 찬찬히 따라가면, 읽는 나는 어느 새 "나"가 된다. 사람들의 수많은 목소리, "예, 할 수 있어요"를 종용하는 목소리, 기대하는 눈빛, 부담감, 이것을 저버릴 때 닥쳐올 커다란 실망감이나 벌 같은 것들이 1연과 2연을 따라 눈덩이처럼 커진다. 그 커다란 목소리 앞에서 한껏 위축된 "나"의 씩씩하지 않은 한 걸음이 나아갈 때, "나는 못 해요"가 터져나올 때, 독자인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이 해방감은 잠시 동안의 감각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학이란 간접 경험이고, 그것은 실제 경험을 위한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보이어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에세이의 한 부분을 이용하면서 규칙과 질서가 완전히 뒤집힌 세상에 대한 시와 그 가치에 대해 논한다.
그러하니, 귀족은 비탄에 잠기고 하인은 환희에 차노라. 온 도시가 외치네, 우리 무리 안에 있는 강자들을 몰아내자고. 관공서는 공격당하고 서류는 사라지고 없네. 노예는 하나둘 주인의 자리에 오르고.
그러하니, 명문가의 자제일지언정 더는 인정받지 못하노라. 안주인의 자식이 이제 안주인이 부리던 노예 소녀의 아들 신세거늘.
그러하니, 나리들은 맷돌만 한 바위들에 묶여 있노라. 그날을 한 번도 목도하지 못한 이들은 빛을 향해 떠나고 없구나.
그러하니, 흑단 헌금함들은 박살 나고 귀한 세스반 목재는 절단돼 침대가 되고 있노라. 보라, 수도가 한 시간 만에 몰락했노라. 보라, 이 땅의 빈자들이 부자가 되었노라.
브레히트는 이 시가 “억압받는 자들에겐 몹시 바람직해 보일 수밖에 없는 종류의 무질서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다만 그럼에도 시인의 의도는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역전 기법을 동원하긴 해도 이 시는 ‘세상의 전복’을 직접 촉구하는 식의 정치적 모험을 무릅쓰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그런 전복을 상상함으로써 불가능한 것의 불가능성을 완화한다. 익숙지 않은 질서가 시라는 안전망 속에서 인지적 예행 연습을 거치고 나면, 수도가 한 시간 만에 몰락할 수 있다거나 이 땅의 빈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도 그리 가망 없는 일처럼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수도의 몰락은 인지적 예행 연습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예행 연습까지 거친다. 즉 수도의 몰락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상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사이에서 공유되며, 그런 공유 과정 중에—집단적 노력이 뒷받침되어야만 충족될 수 있는—시의 욕망은 실현을 향해 전진한다.
앤 보이어, <아니요>
그렇다. <용기>를 읽고 나면, 작은 화자, "나"의 용기의 행로를 함께 따라가다 보면 독자인 나 또한 그 행로를 마친 작은 영웅이 된다. 종이 위에서 글자 위에서 연습한 '아니요'는 종이 밖인 현실의 내가 '아니요'를 말할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 속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용기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숨을 불어넣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를 입 안에서 중얼거리면서. 그러면 작고 나약할지라도 꺼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아니요"라고 말하는, 불복하는 용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