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구는 운명이에요

세사르 바예호, <같은 이야기>

by 난란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고생한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나의 형이상학적 공기 속에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 공기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불꽃으로 말했던
침묵이 갇힌 곳.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형제여, 들어보세요, 잘 들어봐요.
좋습니다. 1월을 두고
12월만 가져가면 안 됩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니까요.

모두들 압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먹고 있음을… 그러나
캄캄한 관에서 나오는 무미한
나의 시 속에서
사막의 불가사의인 스핑크스를 휘감는
해묵은 바람이 왜 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두들 아는데… 그러나 빛이
폐병환자라는 건 모릅니다.
어둠이 통통하다는 것도…
신비의 세계가 그들의 종착점이라는 것도…
그 신비의 세계가, 저 멀리서도,
정오가 죽음의 경계선을 지나가는 걸 구성진 노래로
알려주는 곱사등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주 아픈 날.

세사르 바예호, <같은 이야기>


첫 연을 보고 바로 시집을 빌렸다. "나는 신이/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한 문장으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운명으로 바꾸어 버린 것, 비극적 운명을 선고한 신의 불완전함까지 이끌어낸 것에 감탄했다. (편집인의 의지겠지만)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이라는 시집의 제목까지 아귀가 맞았다.


제목인 "같은 이야기"의 원제는 espergesia로 시인이 만든 단어이다. esperanza(희망)과 genesis(창세기)의 합성어로 보는 의견과 siempre la misma cosa(항상 똑같은 일)의 수사학적 표현이라는 의견, 재판에서의 '선고'를 뜻한다고도 한다. 역자는 바예호의 시집 『검은 전령』의 마지막 시로 첫 시인「검은 전령」이 신에 대한 원망과 회의를 보여주듯 세상을 알게 해준 신에 대한 원망을 담고 있다는 의미로 감안하여 "같은 이야기"로 번역했다고 한다(304). 그러나 이는 원제를 너무 무시한 처사인 듯하다.


신이 아픈 날 태어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나"의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한다. "나"의 현재만 얼핏 알아볼 수 있을 뿐. 신이 아픈 날, 취약한 날, 아마 열김에 무언가를 심각하게 더했거나 뺐을 것이 분명한 "나"의 불구는 신의 아픔으로 연유했다는 점에서 운명적이다.


그러나 이 고통, "나"의 불구, "나의 형이상학적 공기"에는 "빈 공간"이 있다. "불꽃으로 말했던/침묵이 갇힌 곳".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말한 신의 음성은 "나"에게도 임하신다. 숨은 그 무엇보다 신체적이다. 그러나 "나"의 "공기"는 "형이상학적"인데다 "빈 공간"까지 존재한다. 이 결핍. 그러나 "나"는 말한다. "아무도 이 공기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이 불구됨을 온전히 차지하겠다는 욕망.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1-5


아픈 신이 내린 "나"의 운명. 언제나 가쁜 호흡의 삶. "모두"는 "나"를 완전히 알지 못하고, "형제"에게 이 고통을 말하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상처난 삶을 말하고 싶은 욕망. 슬픔과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뽑으려는 목울대의 울렁임. "1월을 두고/12월만 가져가면 안 됩니다." 결과만 보면 안 된다. "나"의 시작을 알아야 한다. "나는 신이/아픈 날 태어났다니까요." "나"의 천성에 비극적 운명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내가 살아 있음을/내가 먹고 있음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게 다가 아니다. 나는 온전히 살아 있지 못하다니까요. 나의 시가 "캄캄한 관에서 나오는 무미한" 것이라는 것, 즉 나의 삶은 죽음과 매한가지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사막의 불가사의인 스핑크스"뿐 아니라 그것을 "휘감은/해묵은 바람이 왜 우는지는/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빛이/폐병환자라는 건", "어둠이 통통하다는 것도", "신비의 세계가 그들의 종착점이라는 것도". "정오가 죽음의 경계선을 지나가는 걸 구성진 노래로/알려주는 곱사등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나"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신이/아픈 날 태어났"기에. "아주 아픈 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아주 아프셨기에 말씀 도중 재채기를 하시었고, 그로 인해 세상은 다소 일그러졌다.


신들의 갈등에 불똥을 맞아 눈을 잃고 예언 능력과 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테이레시아스처럼, "나"는 아픈 신 탓에 늘 숨이 가쁘다. 아무도 이 고통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덕분에 온갖 불가사의함을 안다. 그것은 너무나 외롭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독이 든 성배다. 이것이 시(인)일 것이다. 고통 중에도 한 줌의 희망을 발견하고, 고통에 운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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