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포 외,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에이브람즈는 <거울과 램프>에서 시를 판단하는 네 가지 기준으로 세계, 작품, 예술가, 청중을 꼽았다. 문학 작품이란 세계를 모방한다는 모방론, 예술가의 독창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한다는 표현론, 청중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효용론, 그 자체로 미적인 완결성을 갖춘 독립적 자율체라는 객관론. 사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한 가지 관점만으로 작품을 읽을 수는 없다. 독자마다 무게를 두는 부분이 달라질 뿐이다.
신비평가들은 작품 자체의 완결성을 중시하였고,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닫힌 세계로서의 텍스트의 의의를 부정할 마음은 없으나, 유사한 내용의 사랑시라도 작가가 누구이며, 사랑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 사랑이 세계가 허락한 사랑인지에 따라 텍스트의 의미는 천차만별로 나뉜다.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는 작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제대로 독해할 수 없는 퀴어 사랑시를 엮은 시선집이다.
아니,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이 저녁의 고통 속에서 단지 키스뿐이에요.
그냥 둬요,
좀 더 괜찮을 때를 위해서,
남자다운 당신의 그 갈색 몸을 말이에요.
내 욕망에는 이제 불꽃이 살아 있지 않아요,
당신과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다보니
나도 바뀌었어요. 나는 또 다른…
밤의 안개가 내려오고 있네요.
나는 이제 거의 구별할 수 없네요,
당신의 그 짙은 금발을.
아, 당신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죽음이란 그저
모호한 상상에 불과한 것을……
당신 팔을 이리 줘요,
화난 목소리로 무심하게 말하지 말아요.
그래요, 우리가 키스하게 놔줘요, 단지 키스뿐이에요.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있나요?
안토니오 보토, <소년>
그녀에게서 말 한마디 듣지 못했네.
차라리 내가 죽었다면 좋았을걸.
떠나는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네.
그리고 내게 말했네.
"이 이별을 견디어야 합니다,
사포여, 나는 마지못해 떠나가니."
나는 답했다. "떠나세요, 그리고 행복하길,
하지만 기억해요 (당신도 잘 알겠죠),
사랑에 묶인 채 남겨진 사람을.
당신이 나를 잊으면,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우리의 선물을 생각해요,
우리가 함께했던, 사랑스러웠던 모든 것들을.
제비꽃으로 만든 티아라와,
당신의 앳된 목을 감싸던 장미 봉오리와
딜 잎사귀, 크로커스를 엮어 만든 화관.
당신의 머리에 부어내린 몰약과,
소망하던 모든 것을 품고서
부드러운 깔개 위에 앉은 소녀들을.
우리의 목소리 없이는,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노래 없이 꽃을 피우는 봄 나무는 없다는 것을…."
사포, <그녀에게서 말 한마디 듣지 못했네>
<소년>이든 <그녀에게서 말 한마디 듣지 못했네>든, 작가를 지우고 바라보면 애틋한 사랑시일 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별이 드러나는 순간, 이 사랑에 깔린 불안이 함께 나타난다.
"우리가 키스하게 놔줘요, 단지 키스뿐이에요"라는 발화에는 "키스" 그 이상에 대한 욕심이 드러나지 않는다. 안개와 뒤섞인 밤이, 입맞춤에 수반되는 죽음이, 죽음을 가져오는 금기를 외면하는 애절한 몸짓과 체념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릴 뿐.
"아프로디테에게 바친/우리의 선물을 생각해요,/우리가 함께했던, 사랑스러웠던 모든 것들을." 기억하라는 말은 사랑의 신에게 바친 아름다운 공물과 함께 시들어간다. 변하지 않는 황금이 아니라 존재부터 죽음을 품은 꽃을 바쳤던 그들은 신전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사랑도 언젠가 시들 것임을 예상했을까?
거룩한 민주주의의 시발점인 고대 그리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여성들. 시민이 되지 못한 이들이 모인 레스보스 섬. 섬과 자신을 떠나는 사랑을 향한 사포의 마음은 성애와 동지애를 한 번에 잃는 고통에 젖어 있지 않았을지.
