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은 얼마나 우스운가

김소연,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아무 몸으로 살아갈 권리>

by 난란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김소민 작가는 이미 칼럼으로 만난 적이 있다. <천진난만함이 꼴 보기 싫어>가 이 책에 실리게 되면서 떠올랐다. 아, 나 이 글 알지. 특권이란 편안함이고, 불편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불편한 사람에게 맑은 눈동자로 천진난만하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지. "그게 왜?"라고.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이 책을 묶는 키워드는 '몸'이다. 뗄레야 뗄 수 없는 몸, 남들과 부딪치고 부딪힐 수밖에 없는 몸, 남에게 보일 수밖에 없는 몸, 그래서 나보다 남의 시선에 묶이는 몸. 그럼에도 끝내 혼자일 수 없는 몸. 총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몸'은 이러한 속성을 갖는다.


관리당하는 몸 / 추방당하는 몸 / 돌보는 몸 /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인기척


어디까지나 외관에 한정되는 여성의 '관리'당하는 몸, '일반인'들보다 느리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치워지는 장애인의 몸, 본질이지만 혐오스러운 늙은 몸, 결국 다른 몸과 부대껴야 하는 몸의 이야기가 여러 삶의 프리즘을 보여주며 진행된다. 간명한 문장은 술술 읽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아서 몇 번이나 손을 멈추었다.



차별의 지독한 속성은 당하는 사람 속으로도 스며든다. 그러면 자신을 구석으로 내몬 바로 그 차별에 적극적으로 복무하기도 한다. (…) 차별은 억압받는 자의 자기혐오로 완성된다. 거기까지만 가면 굴종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억압받는 자가 억압받는 자를 억압한다. 억압하는 자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통제는 더 쉬워진다. 아들, 딸 차별의 최(61)전선에는 대개 어머니들이 있다. 육아 대부분을 하는 어머니들은 밥부터 잠자리까지 일상의 매 순간 차별할 수 있다. 차별이 시시콜콜할수록 항의하기도 뭣하다. 딸의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저항하자니 엄마도 가여운 피해자다.

(…)

이 어머니들에겐 차라리 '여자는 결핍 인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차별을 견디는 더 쉬운 방법이었을지 모르겠다. 밥 먹을 때마다, 똥 쌀 때마다, 숨 쉴 때마다 먼지처럼 쌓이는 차별은 시나브로 자아를 무너뜨린다. 매번 찬밥을 먹다 보면, 자신이 찬밥 먹을 만한 사람(62)이라고 믿기 쉽다. 자신이 자기에게마저 미천해지면 자신이 속한 부류도 미천해진다.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60-62쪽.



차별은 억압받는 자의 자기혐오로 완성된다. 왜 피해자인 어머니는 딸을 피해자로 만드는가. "첫아들인 형을 낳았을 때, 어머니는 비로소 전 씨 가문의 사람이 되었다. (…) 어머니 혼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지만, 세 아들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61)라는 전인권의 말은 희생은 아들에게 하고 요구와 분풀이는 딸에게 하는 어머니의 행위를 설명해준다. 어머니만인가, 친구, 선생님, 후배, 언니…수많은 자매들에게 느끼는 '배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같은 인간이고, 같은 몸이다. 그것의 미/추를 지정하고, 추방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모여서 만들어낸 합의다. 반복되고 학습되는 구분 짓기. 그렇지만 이것은 또 얼마나 근거 없고 허무한가?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조차 피로하다. 그것이 왈가왈부할 일인가? 사람이 움직이겠다는 것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얹을 필요가 있을까? 2022년 현재, 한국에서 배제되는 '장애인'이라는 개념도 나타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200년 전에는 장애인은 없었다."

김도현은 《장애학의 도전》에 이렇게 썼다. '장애인'이라는 카테고리는 근대 자본주의와 함께 발명됐다. 산업혁명 뒤 땅을 떠났지만 도시 노동자로 편입되지 못한 부(125)랑자들이 넘치던 때다. 이들을 수용해 노동자로 동원하는 구빈원이 등장한다. 구빈원에 수용된 사람들은 '일할 수 있는 몸'과 '일할 수 없는 몸'으로 구분됐다. '일할 수 없는 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장애인이다. 실제로 '일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돈으로 교환되는 '노동'을 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몸으로 분류된 거다. 누가 장애인인지는 사회가 정한다. 1961년 간행된 <한국장애아동조사보고서>에서는 절단, 마비, 맹인, 농아뿐 아니라 혼혈아와 사생아도 장애로 꼽았다. 미국 뉴잉글랜드에 있는 마서즈 비니어드 섬은 농인 비율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건청인들도 상당수 수화를 했다. 수화는 구화처럼 일상적인 언어였다. 19세기까지 이곳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것'을 장애로 여기지 않았다.(김원영, 《희망 대신 욕망》)

미국의 역사를 장애의 관점에서 서술한 킴 닐슨의 《장애의 역사》를 보면, 유럽인들이 오기 전 북아메리카 토착민 사회에는 대체로 신체적 장애에 따른 '장애'란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 장애를 구분하는 기준은 관계, 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124-125쪽


장애인 대 비장애인을 가르는 선은 권력이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흑인이 노예가 되듯이 비장애인 위주로 꾸려진 사회에서 장애인은 이동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126쪽



사회가 그어 놓은 선 밖으로 나서면 장애인이다. 불과 60년 전까지만 해도 혼혈아와 사생아가 장애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렇지만 그 선은 바뀔 수 있다. 선을 바꿀 수 있다면, 선을 지울 수 있다면 그 선 때문에 소외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마가렛 미드는 인류 문명의 첫 증거가 만 오천년 전 인간의 부러진 넓적다리뼈라고 말했다. 다친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고 회복될 때까지 함께했다는 것이 문명이라고 말이다.


여자라서, 늙어서, 장애가 있어서,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정상/비정상 범주를 정해 놓으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길어 봤자 30년간 누릴 수 있는 우월감? 아무리 용을 써도 인간은 늙는다. 늙어 죽는다. 남의 몸을 실컷 미워하면 돌아오는 것은 나의 몸에 대한 미움뿐이다. 그러니 생각해야 한다. 나의 몸을 미워하는 것은 남의 시선이며, 남의 몸을 미워하는 것은 근거가 없음을. 근거 없는 기준에 묶이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가. 몸은 그냥 몸이다. 살아갈 수 있다면 그만이다.


최근 <서브스턴스>에 대한 논의가 들끓고 있는 것도 몸에 대한 인식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광적인 압박을 전제한 <서브스턴스>를 단순히 젊음에 대한 '현대인'의 갈망이라는 논의에 대해 비판하고, 아카데미에서도 데미 무어(엘리자베스)가 중심이 아닌 마가렛 퀄리(수)가 본드걸 컨셉으로 무대를 진행하는 것을 보면 영화관을 나왔는데도 영화가 왜 끝나지 않느냐는 조소가 넘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이 갑갑함을 인식하는 것부터가 변화의 시작이지 않을까 하는 낙관을 조금 품어 본다. 일각에서는 영화 처음 보느냐며, 언제까지 <서브스턴스>에 대해 난리법석을 피울 거냐며 비아냥거리지만 뭐 어떤가. 영원히 이야기하자. 화면 안의 그녀의 몸과 화면 밖의 내 몸과 몸을 바라보는 그녀와 나의 시선에 대해서. 그 시선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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