"우리의 목소리 없이는,/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으며,/노래 없이 꽃을 피우는 봄 나무는 없다는 것을", 서정이란 세계의 자아화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사포의 이 구절이야말로 서정의 시조가 아닐까. "우리의 목소리"로 빚는 "노래"가 있어야만 "꽃"이 핀다. "꽃"이 피어야지만 봄이 온다. "우리" 없이 봄은 올 수 없다는 단언, 봄을 빚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라는 저 단언.
내게 안기면 나약해지는 그대를, 다정해지는 그대를,
내 품 안에서 안전한 도피처를 찾은 그대를 사랑해.
따뜻한 요람에라도 들어간 듯 안도하는 그대를.
붉게 물든 그대를, 마치 가을 같은 그대를,
가을의 여신처럼 가녀린 모습의 그대를 사랑해.
저무는 태양의 빛을 받아 왕관을 씌워놓은 모습이겠지.
느릿한 그대를, 소리 없이 걷는 그대를,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침묵 속에 있는 그대를 사랑해.
밤이라는 존재가 그러하듯, 그대도 그렇지.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건 창백하게 죽어가는 그대의 모습,
죽는 순간의 흐느낌과 신음하는 그대의 모습이
고집스레 괴롭히는 잔인한 즐거움 속에 있네.
오, 옛날 여왕들의 자매인 그대를,
과거의 광채 속에 유배된 채 남겨진 그대를 사랑해.
달빛에 빛나는 백합보다 더 하얗게 빛나고 있지.
움직이지 않는 그대를 사랑해.
사색이 되어 떨고 있을 때, 내 창백해진 얼굴을 감출 수 없어,
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그대여!
르네 비비엔, <나약한 그대를 사랑해>
나는 입술에 연지를 바르고,
새로 난 자작나무 기둥에 입을 맞췄다,
비록 내가 미남자라 할지라도,
나의 가슴엔 고무공 같은 유방이 없다,
나의 피부에선 희고 결 고운 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는 다 시들어버린 박명의 남자다,
아아, 이렇게 애처로운 남자가 있을까,
오늘 향기로운 초여름의 풀밭에서,
반짝이는 나무 숲 사이에서,
손에 꼭 맞는 하늘색 장갑을 껴보았다,
허리에는 코르셋 같은 것을 차보았다,
목덜미에는 흰 분 같은 것을 찍어 벌랐다,
이렇게 남몰래 요염한 단장을 하고,
나는 여자아이들이 그렇게 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여,
새로 난 자작나무 기둥에 입 맞췄다,
입술에 장미색 연지를 바르고,
하얗고 키가 큰 수목을 끌어안았다.
하기와라 사쿠타로,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
<나약한 그대를 사랑해>는 나약한 그대를 사랑하는 나약한 사랑의 비겁함이 드러난다.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구절처럼, "약해 보일 때만 네가 내 것 같아." 라는, 볼품없는 자신을 향한 자조적인 고백. 그대가 오로지 약할 때에만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 나의 쓸모는 고작 그 정도라는 것, 결국 그대의 불행과 고통을 바라고야 마는 추한 마음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결코 알지 못할 그대"로부터 비롯되는가. 그대의 죽음 앞에서 하얗게 질려가면서도, 이것을 바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허락받지도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랑은 구차하게 비틀거릴 뿐이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 또한 알아주지 않는, 어쩌면 알아줄 수 없는, 알아주지 못하는 사랑으로 가슴을 쥐어뜯고 있다. 다른 이들이, 혹은 사랑하는 당신이 나를 미남자라고 불러 주면 무엇 할까. 내게는 가슴이 없는데. 분칠을 하고 연지를 바르고 허리를 묶고 장갑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려 보아도 결국 몰래 하는 짓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자 거부당할 짓이 분명하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은 것이란 하얗고 키가 큰 당신을 닮은 자작나무에 입을 맞추고 끌어안는 것뿐.
다만 화자가 생각하는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해볼 필요는 있겠다. "희고 결 고운 분 냄새"와 "하늘색 장갑", "코르셋", "장미색 연지"란 어디까지나 "여자아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마 "하얗고 키가 큰" 사람이 욕망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서 기인한 것에 가깝다. 사랑하는 사람의 욕망이 되고 싶다는 흔하디 흔한 욕망 말이다.
언젠가 이들의 사랑시 또한 흔하디흔한 사랑시로 읽히는 날이 올 것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그림자를 지우는 사랑의 형태가 있었다고, 옛날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다는 설명이 필요할 날이 올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둘이 한 몸을 이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